ⓒ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2016년 겨울밤, 서울 홍익대 인근, 한 모임공간에 93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농산어촌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답 없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던 이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모임은 2018년 7월, 지역 청소년들과의 작당모의를 꿈꾸는 사회적 협동조합 ‘멘토리’ 창립으로 이어졌다. 조합원은 모임에 참가했던 93명. 이들을 불러모은 주동자는 권기효(34) 멘토리 대표이다. 이들이 던진 질문은 그동안 농산어촌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우리나라 읍·면·동 5곳 중 2곳은 ‘지방소멸’ 위험지역이다. 2018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한국의 지방소멸’ 조사에 따르면 전국 시·군·구 228곳 중 소멸 위험지역은 89곳에 달한다. 여자컬링팀으로 유명해진 경북 의성군은 우리나라에서 지방소멸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전남 고흥군, 경북 군위군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지자체마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중 청소년 정책은 찾기 힘들다. 단기간 성과가 나오는 귀농귀촌 인구 늘리기와 노인 복지에 대부분 예산을 쏟아붓는다. 경북 의성군의 경우 2018년 교육·복지 예산 990억원 중 노인 관련 예산은 700억원인 데 반해 청소년 예산은 6억원에 불과했다. 권기효 대표는 그 문제를 파고들었다.

“지역 청소년은 복지가 아니라 투자 대상”

권 대표는 ‘지방소멸’의 해법이 지역의 청소년에게 있다고 믿는다. ‘지방소멸’ 속도가 가장 심각한 의성군·고흥군의 경우도 총인구 5만~6만명 중 청소년 인구(9~24세)는 3000~5000명대이다. 아직은 네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유입 인구 한두 명 늘리는 것보다 이 청소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청소년들이 도시로 떠나더라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이유가 있다면, ‘지방소멸’의 속도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14일 서울역 인근에서 권 대표를 만났다. 권 대표는 8년째 농산어촌 청소년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어떻게 살 수 있나요?” 권 대표가 오랫동안 지역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지역 청소년들이 도시로 떠나는 방법은 잘 압니다. 그런데 고향에 남는 방법은 모릅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 역할을 멘토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강화군과 충남 보령군, 강원 영월군 등 7개 지역의 청소년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실험했습니다.”

실험의 첫 번째 목표는 ‘농산어촌은 1차산업을 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기승전 농어업’이 아니라 지역 자원에 디자인, 테크를 접목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역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동안 정책이나 지원 단체는 지역 청소년을 복지의 대상으로만 봤다. 소외되고 낙후된 곳으로만 바라보니 1회성 도와주기에 그쳤다. 권 대표는 반대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기회를 만들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게 했다.

예를 들면 ‘보통이 아닌girl, 보통이 아니君’ 프로젝트이다. 보통인 아이들을 보통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었다. 성적피라미드에서 중간인 대다수의 아이들이야말로 지역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이다. 학교 측의 도움을 받아 면접을 통해 아이들을 뽑았다. 청소년 3명에 대학생 2명을 한 팀으로 묶었다. 대학생들은 지역을 오고가며 함께 놀아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처음엔 ‘노인 문제’처럼 큰 이슈를 들먹이던 아이들이 점차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지역 축제 기간이 되면 장거리만 고집하는 택시 때문에 단거리 손님은 택시 잡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택시회사를 찾아가 기사들의 성향을 조사하고, 장거리·단거리용 스티커를 만들어 택시에 붙였다. 택시 승강장 대기선을 두 줄로 만들고 나눠서 운행하게 했다.

패션에 관심 많은 여학생은 “우리 동네 아이들은 옷을 너무 못 입어서 한 명씩 코디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마을에는 또래들이 갈 만한 옷가게도 화장품가게도 없었다. 패션과 뷰티 파트로 나눠 우리동네형 매장을 열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패션 파트는 서울 패션타운을 돌아다니며 옷을 보러 다녔고, 뷰티 파트는 또래의 화장품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는 엄마, 할머니의 컬렉션을 준비했다. 패션쇼도 기획했다.

노인들은 아프면 무조건 서울의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네에 갈 만한 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인들은 주로 동네 보건소만 이용했다. 노인들이 생각하는 동네 의료 수준의 기준이 보건소였던 것이다. 동네 병원들을 다니면서 시설을 조사했다. 의사들이 병원을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해 QR코드로 연결했다.

아이들과 지역의 스토리를 발굴해 새롭게 브랜딩을 하는 ‘里모델링’ 프로젝트도 했다. 강원도 영월군에서 진행했던 케이스이다. 이곳에는 지역민도 잘 모르는 효자열녀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한 집 건너 한 집씩 효자비, 열녀비를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장독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다. 깊은 산골짜기라 전란도 피한 곳이다 보니 수백 년 씨간장이 전해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며느리들을 취재하고, 소포장 패키지를 디자인해 ‘효자 된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사회적 협동조합 멘토리는 지역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충남 보령 지역에서 ‘보통이 아닌’ 프로젝트(왼쪽)를 실험했고, 현재 경기 강화 지역에서 ‘里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photo 멘토리
사회적 협동조합 멘토리는 지역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충남 보령 지역에서 ‘보통이 아닌’ 프로젝트(왼쪽)를 실험했고, 현재 경기 강화 지역에서 ‘里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photo 멘토리

실패를 통해 배우다

권 대표도 팀원으로 참여했다. 93명이 뜻을 모은 이후 2년 넘게 20여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겨우 옷 떼다 파는 일이나 시키느냐”고 학부모회의까지 소집해 노발대발 항의를 했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헛바람 넣지 말라”고 따졌다. 아이들도 권 대표도 눈물 흘리며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 사업비 지원이라도 받기 위해 군청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목이 아프게 설명을 했건만 돌아온 말은 하나같이 “아이들과 창업할 겁니까?”였다.

‘효자 된장’ 프로젝트는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이곳에서도 주민들은 “왜 공부는 안 하고 싸돌아다니느냐”며 야단치기 바빴고 군청에서는 역시나 “창업할 거냐”고 물었다. 지역 예산들은 당장 성과로 연결되는 유입인구와 창업자 숫자가 중요했다. 청소년은 아예 투자 대상이 아니다.

최근 지자체들이 앞다퉈 하는 것이 도시재생 사업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기존의 지역활성화 정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시설 개보수나 새 건물부터 짓고 보자는 식이다. 장기적으로 청소년을 키우는 것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도전을 막는 가장 큰 적은 어른들이었다. “어린놈들이 뭘 알아. 애들은 공부나 해.” 대부분 지역 어른이 아이들을 보는 시각이었다. 부모들도 힘든 농사일을 대물림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제는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전이 실패로 끝난 경우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다시는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는 줄줄이 엎어지고, 자금도 바닥이 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권 대표도 힘들었다. 진행비며 멘토들 차비며 비용 부담도 엄청났다. 지원해주는 곳도 없고 순전히 권 대표가 감당해야 했다. 그동안 쏟아부은 돈만 5000여만원이었다. 권 대표의 부모님이 아들 결혼자금이라고 모아놓은 것을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패는 ‘멘토리’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켜주었다. 실패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확실하게 파악했고, 멘토리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됐다. 비영리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절감했다. 지난 4월 멘토리의 사업 방향도, 프로그램도 재정비했다.

지역 청소년들이 활동할 판을 깔아주는 프로젝트는 3가지다. 아이들과 다양한 작당모의를 하는 ‘보통이 아닌 프로젝트’, 지역 자원을 브랜딩하는 ‘里모델링’, 멘토단이 지역에 상주하며 지역 청소년과 지역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탐 크루즈(耽 Crews)’다. 탐 크루즈는 대학생 크루들이 휴학하고 아예 지역으로 내려가 상주한다. 무급봉사라는 기존의 공식을 깨고 인턴십 등을 통해 급여를 받으면서 마을 청소년과 함께 지역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탐 크루즈’는 지자체의 청년일자리사업과 도시재생사업 등을 통해 거점공간과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다. 지역을 알아가는 로컬 다이버(1년 차), 상품 개발 등으로 지역을 내 손으로 변화시키는 로컬 메이커(2년 차), 지역을 내가 소개하는 로컬 큐레이터(3년 차)까지 3단계 활동 모델도 만들었다.

현재 멘토리의 里모델링 프로젝트로 강화 지역 청소년들이 여행 상품을 만들고 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새로운 강화를 보여주는 ‘로컬투어랩’은 오는 12월 론칭이 목표다. “동네 이장들을 찾아가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작은 책방들을 연결하고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아이들이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문제는 활동비다. 다행히 아산나눔재단, 삼성꿈장학재단 등 멘토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곳이 생기고 있다. 멘토리의 프로그램으로 지자체 사업을 위탁받아 진행할 수도 있다. 불러주기만 하면 프로그램과 인력 들고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 권 대표는 “인건비 지원만 해줘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인건비 명목으로 지원하는 사업이 아예 없다”고 했다. 현재 멘토리는 정직원 2명에, 시간제 3명, 멘토단이 143명 있다. 멘토리의 창립 멤버 93명은 대학을 졸업해 사회로 나가고 그중 20여명은 서포터 그룹으로 멘토리를 돕고 있다.

비행청소년에서 청소년 크루로

권 대표의 고향은 당연히 농촌이라 생각했는데 서울 강남 출신이다. 그는 어쩌다 농산어촌 청소년에 빠지게 됐을까. 그는 중학생 때까지 야구선수였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한동안 방황했다. 엇나간 아들을 보다 못해 아버지가 잘 아는 대학생들을 자객으로 파견했다. 형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학교로 돌아가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갔다. 연구실에서 매일 실험만 반복하다 보니 답답했다.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더 재미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은데…. 돌아보니 형들 따라 농촌 가서 아이들 공부 가르치고 놀았던 때가 가장 즐거운 기억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받았던 것을 저도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요. 학교를 나와 농산어촌 청소년 멘토링을 하는 NGO에 들어갔습니다.”

두세 달 만에 권 대표의 눈에 멘토링의 한계가 보였다. 대학생 멘토들이 방학 때 2주 정도 내려가 전공에 대해 설명해주고 같이 공차기 하다 ‘나의 꿈 찾기’ 하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나도 못 찾는 꿈을 2주 만에 찾아준다? 결국 돈 벌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을 억지로 버티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간경변증까지 얻었다. 말만 하다 오는 멘토링이 아니라 진짜 실행하고 도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다. 대학생 멘토들 중에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을 규합한 것이 2년 반 전 홍익대 모임이었다.

“보통 농산어촌 청소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 이전에 우리 동네에서 뭘 할지를 고민합니다. 이들을 체인지메이커로 키운다면 지역을 새로운 방향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서울과 전국 농산어촌을 오가며 고군분투하기를 8년, 이제 그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방향도 알겠고 자신감도 생겼다. 다문화 아이들을 비롯해 농산어촌의 문제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동네에서 어떻게 살 수 있나요?”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권 대표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해야 할 일이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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