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는 한동안 시사상식 용어로 군림했다. 나아가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이 머지않아 미국을 앞지르고 명실상부한 ‘중국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부심했으며 아예 일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시각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며, 미국은 더욱 번영하지만 “중국은 끝났다”고 단언하는 도발적 예언이 있다. 바로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의 ‘부재한 초강대국’(The Absent Superpower·2017)이다. 부제는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다. 저자가 2014년에 펴낸 ‘우연한 초강대국(The Accidental Superpower)’의 후속편이다. 우리말 번역(2019)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예 부제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은 셰일 혁명을 계기로 미국이 스스로 국제무대에서 물러나, 바야흐로 ‘미국 없는’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은 그동안 으레 있던 자리에 ‘부재한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이다. 왜 미국은 국제무대를 떠나려고 할까. 그런 ‘미국 없는’ 세계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런 당혹스러운 물음들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미국의 셰일 산업은 대략 2005~ 2007년 무렵 본격화되었다. 산유국들이 유가 인하로 압박하자 셰일 기업들은 경영합리화, 개술개발 등을 통해 필사적으로 생산성을 제고했다. 2014년 셰일석유의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75달러였다. 이것이 2015년 50달러, 2016년 40달러, 현재는 20달러대까지 내려왔다. 이는 기존 유전의 생산성을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이다.

더구나 셰일석유 및 셰일가스는 원거리 해양운송이 불필요하다. 유정이 내륙에 위치해 자연재해나 전쟁에 휘말릴 우려도 없다. 또한 6주 만에 새 유정을 가동할 정도로 시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싼 가격에 적정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미국은 2017년에 이런 이상적인 에너지 자급을 달성했다. 그것이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돌이켜보면 미국은 2차대전 후 소련이라는 적과 마주했다. 당시 미국이 택한 전략이 브레튼우즈 체제다. 미국이 자국의 시장을 필두로 세계시장을 개방하고 해양운송로를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 ‘우리 편’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매수(買受)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 체제 속에서 자유진영은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했고 성공적으로 소련 봉쇄 라인을 구축했다.

거기에는 구축국이었던 일본, 독일, 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신흥개발국가들 역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가장 큰 혜택을 향유했다. 심지어 뒤늦게 이 체제에 참여한 중국마저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해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사라졌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바닷길을 통해 자국으로 석유를 운반해야 했다. 과거처럼 마뜩한 일은 아니라도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자급자족을 달성한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바야흐로 미국은 교역 없이 오로지 내수시장만으로 활기차게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현실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세계질서에서 손을 떼고 ‘부재한 초강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아메리카 퍼스트’는 트럼프뿐만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미국 없는’ 세계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한마디로 각자도생의 ‘무질서’, 즉 전쟁터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단호한 경고다. 그는 대표적인 세 개의 전선(戰線)을 전망한다.

첫째로, 유럽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전쟁이다. 러시아는 지금의 국경선이 너무 길고 불안정하다. 필연적으로 구소련의 경계로 밀고 나오게 된다. 구소련 국가들은 물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폴란드, 영국, 독일, 터키 등이 그 전쟁에 휘말리기 쉽다. 그것은 지구전(持久戰)이 된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를 공격해 크림반도를 손에 넣은 상태다.

둘째로, 페르시아만전쟁이다. 한때 미국은 이라크를 전면 공격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급속하게 군사력을 철수시키고 있으며 결코 더 이상 개입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역내 패권을 놓고 이미 격돌하고 있다. 이 갈등 역시 쉽게 결말이 나지 않은 채 석유 수급 체계를 혼란에 몰아넣게 된다.

셋째로, 중국과 일본의 유조선 전쟁이다. 일본은 석유소비량의 전량을, 중국은 소비량의 3분의 2를 수입해야 한다. 이들은 유조선에 석유를 싣고 긴 바닷길을 돌아와야 한다. 세계 석유시장이 불안정하고 공급이 제한될 경우 양국은 국가적 생존을 걸고 수송로 확보 전쟁을 벌이게 된다. 한국은 이 격렬한 전쟁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다.

이 전쟁에서는 일본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해양국가이고 해군력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또한 대만이라는 절대적 우군이 있고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도 우호적이다. 더구나 일본은 어떠한 재난을 당해도 상당 기간 버텨낼 만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태평양 너머로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지원받을 희망도 있다.

반면 중국은 바다에서 일본에 필적하기 어렵고 역내 국가들과도 적대적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 힘을 쏟고 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또한 상하이, 홍콩, 광둥 등 동남부 해안도시 지역은 외부로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더구나 전 세계적인 인구 구조 변동에 따라 세계 어느 곳에도 거대한 중국을 부유하게 해줄 만한 대규모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부재한 초강대국’ 미국은 광활한 대륙이자 안전한 섬 안에서 풍부한 셰일에너지와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번영을 구가한다. 하지만 석유 메이저 등 미국의 대기업들은 혼돈에 빠져든 세계를 무대로 오히려 더욱 달콤한 초과수익을 향유한다. 미국은 이런 번영과 평화가 위협받는 경우에만 아주 선택적으로 세계질서에 관여할 것이다.

저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 모든 나라에 대한 전망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미래는 대체로 우울하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온통 우리의 선택과 미래에 쏠린다. 저자는 ‘어느 쪽에 설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행복의 전부라고 말한다. 전쟁이 벌어질 테니 편을 선택하라? 선택을 잘못하면 죽는다. 설사 선택을 제대로 해도 전쟁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11번째로 부유한 나라다. 그 대가는 세계 5대 석유 수입 국가라는 점이다. 그런데 석유 조달이 불안해질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다. 하지만 마땅한 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어도 우리처럼 ‘미국 있는’ 세계의 수혜자일수록 ‘미국 없는’ 세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경고다.

저자는 미국 관리 출신의 민간 전략컨설턴트다. 색안경을 끼고 그의 주장을 애써 평가절하해보려고 해도 많은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예언은 냉철하고 무자비하다. 그러나 정확한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예언에 따라 현명하게 대처하기 때문이다. 우리야말로 그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도록 머리를 쥐어뜯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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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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