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이. ‘Age-3136(이별)’. 65.1×90.9㎝. 캔버스에 오일. 2013년
이진이. ‘Age-3136(이별)’. 65.1×90.9㎝. 캔버스에 오일. 2013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커피 마시는 시간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서 마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다. 나 혼자 마시는 커피이니 내 식대로 만든다. 먼저 계량스푼으로 커피 한 스푼을 담아 커피 분쇄기에 넣는다. 예전에는 커피 알갱이가 부서지는 느낌이 좋아 손으로 직접 돌리는 핸드밀을 썼는데 지금은 손목이 아파서 전동 그라인더로 바꿨다. 원두커피를 마실 때는 원두를 약간 굵게, 카푸치노를 마실 때는 조금 곱게 간다. 커피를 가는 동안 방안에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 퍼진다. 텁텁하고 건조한 삶의 공간에 커피향이 내려앉는 순간이다.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서버에 드립퍼를 올린다. 무릉도원을 찾아 부암동에 갔을 때 창의문 입구에 있는 오래된 카페에서 큰맘 먹고 구입한 도자기 드립퍼다.

묵직한 드립퍼에 분쇄한 커피를 넣으면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다. 팔팔 끓인 물을 커피주전자에 담아 커피잔의 8부 능선까지 채운다. 커피잔에 미리 뜨거운 물을 부어두면 ‘워머’가 없어도 따뜻한 잔에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별 상관이 없지만 겨울에는 이 방법이 매우 유용하다. 따뜻해진 커피잔이 입술에 닿으면 잔뜩 긴장된 신경이 일시에 무장해제됨을 느낄 수 있다. 전기주전자에 담긴 물을 커피주전자에 부었다가 다시 전기주전자에 붓는다. 그 과정을 두 번 정도 되풀이하면 물이 커피 내리기에 알맞은 온도까지 식는다. 핸드드립커피에서는 물의 온도가 중요하다. 연하게 볶은 원두는 물의 온도가 90도 정도로 뜨거워야 하는 반면 진하게 볶은 원두는 80도 정도가 알맞다. 집에서 혼자 내려 먹는 커피인데 온도계까지 준비하기가 번거로워 이런 방법으로 물 온도를 조절한다.

물이 적당히 식으면 드립퍼 안의 원두에 조금씩 붓는다. 처음에는 커피를 물에 적셔준다는 느낌으로 몇 방울만 떨어뜨린 후 두 번 호흡하는 시간만큼 쉬었다가 나선형을 그으며 다시 천천히 부어준다. 커피서버에 진한 갈색의 커피가 떨어지면 다시 물을 붓기를 두 번 정도 더해 커피를 추출한다. 원두가 많으면 진한 색의 커피가, 원두가 적으면 연한 색의 커피가 만들어진다. 커피를 다 내렸으면 서버에 담긴 커피를 물이 담긴 커피잔에 천천히 붓는다. 원하는 농도만큼 부어주면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된다. 커피 내리는 시간은 길어야 5분, 준비시간까지 합해도 10분이 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 덕분에 하루가 넉넉해질 수 있으니 커피 끓이는 시간은 내게 위로이자 여유이며 하루를 가치 있게 쓰라는 무한정한 격려다. 원두 가격도 한 잔에 500원이면 충분하다. 특히 점심을 먹은 후 오후 3시쯤 마시는 커피가 최고로 맛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준다.

온몸에 스며드는 커피맛을 음미하고 있노라면 장유(張維)가 400년 전에 쓴 ‘비 오는 날 기암자에게 부친 시’가 저절로 이해된다. ‘책상 하나에 바둑판 하나/ 약 달이는 화로와 차 따르는 그릇 몇 개/ 이거면 한평생 충분하리니/ 안달복달할 것이 뭐가 있겠소.’ 커피 마실 때의 내 심정이 딱 그렇다.

이별할 때도 대화할 때도 항상 차가 있었다

남자는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나무의자에 앉아 뒷모습만 보인 여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등에 비친 모습만으로도 그녀의 무거운 심정이 충분히 짐작된다. 창밖으로는 바다처럼 넓은 강물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어쩌면 진짜 강물이 아니라 벽에 붙여진 사진일지도 모른다.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두 남녀의 이별 또한 비현실적인 현실이리라. 이진이가 2013년에 그린 ‘Age-3136’은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이별이라서 익숙하고, 이별의 원인이 모두 개별적이기 때문에 또한 낯설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개별적인 이별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이 그림이 낯선 이유는 또 있다. 커피라는 단어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를 가차 없이 깨버리기 때문이다. 갈색빛이 도는 커피에서 연상되는 따뜻한 온기, 구수하고 사려 깊은 대화, 그 공간에 얹어진 거품 같은 훈훈함. 이런 낭만적인 요소가 이 그림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커피 맛 또한 마시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맛있는 커피라도 그들이 마신 커피 맛이 내가 오후 3시에 마신 커피 맛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지금 커피 맛이 문제겠는가. 두꺼운 침묵 앞에서 목이 말랐을 것이다. 저 견고한 침묵을 무슨 수로 깰 수 있을까. 오른쪽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은 이미 절반 이상 비어 있다. 이진이의 ‘Age-3136’은 커피와 이별을 주제로 그린 유일한 그림일 것이다.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송하음다(松下飮茶)’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생활을 가늠할 수 있는 차 그림이다. 살짝 더위가 느껴지는 늦은 봄날에 두 선비가 뒷산에 올랐다. 왼쪽에 콸콸 흐르는 계곡물을 보니 제법 울창한 산인 듯하다. 땀이 흐르고 정강이뼈가 시큰하다고 느껴질 즈음 경치 좋은 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웠다. 두 선비는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시동이 끓여준 차를 마신다. 뜨거운 차를 마시니 온몸이 시원해진다. 역시 더위를 식힐 때는 뜨거운 차가 제격이다. 한 사람은 이미 차를 다 마신 듯 여유롭게 팔을 짚고 앉아 앞사람을 쳐다본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할 차례다. 오랜만에 벗을 만나 차를 즐기는 한가로움을 마음껏 누려볼 시간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안 시동이 두 손을 앞으로 짚은 채 입김을 후후 불어 화로의 불심지를 돋우고 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차도 자주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소나무와 언덕을 그린 필선이 붓으로 그렸다고 보기에는 왠지 거칠다. 그 궁금증은 오른쪽 상단에 적힌 ‘지두법(指頭法)’이라는 단어에서 풀린다. 지두법은 붓 대신 손가락에 먹이나 물감을 묻혀서 그린 그림을 뜻한다. 손가락 대신 손톱이나 손등 혹은 손바닥을 사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때 그린 차 그림은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심사정이 그린 ‘송하음다’는 차 그림 중 찻잔을 직접 입에 대고 차를 마시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송하음다’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의 성(性)이 바뀌었다. 이진이의 ‘Age-3136’ 속 인물이 이성인 반면 심사정의 ‘송하음다’ 속 인물은 동성이다. 조선시대의 차 그림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남녀가 한자리에서 마주 앉은 모습은 전무하다. 공개석상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던 풍조가 ‘남녀칠세자동석’으로 바뀐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사정. ‘송하음다’. 18세기. 28×38.5㎝. 종이에 연한 색. 개인
심사정. ‘송하음다’. 18세기. 28×38.5㎝. 종이에 연한 색. 개인

몇 명이 마실 때가 가장 좋을까

우리는 왜 차를 마실까. 명나라 때의 문인 도륭(屠隆)은 ‘고반여사(考槃餘事)’에서 차의 효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는 갈증을 없애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담을 제하고, 잠을 덜 오게 하며, 소변이 잘 나오며, 눈을 밝게 하고, 머리가 좋아지고 걱정을 씻어주며, 기름기를 씻어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본래 ‘하루도 차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차는 몇 명이 마실 때가 좋을까. 도륭은 다시 차 마시는 아취(雅趣)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손님이 많으면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정취가 부족하게 된다. 혼자 마시는 것은 신비롭고, 두 사람이면 가장 좋고, 3~4인이면 아름다운 멋이라 하고, 5~6인이면 평범하며, 7~8인이면 베푸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에는 혼자 마시거나 사람 수가 적은 것이 좋다는 뜻이다. 심사정의 ‘송하음다’에서는 두 사람이 마신다. 가장 좋은 인원이다. 나처럼 집에서 혼자 커피 마시는 신비로움은 없겠지만 두 사람이 마시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대화가 술술 잘 풀릴 것이다.

심사정은 ‘송하음다’ 외에도 차와 관련된 그림을 한 점 더 그렸다. 두 선비가 뱃놀이하는 ‘선유도(船遊圖)’가 그것이다. 뱃놀이하는 그림이 차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겠지만 때로는 작은 소품 하나가 그림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림은 매우 독특하다. 두 선비가 탄 배는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물결 위를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 배 위에는 선비와 노를 젓는 사공 외에 특이한 물건들이 눈에 띈다. 사각의 책상 위에 놓인 책과 찻잔 그리고 꽃병과 고목 위의 학 등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그림을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알려진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진단했다. 고목 위의 학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임포라기보다는 육귀몽(陸龜蒙)이 아닐까 생각한다. 육귀몽은 당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그의 자(字)인 노망(魯望)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천수자(天隨子), 보리선생(甫里先生) 등의 호가 말해주듯 속인(俗人)들과 교유하지 않고 배 한 척을 마련해 강호를 유람하며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는 배에 항상 서책과 붓을 걸어두는 필상(筆牀), 다기(茶器), 낚시도구 등을 싣고 다녔다. 또한 피일휴(皮日休)라는 벗과 유독 친교가 깊어 그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서 엮은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이 전해진다.

이것이 ‘선유도’의 주인공을 임포가 아닌 육귀몽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임포고사(故事)에는 서책과 필상과 다기 등의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임포 곁에는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는 스토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직 학과 매화만 포진해 있다. 피일휴 같은 벗이 보일 리 만무하다. 물론 임포를 보좌하는 시동은 예외로 친다. 술 생각이 날 때면 목에 술병을 걸쳐 술집에 보냈다는 사슴도 그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그림 속 주인공이 육귀몽이라면 뜬금없이 날아든 학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학은 임포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길상을 뜻하는 장소에는 어디든 날아간다. 학은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長壽)를 상징하며, 선학(仙鶴)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신선들이 하늘을 날아다닐 때도 학의 등을 타기 때문이다.

과유불급과 수액 당하기를 넘어서

우리는 차 마시는 사람을 차인(茶人) 혹은 다인(茶人)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차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당나라 때의 육우(陸羽)는 차를 즐겨 마신 사람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대신 차를 마시며 글을 썼다. 그가 차에 관해 쓴 책 ‘다경(茶經)’ 3편은 거의 차 분야의 ‘바이블’로 통한다. 사람들은 그를 다신(茶神), 다성(茶聖), 다선(茶仙)이라 추켜세웠고, 어떤 이는 ‘다전(茶顚)’이라 불렀다. ‘차 미치광이’라는 뜻이다. 모두 다 존경과 찬탄과 경외심을 담아 붙인 ‘닉네임’이다. 그런데 육우와 관련해 믿을 수 없는 얘기가 전해진다. 역시 도륭의 ‘고반여사’에 나온 내용이다. 육우가 차를 따서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말리라고 시켰다. 짐작건대 차를 덖으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피곤한 나머지 깜박 졸다 차를 까맣게 태워버렸다. 먹을 수 없는 차를 보고 화가 난 육우는 철사줄로 아이를 묶어 불 속에 던져버렸다. 도륭은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잔인하기가 이와 같으니 그 밖의 일이야 볼 것도 없으리라.’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과유불급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 왕몽(王濛)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차를 매우 좋아해서 그의 집에 오는 사람마다 반드시 차를 마시게 했다. 그중에는 차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물배’가 차서 불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방문할 때마다 ‘오늘은 수액(水厄)을 당하는 날’이라고 불평불만을 했다. 수액은 ‘수재(水災)’와 같은 말이니 물로 인해 생긴 재액이다. 수재가 가뭄이나 홍수 같은 큰 변고만으로 생긴 재액이 아니라 차 마시는 사소한 일에도 해당함을 알려주는 일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는 언제든 재액이 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어찌 중국만의 일이었겠는가.

차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중국에서 처음 들어왔고, 9세기 전반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고 하니 거의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의 삶 깊이 뿌리내렸다. 고려시대 때는 불교의 중요한 공양물로 올려졌고, 왕실과 귀족의 일상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다반사(茶飯事)’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차 열풍이 조금 주춤했지만 후기에는 다시 ‘차 매니아’들이 등장해 음다(飮茶) 풍조가 유행했다. 선비들은 경쟁적으로 차맷돌, 철병, 돌솥, 다종, 돌냄비, 다합 등의 도구를 수집하거나 선물로 주고받았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궁핍하면서도 차는 마셔야 사는 차벽(茶癖)이 있는 사람들이 출현했고 차의 향, 색, 맛에 탁월한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차를 매개로 하여 인연이 맺어졌고, 멀리 떨어진 벗에게 안부의 글과 함께 보낸 차 한 봉지는 소통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길거리를 걷다 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카페일 정도로 찻집이 성행이다. 질긴 인연을 끝내는 카페에도, 그리운 벗과 정담을 나누는 소나무 아래에도 차는 역사의 증언자처럼 자리를 차지한다. 차의 종류가 녹차에서 구기자로, 감잎차에서 커피로 바뀌어도 차는 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 차는 때론 어색한 침묵을, 때론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사람 몸에 들어가 순하게 스며든다. 커피를 마시며 마무리할 수 있는 이별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을 해가며 끝나는 이별 속에는 커피가 들어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차 한잔도 없이 일단락 짓는 인연은 이별보다 더 서글프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별을 맞닥뜨릴 그대에게 조주(趙州) 선사의 말을 전한다.

“차 한잔 마시고 가게나(喫茶去).”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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