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용. ‘만물상’. 197×291㎝. 캔버스에 유채. 2000
송필용. ‘만물상’. 197×291㎝. 캔버스에 유채. 2000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면 순식간에 마음이 정처가 없어진다. 들썩거리는 가슴을 잠재우려면 지체하지 말고 무조건 떠나야 한다. 알토란 같은 40대를 그렇게 송두리째 역마살에 갖다 바쳤다. 무엇이 사무쳐 밖으로만 나돌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밖으로 뛰쳐나가 헤매고 다닌 곳이 붓다로드, 박물관, 유적지 등과 같이 나의 전공을 확인하고 심화시켜줄 수 있는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10여년 동안 밖으로만 나돈 시간이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평생을 집 밖에서 살다시피 한 정란(鄭瀾·1725~1791)에 비하면 나의 방황은 창해일속(滄海一粟)에 불과하다.

정란은 호가 창해일사(滄海逸士)였다. ‘창해’는 넓고 크고 푸른 바다를 뜻하고, ‘일사’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다. 일사는 은자(隱者), 은사(隱士), 또는 유인(幽人), 일민(逸民)이라고도 부른다. 창해일사는 가슴속에 바다와 같은 큰 포부를 지녔으나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해일사가 가슴속에 품었던 포부는 무엇이었을까. 여행이었다. 정란은 여행이 좋아 전국 방방곡곡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조선 천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는 당시 선비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말 대신 청노새를 탔다. 동행인은 어린 종 한 명뿐이었고 준비물은 보따리 하나에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런 부실한 장비로 금강산 비로봉에 네 번이나 올랐다. 지리산도 ‘앞마당’이라고 부를 만큼 자주 다녔다. 53세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天池)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산수에 ‘미친병’이 들었고, 자연에 ‘고질병’이 들었는데 그 병증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고상한 취미다.

정선이 올랐던 금강산을 송필용이 또 오르네

송필용이 2000년에 그린 ‘만물상’은 감상자가 직접 산꼭대기에 오른 듯한 시원함을 선사한다. 송필용은 만물상 일만이천봉에서 압도된 감정을 큼지막한 300호 대작으로 완성했다. 금강산의 사계를 보기 위해 1999년 1월부터 금강산로가 차단될 때까지 열 차례 이상 답사를 다녀온 결과다.

화면의 대부분은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창칼처럼 번쩍이는’ 흰색의 금강산 만물상이 차지했다. 오른쪽 하단의 짙은 검은색 야산은 만물상을 바라보는 전망대 역할을 할 뿐이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 중 단연 스펙터클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는 금강산의 함축된 산세에서 우리 땅의 근원적인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특히 바다 쪽에 있는 외금강은 산과 물의 변화가 천변만화한 곳이라 그 조화로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대기의 극적인 변화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수시로 바꿔놓았다. 같은 장소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달리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금강산에 오르고서야 알았다. 그때의 감동을 20여년 가까이 붓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그의 금강산 작업은 퍼내도 마를 줄 모르는 샘물처럼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송필용의 ‘만물상’은 현재 청와대에 걸려 있다.

송필용의 ‘만물상’은 정선(鄭敾· 1676~1759)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에서 힌트를 얻었다. ‘단발령망금강’은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단발령은 내금강을 오를 때 가장 먼저 금강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고개다. 단발은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뜻이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 고개에 올라서서 머리를 깎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단발령에 오르면 ‘이곳이 미치도록 좋아’ 굳이 마의태자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대비다. 검은색과 흰색, 강함과 부드러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비되는 두 세계를 운무로 채웠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해버렸다.

정선이 보여준 이런 대비적인 구도는 당시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다. 미점(米点)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수직준(垂直皴)의 세계는 불교의 불보살이나 도교의 신선이 사는 이상세계다. 운무는 두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자 두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다. 운무 때문에 금강산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세계가 되었고 아스라한 피안의 세계로 물러난다.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이상세계. 과연 현실과 이상세계는 만날 수 있을까.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할까. 변화무쌍한 자연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사는 인간세계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다.

정선은 대비된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미점과 수직준을 사용했다. 사람들이 서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단발령에는 부드러운 미점을 찍었고, 흰색으로 빛나는 금강산에는 날카로운 수직준을 그었다. 미점은 붓을 옆으로 뉘어서 횡으로 찍는 점묘법이다. ‘미(米)’는 쌀이라는 뜻으로 쌀 같은 점들을 무수히 많이 찍어 습윤한 여름 산이나 풀, 나무를 그린다. 미점은 북송(北宋)의 문인화가 미불(米芾)이 창안한 기법이다. 원래는 그의 성을 따서 붙인 기법인데 공교롭게도 성과 쌀이 일치하니 우연치곤 참 대단한 우연이다. 미불이 자신의 성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미점을 창안한 것은 아닐까. 공부하다 보면 가끔씩 이런 엉뚱한 궁금증 때문에 샛길로 빠질 때가 많다.

수직준은 날카로운 바위산을 묘사하기 위해 필선을 죽죽 그어 내린 준법(皴法)이다. ‘준’은 주름이니 준법은 산의 주름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산이나 바위를 묘사할 때 윤곽선을 그린 다음 입체감과 명암,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에 다양한 필선을 가하는 기법’이다. 정선이 즐겨 사용한 수직준은 최북, 김응환, 김하종 등 수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후배들은 금강산 암봉을 그릴 때 ‘트레이드 마크’처럼 수직준을 썼다. 민화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그 여파가 현재를 살고 있는 송필용에게도 이어졌다.

송필용은 정선이 이루어놓은 대비의 세계를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송필용이 받아들인 것은 다만 대비의 세계였지 표절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령은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으니 외금강에 있는 만물상 앞에는 있을 수 없다. 송필용이 ‘만물상’ 앞에 그린 토산은 단발령이 아니라 그냥 만물상 앞에 있는 이름 없는 산이다. 그의 그림에 소나무 두 그루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송필용은 정선의 구도를 받아들였지만 정선이 이룩한 준법의 세계는 구현할 수 없었다. 물과 먹이 섞여 종이나 비단 위에 펼쳐지는 동양화의 준법을 기름이 주 원료인 서양화 재료로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송필용은 재료가 봉착한 한계의 해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분청사기(粉靑沙器)의 박지(剝地)와 조화(彫花)기법의 차용이다.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15~16세기)에 잠깐 유행하다 사라지는데 회청색의 바탕흙으로 형태를 빚은 후 흰색 흙으로 겉면을 입힌 다음 상감하거나 분장한 후 유약을 발라 굽는 자기다. 그중 분장분청을 선(線)으로 긁어내면 조화분청, 면(面)으로 긁어내면 박지분청이 된다. 긁어내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원하는 문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송필용은 분청사기의 박지와 조화기법을 그림에 적용해 수직준을 부활시킴으로써 정선의 적자(嫡子)임을 선언했다. 이것은 고려 도공이 나전칠기 기법을 상감청자에 적용한 것에 비견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니 송필용의 ‘만물상’은 서양화이면서 동양화다. 서양화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의 노력 앞에서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장르 구분은 무의미하다.

송필용은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동네방네 소문 내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우리 시대의 작가다. 자기 분야에 매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그 보람 때문에 아무리 고독한 길이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다.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단발령망금강’. 36.3×35.9㎝. 견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875호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단발령망금강’. 36.3×35.9㎝. 견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875호

정란이 프로여행꾼이 되었던 이유

정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금강산을 여행하는 동안 외로워하기는커녕 자아도취에라도 빠진 듯 자신의 모습을 화가들에게 그려달라고 해서 ‘산행도’를 만들었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에는 정란이 1780년에 백두산과 금강산을 다녀온 뒤 김홍도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추억이 담겨 있다. 이런 정란을 보고 당대의 문장가인 이용휴(李用休)는 이렇게 평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빈산이다.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용휴처럼 정란을 곱게 봐주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강산 유람을 갈망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이 갈망과 의무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가차 없이 냉큼 길을 떠나는 그를 보고 부러움과 한숨이 뒤엉켰을 것이다. 욕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 아닌가. 자기만족을 위해 처자식을 버리고 유람하는 그를 보고 ‘안티’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무리와 다른 짓을 하는 놈!” 가장의 책무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정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자유롭게 노니는 것은 정신이고 사물과 접하는 것은 안목이다. 그 정신이 막히면 속이 답답하고, 안목이 협소하면 본 것이 적다. 정신과 안목 둘 다 협소하면 기상을 크게 펼치지 못한다. 늙은이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았더니 겨우 진흙구덩이의 지렁이나 새우젓 속의 등에에 불과하다.” 당당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발언이다. 등에라는 곤충이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면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꼽등이를 연상하면 된다. 등에는 꼽등이보다 조금 작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토록 소신에 찬 발언을 한 사람이 정란 이전에도 있었을까.

정란 같은 프로여행꾼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역마살 외에도 여러 가지 시대 상황이 작용했다. 정란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선비들이 금강산을 찾았다. 유학자들의 시조 격인 공자가 ‘논어’에서 ‘지자낙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을 주창한 것이 큰 동기였다. 명산에 올라 심신을 수련하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는 신념도 한 부조했다.

금강산에는 아름다운 경치 못지않게 삼국시대 이후 조성된 사찰, 누정, 마애불, 탑 등의 불교 문화유산이 축적되어 있었다. 금강산은 1606년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중국의 학자 주지번(朱之蕃)이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네’라고 읊을 정도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명산이었다.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답답한 심경을 풀고자 금강산을 찾는 선비도 있었다. 이런 시대 풍조 속에서 18세기에는 금강산 여행이라는 특별한 체험에 참가하려는 열풍이 한양 사람들 사이에서 일세를 풍미했다.

어느 경우든 금강산 여행에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서울을 출발한 여행자가 단발령을 넘고 내금강→외금강→해금강 순으로 유람하는 데는 최소한 30~40일 정도가 걸린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금강산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여정과 경유지와 숙박지 등의 여행정보를 사전에 수집하고 준비해야 한다. 여행안내서 역할을 한 앞선 여행자들의 유산기(遊山記)도 필요하다. 식량, 유산기, 책, 종이와 문방구 등을 ‘여행용 캐리어’에 집어넣었다고 해서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여행경비였다. 집 떠나면 걸음걸음마다 돈이 필요하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들의 신분과 교유관계로 엮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경유지 곳곳에 있는 지방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받거나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금강산 여행자들의 대다수가 사대부들로 한정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연, 지연, 혈연은 한 사람이 움직일 때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인프라인 셈이다.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절친이자 시인인 이병연(李秉淵)이 금강산 초입인 금화현의 현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정란이란 프로여행꾼이 탄생했다. 그러나 정란의 여정은 한때 여행 붐에 휩쓸려 다니던 사람들과는 달리 여행 자체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란은 돈도 되지 않는 여행자의 길을 신념 때문에 밀고 나간 사람의 정신 세계를 오롯이 보여주었다. 정란이야말로 조선시대의 ‘욜로(YOLO)족’이면서 최초의 프로페셔널한 전문여행가였다.

서울에서 금강산 여행을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송필용의 ‘만물상’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행이었다. 실경산수, 진경산수는 상상만으로 그릴 수 없다. 직접 봐야 한다. 이렇게 멋진 금강산이니 우리도 정란처럼 지금 당장 청노새를 타고 길을 나서보면 어떨까. 마음은 저만큼 앞서가지만 경색된 남북관계 등 현실이 받쳐주지 못한다. 다른 대안이 없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우리 강산을 그리다’라는 제목의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이 전시 중이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을 비롯해 17세기부터 19세기에 활동한 작가들의 명작이 전시되었다. 300여년 전 현장에서 스케치한 초본과 기행화첩, 두루마리(횡권), 부채, 병풍 등 그림 형식도 다채롭다. 창해일사처럼 앞뒤 안 가리고 집을 떠나는 용기도 가상하지만 전시장에서 ‘와유산수(臥遊山水)’의 풍류를 누려보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무리와 다른 짓을 하는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봉래산 일만이천봉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이 없을 듯하다. 올여름 최고의 여행상품으로 강추!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