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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70호]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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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나는 체인지메이커다]셰프가 된 변호사 이영라 어반 딜라이트 총괄셰프

▲ 요리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이영라 어반 딜라이트 총괄셰프.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7월 21일 일요일 저녁,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지하에 있는 샴페인바 ‘르 캬바레 씨떼’에 셰프 140여명이 모였다. 한식·중식·일식은 물론이고 프렌치, 이탈리안, 제과 제빵 등 장르를 총망라했다. 아르헨티나·스페인 출신의 외국인 셰프가 있는가 하면 특급호텔의 총괄셰프, 파티셰, 파인다이닝의 스태프, 오너셰프 등 국적 불문, 직위 불문, 나이 불문이었다. 군대식 위계질서와 인맥 중심의 서열 문화가 확실한 요리업계에서 계급장 떼고 장르 무시하고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더 기가 막히다. “우리도 한번 놀아보자”는 구호에 이끌려서다.
   
   셰프들을 주방 밖으로 끌어낸 이날의 호스트는 ‘마담 리’, 이영라 ‘어반 딜라이트’ 총괄셰프였다. ‘우리도 좀 놀자! 요리사의 밤’이라는 제목 아래 ‘일만 하지 말고 남들 잘 먹일 궁리만 하지 말고 우리도 하루 맘 편히 앉.아.서. 먹고 놀아보아요’라고 적힌 ‘마담 리’의 달콤한 초대장이 돌고 돌아 장안의 셰프들을 불러모은 것이었다. 이날 파티의 규칙은 ‘누구도 요리를 하지 말 것’. 대신 배달 치킨 40마리, 배달 피자 20판, 골뱅이 20통이 테이블에 깔렸다. 이영라 셰프에게 옆구리 찔린 박형진 어반 딜라이트 대표가 한 턱 쏜 것이다. 이날 밤 셰프들은 광란의 밤을 보냈다. 한쪽에선 춤판을 벌이고 한쪽에선 모여 앉아 방언 터진 것처럼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최근 주방 이슈인 최저임금 문제, 스태프 구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에 폭풍 공감을 쏟아내고 구하기 힘든 식재료 정보를 교환하느라 바빴다. 주방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 소통의 자리는 그만큼 절실했다. “한 번 더 하자” “분기별로 모이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요리업계에 전례 없던 판을 벌인 이영라(40) 셰프는 이력이 독특하다. 더구나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는 주방에서 여성이 총괄셰프를 맡은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서도 찾기 드물다. 어반 딜라이트는 국내 최초의 호텔 루프톱·스카이바 개발 및 운영 전문회사이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머큐어 앰배서더 강남 쏘도베의 스카이라운지 ‘클라우드’를 시작으로 국내 호텔업계에 ‘루프톱’ 바람을 일으켰다. L7명동의 ‘루프톱 플로팅’, 롯데월드타워 내 호텔 시그니엘 서울 81층에 있는 ‘Bar 81’, 강남 을지병원 사거리에 있는 청담 에이든 호텔 18층의 샴페인라운지 ‘르 캬바레 도산’이 이들의 작품이다.
   
   최근에는 꼭대기층에서 내려와 호텔 로비에도 진출했다.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 있는 ‘르 캬바레 씨떼’다. 이영라 셰프는 이 다섯 곳을 전부 책임지는 총괄셰프이다. 주방 인력, 관리는 물론이고 다섯 곳의 모든 메뉴는 그의 손끝에서 나온다. 다섯 개 업장을 돌며 관리하는 것만도 벅찬 일인데 그는 직접 주방에 들어가 칼을 잡는다. 최근 오픈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르 캬바레 씨떼’에서 지난 7월 26일 그를 만났다.
   
   
   셰프가 된 변호사? 난 그냥 요리사!
   
   그는 요리사 경력이 짧다. 30대에 요리를 시작해 10년이 안 됐다. 유명 셰프 밑으로 줄서기 바쁜 요리업계에서 보면 그는 ‘듣보잡’ 이단아이다. 여성 셰프가 경력을 이어가기도 힘든 거친 주방에서 우먼파워를 보여주며 요리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전력을 들으면 더욱 그가 궁금해진다. 그는 미국 변호사 출신이다. 그가 가장 밝히기 싫어하는 이력이다.
   
   “요리사가 되고 똑같은 질문을 1만번은 들었을 겁니다.” ‘왜 변호사를 그만두고 요리사가 됐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할 때는 ‘도대체’ ‘왜’라는 수식어가 꼭 붙어요. 거기에는 이미 변호사는 좋은 직업, 요리사는 나쁜 직업이라는 편견이 들어있습니다. 어제도 지인 부탁으로 중학교 1학년 아이들 몇 명이 직업 탐방차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해요. 도대체 누가 이 아이들에게 좋은 직업, 나쁜 직업을 알려줬을까요? 그런데 변호사는 정말 좋은 직업인가요?”
   
   그가 반문했다. 그는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헌법학자가 되고 싶어 대학원을 진학해 석사까지 마쳤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 공부는 연구가 아니라 시험용이었다. 더 이상 법 공부를 할 의미를 못 찾았다. 미국계 IT 회사 법무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변호사를 보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법 마인드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미국 로스쿨에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람이 됐다”는 말을 듣고 미국의 로스쿨이 너무 궁금해졌다. 그때부터 사이드잡까지 하면서 돈을 모으고 준비를 한 끝에 미국 LA에 있는 USC(남가주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다. 법학 석사에 근무 경력까지 인정받아 1년만 다니면 시험을 볼 수 있는 LLM(법학 석사)과정이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수업 따라가느라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겨우 학비만 마련해 가는 바람에 생활비는 항상 쪼들렸다. 당시 미국 금융위기 사태로 달러 환율이 치솟았다. 외식은 엄두도 못 냈다. 다행히 LA엔 값싼 식재료가 풍부했다. 숨은 요리 본능이 폭발했다. 공부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마켓으로 달려갔다. 색색의 채소, 과일만 봐도 행복해졌다. 중·고등학교 때도 공부하다 힘들면 요리 책을 보고 직접 요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던 기억이 났다. 마음 한편에는 늘 요리사의 꿈이 있었다. 집을 떠나 공부를 하면서 그 오랜 꿈을 확인했다. 변호사 자격증을 손에 들고 “요리사가 되자”고 결심했다. “서른 살까지는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가장 행복한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 서울 캠퍼스에 들어갔다. 1년짜리 요리 과정이었다. “정말 신났어요. 얼마나 재미있던지…. 프랑스 셰프들 설명 들으려고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양송이 깎는 연습하느라 양송이 5㎏을 깎은 적도 있어요. 덕분에 그 주 내내 양송이 수프만 먹었죠.”
   
   그의 열정은 금방 눈에 띄었다. 교수였던 로랑 벨트와즈 셰프가 프렌치 레스토랑 총괄셰프로 가면서 그를 데려갔다. 보통 주방 막내는 20대 초반이니 그를 받아줄 곳은 사실 없었다. 32살에 주방 막내로 들어가 현장을 경험하고 서울 부암동에서 프렌치 레스토랑 ‘프렙’을 차려 4년간 운영하다 박형진 대표의 러브콜을 받고 어반 딜라이트에 합류했다.
   
   
▲ 이영라 셰프가 만든 된장버터 시래기 우니 파스타(왼쪽). 오리백숙을 프렌치 스타일로 변형한 오리콩피와 현미죽(오른쪽).

   요리사는 가장 행복한 직업
   
   그는 요리사의 길을 걸으면서 ‘변호사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 갱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는 변호사도 아니다”고 말했다. “나는 한 발을 걸쳐 놓는 사람이 아니다. 올인한다”고 했다. ‘셰프가 된 변호사’의 스토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이다. 방송에서 출연 제의가 많았지만 셰프 이전에 변호사를 먼저 부각시키려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거절했다.
   
   “선입견 없이 요리로만 평가받고 싶어요. 저는 ‘사’ 자 들어가는 직업 중 요리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억울하고 안 좋은 일을 겪은 사람들만 만나지만 요리사는 데이트하는 사람, 멋져 보이고 특별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얼마나 행복한 직업이에요? 법 공부 할 때 알던 사람들이 제 표정이 달라졌다고 해요. 미쉐린? 스타 셰프?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해요. 오늘 어떤 손님을 만날까? 어떤 요리를 할까? 그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요. 사실 돈을 생각하면 못 하죠. 27살 때 받던 초봉보다 못 받지만 행복은 만 배 이상? 이것만으로도 성공한 삶이죠.”
   
   주방의 삶은 위험하고 치열하다. 방송에 비친 스타 셰프들만 보고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많지만 하루 12시간씩 서 있는 것은 보통이다. 남들 쉴 때 가장 바쁘다. 한순간의 실수도 사고로 이어진다. 큰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미세먼지도 치명적이다. “요리를 한 후 기관지 쪽이 계속 안 좋다”고 했다. 여성 셰프들이 결혼하고 임신을 하면 주방을 나와 쿠킹클래스 등으로 빠지는 이유이다.
   
   “어려운 법 공부 했는데 일하다 정 하고 싶으면 레스토랑 하나 차리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필드에서 승부를 걸고 싶었어요. 이왕이면 조기축구가 아니라 월드컵에서 뛰어야죠.”
   
   그는 전쟁 같은 주방이 가장 좋다. 박형진 어반 딜라이트 대표로부터 총괄셰프 제안을 받고서 오래 고민했다. 현장보다 관리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박 대표에게 “주방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결심을 했다. 프렙을 접고 어반 딜라이트로 옮기기 전 그는 주방의 바닥을 더 경험하고 싶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두 달간 주방 막내로 일했다. “새벽부터 양파 까고 재료 다듬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그때의 경험은 갈라지고 시커멓게 때 낀 손톱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요리는 업계에서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료를 쓰는 데 겁이 없고 경계가 없다. 프랑스 요리의 문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감자 가니시(곁들임용)에 비름나물을 넣고, 파스타에 시래기를 넣고, 고사리, 죽순 등 한식 재료도 팍팍 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머릿속은 메뉴 개발로 바쁘다. “하고 싶은 요리가 너무 많다”고 했다. 원하는 식재료가 있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이것도 프랑스 음식이야?” 묻는 이들이 많다. “모던이야? 클래식이야? 자꾸 소속을 얘기하라고 하는데 저는 무소속 중 무소속이에요. 사람들에게 ‘이건 이영라 음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요리사들이 전문직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방의 현실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열악하다. ‘최저임금, 52시간 근무’ 시행으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도제식 교육을 핑계로 ‘열정 페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환풍시설도, 휴게공간도 제대로 된 곳이 많지 않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도 서비스를 받아본 경험도 없이 어떻게 서비스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셰프들은 그런 경험을 할 시간도, 돈도 없습니다.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고객에게 접대를 할 수 있죠.”
   
   그의 생각은 어반 딜라이트의 모든 업장에 적용되고 있다. 인력 이동이 잦아 주방마다 사람 구하기 힘들다는 판에 그의 주방에선 한번 들어오면 나가는 사람이 없다. 업계에도 소문이 났다. 얼마 전 모교인 ‘르 꼬르동 블루’에 강연하러 갔는데 학생들이 “요리업계의 애플, 삼성이라고들 한다. 선배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력서를 내밀더란다. 이날 받은 이력서는 30여장에 달했다.
   
   성격이 다른 다섯 개 업장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은 하루 16시간씩 강행군이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관찰력”이라고 했다. 관찰은 관심과 애정을 전제로 한다. 셰프들에게 ‘꿈의 주방’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목표이다. “법 공부에 쏟은 매몰 비용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그는 그 실력을 십분 발휘해 셰프들의 ‘법률 상담소’ 역할도 하고 있다. 텃세 심한 요리업계에서 그 덕을 보고 있다.
   
   
▲ (시계방향으로) 지난 7월 21일 밤, 이영라 셰프의 도발로 만들어진 ‘요리사의 밤’에 140여명의 셰프들이 모여 광란의 밤을 보냈다. 2년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주방에 막내로 들어가 고생한 시간을 보여주는 이영라 셰프의 손. 이영라 셰프는 서울 금천구 교육복지센터에서 2년째 매달 한 번씩 청소년들과 요리로 놀고 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의 힘
   
   삶도 요리도 나답게! 그를 자존감 높고 주체적으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밥심’이다. “나의 자양분은 부모님의 따뜻한 밥상”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집은 서울 송파구 가락동농수산물시장 앞에 있었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시장에 가서 가장 신선하고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와서 세 딸을 위해 아침부터 지지고 볶고 온 집안을 음식 냄새로 채웠다. 저녁에는 다섯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항상 식사를 함께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특별하다.
   
   “주말이면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해주셨어요. 민물새우를 넣고 끓인 무조림, 애호박을 넣고 끓인 조기 찌개가 단골 메뉴였어요. 맛있게 먹으면 ‘역시 우리 영라는 맛을 알아!’ 칭찬을 해주셨죠. 저에게 음식은 행복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경험한 ‘행복한 요리의 기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2년여 전 뜻이 맞는 요리사들과 함께 한 소년원을 접촉했다. 정성을 담은 밥상을 대접하고 싶어서였다. 밥의 온기가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소년원의 벽은 너무 높았다. 불도 칼도 반입 불허였다. 밥차를 끌고 가는 것도 고민했지만 식판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도시락 200인분을 들고 가서 건네만 주고 왔다. 눈 맞추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기엔 허가 절차가 너무나 복잡했다.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 서울시 금천구 교육복지센터다. 교육 복지 대상 청소년들 중 요리에 관심이 있는 중·고등학생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요리 수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 1기를 거쳐 올해 2기 12명으로 2년째다. 아무리 바빠도 이날만큼은 만사 제쳐놓고 달려간다. 음식탐험가 장민영 작가와 둘이 시작해 서포터들이 늘고 있다. 다른 셰프를 초청해 다양한 요리 실습을 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가서 식사 예절을 경험하게 해주고, 음식 싸들고 소풍도 간다. 가족의 빈자리가 큰 아이들의 기억에 즐거움을 채워주고 싶어서다. 눈도 못 마주치고 주눅 들어 있던 아이들이 몇 달 지나면 표정이 달라진다. ‘식탁에서의 즐거움을 처음 알았다’는 편지를 건네고 슬쩍 다가와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음식이 주는 위로는 어마어마해요. 따뜻한 밥 한 끼를 한 번이라도 먹은 사람은 절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공기에 찌개 하나로도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족 간 밥상머리 대화가 사라진 것이 요즘 사회가 폭력적으로 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환경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위로를 해주고 싶어요.”
   
   그가 요리사가 된 이유이다. 그는 자신이 뭘 할 때 행복한지를 깨달은 덕분에 누구보다 부자가 됐다고 했다. “조리복만 있으면 되고 산해진미가 주방에 다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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