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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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자가 오랜만에 한국에서 나왔다. 김종기 ‘푸른나무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 명예이사장이 2019 막사이사이상 수상 소식을 알렸다. 2007년 김선태 목사 이후 12년 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16번째 수상이다. 그동안 수상 소식이 뜸한 것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한국인들 로비가 심해서 아예 한국인은 배제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막사이사이상은 필리핀의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록펠러재단이 기금을 출연해 지난 1957년 만들었다.

오는 9월 4일 필리핀에서 열리는 시상식 참석을 앞두고 김종기 명예이사장을 서울 서초구에 있는 푸른나무 청예단(이하 청예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명예이사장은 24년여 전 우리 사회의 금기어였던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끌어낸 인물이다. 1995년 청예단을 설립해 학교폭력과 끝나지 않은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사회혁신가들을 지원하는 아쇼카재단의 시니어 펠로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국가 학교폭력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청예단에 들어서면 청예단의 상징인 푸른 나무를 대신해 인조목 한 그루가 천장까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가지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걸어놓은 나무 패널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패널에는 학교폭력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염원들이 적혀 있었다. ‘희망은 도움에서 시작됩니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라고 적힌 패널도 눈에 띄었다.

김 명예이사장은 막사이사이상 수상은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고 한다. 누가 추천을 했는지, 어떤 경로인지도 모른다. “지난 7월 3일 국제전화가 걸려오기에 스팸전화인가 의심하면서 받았는데 뜻밖에도 수상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한 가지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해요. 4월쯤 필리핀 교수 2명이 연구차 왔다면서 이곳을 방문했어요. 힘든 일은 뭔지, 학교폭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청예단에 대해 자세히 묻고 돌아갔는데 아마도 암행 조사를 나온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학교폭력이 앗아간 아들

수상 소식을 받은 다음 날은 김 명예이사장의 생일이었다. 생애 가장 큰 생일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생일 아침 그는 혼자서 집 근처에 있는 산에 올랐다. 펄쩍 뛰어오를 만큼 기쁜 일이었지만 마음 한편은 쓰리고 아팠다.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가슴에 묻은 아들 대현이 생각이 더 간절했다. 특히 청예단은 대현이로 인해 시작된 일이었다. 대현이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1995년 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대현이는 학교 선배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 일 이후 김 명예이사장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청예단을 만들고, 24년 동안 학교폭력과 외롭고 힘든 싸움을 이어왔다. “대현이가 ‘아빠, 수고했어요’ 하면서 위로로 주는 상 같았어요. 대현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요.”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참았던 눈물을 산에 쏟아놓고 내려왔다. 그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1995년으로 돌아가보자. 청예단의 시작과 학교폭력 관련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김 명예이사장은 당시 삼성전자 홍콩 법인장을 거쳐 신원그룹 전무로 옮겨 기조실장을 맡고 있었다. 대북사업 등 그룹이 한창 확장하던 시기였고 회사의 주요한 결정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해외출장도 잦았고 분초를 다퉈 일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집안은 ‘내조 10단’인 부인이 잘 건사했다. 딸과 아들, 두 아이는 잘 자랐다. 삼성전자 홍콩 법인장 시절, 홍콩에서 학교를 다니던 두 아이는 교민신문을 장식할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나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대현이는 팬클럽이 있을 만큼 잘생겼고 인기도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에 돌아온 대현이는 학교에 잘 적응했다. 친구도 많았고 인기도 여전했다. 여학생들의 고백편지도 심심찮게 받는 눈치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눈부시게 밝던 대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옷이 흙투성이가 돼서 들어오는가 하면 몸에 상처가 나 있기도 했다. 물어보면 집에 오는 길에 불량배를 만났다고 했다. 1995년 6월 6일, 그가 해외출장을 떠나는 날도 대현이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너무 바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거니 넘겼다.

2박3일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새벽, 그는 웬일로 눈이 일찍 떠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대현이의 중학교 친구들이 몰려왔다. 아이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땐 흘려들었다. 화장을 해서 동해바다의 시퍼런 바다에 뿌리고 돌아왔다.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었다. 부인과 딸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업무는 다시 그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한 가지 숙제가 그를 붙들었다. “아들이 왜 자살했을까.” 그 의문을 풀어가다 학교폭력과 마주쳤다.

대현이는 학교 일진 5명에게 심한 폭력을 당해왔다. 무리 중 한 명의 여자친구가 대현이를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그 새벽, 5층 아파트 난간에 섰을 대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졌다. 대현이는 처음엔 자동차 위로 떨어졌다. 상처 입은 몸을 끌고 대현이는 다시 올라가 두 번째 몸을 던졌다. 아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찢어졌다. 출장가기 전 아들을 붙들고 “무슨 일 있냐” 말을 걸었다면 달라졌을까,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 더 자상했다면, 후회가 가슴을 쳤다.

가해자 5명을 만나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반성문만을 받았다. 고소를 하고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대현이의 죽음을 되새겨야 하는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가해학생들이 대현이 친구 두 명에게 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그가 나서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지만 피해자 부모들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보복도 무섭고 아이들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학교는 사건을 덮기 바빴다. 이번에도 가해학생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학교폭력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각종 사회단체, 봉사기구들을 찾아다녔지만 어느 곳도 도움을 주는 곳은 없었다. 기부 얘기만 꺼내는 곳도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현이의 진실을 밝혔다. 아들이 숨진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사건 당시 학교는 대현이의 죽음을 성적 비관으로 몰았다. 기자회견 다음 날 한 일간지에 ‘어느 날, 한 소년이 몸을 던졌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학교폭력에 앗긴 푸른 삶, 누가 그를 자살로 이끌었나’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 다음날부터 공중파 방송들은 특집으로 학교폭력을 다뤘다. 일간지들은 앞다퉈 그를 인터뷰하고 학교폭력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국회도 나섰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학교폭력 근절’을 지시했다. 침묵 속에 은폐돼 있던 ‘학교폭력’이 처음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이다. 정부 부처 협의체를 만들고 학교 경찰관 제도 등 후속조치들이 요란했다. 피해사례 접수처에는 신고가 잇따랐다. 그를 중심으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회사 옆 건물에 자비로 66㎡(20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전국 각지에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다. 삼성과 신원그룹 선후배들도 물심양면 힘을 보탰다.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했다. 사무국장을 비롯해 정식 직원 다섯 명을 뽑았다. 성공이 보장된 회사도 그만뒀다. 둘 다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라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청예단, 즉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출발이었다.

김종기 청예단 명예이사장의 아들 고 김대현 군. 아들의 이름을 딴 ‘대현장학회’를 만들었다(왼쪽). 청예단의 학교폭력예방 거리 캠페인. ⓒphoto 청예단
김종기 청예단 명예이사장의 아들 고 김대현 군. 아들의 이름을 딴 ‘대현장학회’를 만들었다(왼쪽). 청예단의 학교폭력예방 거리 캠페인. ⓒphoto 청예단

학교폭력예방재단?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재단 이름에는 숨은 사연이 있다. 임의단체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학교폭력예방재단’으로 이름을 정하고 출범식 행사를 준비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서울시에서 설립인가를 자꾸 미룬 것이다. 출범식 초대장까지 전부 보낸 상태였다.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유는 서울시교육청의 반대였다.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학교 이미지를 안 좋게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학교폭력 근절을 외쳤지만 현장의 인식은 한참 뒤처져 있었다. 인가를 받기 위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학교폭력예방재단 대신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이름이 된 배경이다. 김 명예이사장은 “청예단이라고 하면 연예인 단체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름 바꾸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공식 인정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9년이 걸렸다. 청예단이 길거리로 나가 1년6개월에 걸쳐 47만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청원을 한 결과였다. 2004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폭예방법)’이 제정되고 나서야 모든 공문, 보도자료에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공식화됐다. “정치인들이 서로 나서 자신들 공으로 돌렸지만 학폭법은 의원 입법이 아니라 시민 입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학교폭력이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대상이 되는 등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학교폭력의 숫자는 많이 줄었다. 청예단은 2001년부터 매년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 연구를 했다. 2018년에도 초등학교 2학년~고등학교 2학년까지 5890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학교폭력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는 응답은 2006년 17.3%에서 2018년 6.6%로 줄었지만 최근 다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학교폭력 양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물리적 폭력은 법·제도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 많이 줄었지만 사이버폭력과 성폭력이 늘고 방법도 교묘해졌습니다. 특히 학교폭력을 경험하는 나이도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다. 2018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초 피해 시기로 ‘초등학생 때’라는 응답이 70%가 넘습니다. 최근에는 유치원생들도 따돌림 등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김 명예이사장의 말이다.

청예단은 현재 전국 14개 지부 및 청소년 시설 10개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도 350여명에 이른다. 학교폭력 피해학생과 가족을 위한 전문 상담, 학교폭력 갈등과 분쟁 조정, 비폭력 캠페인, 피해학생 장학금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 지위도 얻었다. 청예단 사무실에는 지금도 학교폭력 피해 관련 상담전화가 하루 50~60통이 걸려온다. 자원봉사자를 비롯해 전문상담사들이 이를 맡고 있다. 청예단 출발 때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전화상담을 맡고 있는 봉사자도 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김 명예이사장은 청예단을 키우는 동안 우리 사회의 거대한 벽에 숱하게 부딪혔다. 학교폭력의 현장인 학교는 정작 학교폭력을 부인했고, 관리 감독해야 할 기관은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직원들의 월급날이었다. 지인들, 기업 쫓아다니며 후원 부탁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는 친구도 많이 잃었다고 했다. “재단 후원이라기보다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 전화를 받기 무섭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고 청예단 이름을 팔아 자기 잇속 챙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 기적 같은 도움도 많았다. 힘내라고 떡 싸들고 오는 사람, 말 없이 봉투만 건네고 가는 사람들이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보태는 후원자는 현재 1580명이다. 1000~1만원 후원자가 60%이고 이들이 내는 돈이 연 5억원 정도다. 연간 운영에 필요한 돈(74억원)의 5%에도 미치지 못한 수치다. “정부 지원금 없이 운영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3분의 2는 저희가 교육, 프로젝트 등을 통해 벌고 나머지 3분의 1은 후원으로 채워지면 좋은데 한참 부족합니다. 우리나라 후원 문화는 빈익빈 부익부입니다. 큰 단체는 광고도 하고 많이 알려져 있으니 후원이 몰리는데 우리 같은 단체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와는 달리 청예단은 피해학생 사진을 쓸 수도 없으니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아 광고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면서 아쉬워했다. 청예단 홍보대사로는 가수 윤도현, 성시경, 배우 추자연 등이 나서주고 있다. 특히 성시경은 아들 대현이의 어린 시절 단짝이다. 김 명예이사장은 대현이를 보내고 여러 명의 아들을 얻었다. 성시경을 비롯해 대현이의 친구들이다. 명절이나 대현이 생일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자신의 환갑 땐 돈을 모아 선물도 했다. 그들이 오면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은 아렸다. 대현이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그 아들들이 이제 40대, 청예단의 후원자가 돼주고 있다. “요즘엔 자식들을 키우느라 바빠서 그런지 뜸하다”고 했다.

막사이사이상 수상을 계기로 청예단은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흑역사가 숨어 있는 ‘청예단’ 이름도 바꿀 계획이다. 군인,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학교폭력 예방교육도 국민 인성교육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이다. ‘help hope, 나는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비폭력 문화운동을 통해 국민 서명운동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학교폭력은 부모들의 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 청예단에서 화해·분쟁 조정과 긴급 출동한 횟수는 지난해만 9437건에 달했다. 이를 위한 전문가를 키우는 일도 주요 과제이다. 피해학생 보호 중심에서 가해학생 규제로 가고 있는 독일, 일본처럼 가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도 앞으로 필요하다.

그는 청예단을 아들의 분신으로 생각했다. 아들 옆에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을 청예단에 쏟았다. 분노와 화로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사회를 변화시키고 정부를 움직였다.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그의 휴대폰으로 지인의 문자가 한 통 왔다. ‘고3 아들이 집단 왕따를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청예단의 상담전화 번호는 1588-9128(구원의팔)이다. 상담은 물론 절박한 상황인 경우 달려가 구원의 팔을 내밀 준비가 돼 있다. ‘No silence, No violence!’ 그는 침묵을 깨야 폭력도 없다고 말했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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