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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75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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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마르크스 생가에 마오쩌둥은 있지만 레닌은 없다

▲ 카를 마르크스가 본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 성장기를 보낸 독일의 고도 트리어.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이다.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지금 유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그 스스로 유령처럼 배회하다 불쑥 나타난 것일까. 마르크스와 재회한 곳은 독일의 오래된 도시 트리어(Trier)였다.
   
   최근 룩셈부르크에서 독일로 넘어가던 중 커피 한잔 할 겸 잠시 들렀던 도시가 트리어다. 룩셈부르크에서 동쪽으로 약 70㎞ 떨어진, 독일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다. 그런데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관광버스들이 수염을 기른 특유의 마르크스 얼굴로 도배돼 있다시피 했다. 현지 관광안내 책자를 펼쳐 들자 역시 온통 마르크스 얘기다. 알고 보니 트리어는 마르크스의 출생지인 동시에 그가 독일 본(Bonn)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성장한 도시다. 독일인, 아니 유럽인에게 ‘트리어=카를 마르크스’로 통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마르크스를 파는 고도 트리어
   
   ‘마르크스의 도시’에 들어온 이상 독일 퀼른(Koln)에서 지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한 세대 전 대학 때 기억이지만 마르크스는 ‘예수나 부처’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역사적 인물로 통했다. 20살, ‘경제학 원론’도 읽기 전 ‘감히’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Das Kapital)’ 원서에 손을 댔다. 고등학생 정도의 독일어 실력으로 덤볐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99%의 내용은 무슨 말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독일어 사전과 씨름을 하며 열심히 시작했지만 수십 쪽을 겨우 읽는 데 그쳤다. 왜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 그토록 마르크스 책에 매달렸을까. 웃기는 얘기겠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관심보다 이른바 ‘빨간책’으로 불리던 금서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 듯하다. 전두환 정권 시대, 금서 제1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라는 인물 역시 ‘위험한 인물’로 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얘기지만 마르크스 사진을 벽에 걸어둘 경우 1년6개월 실형도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그런 마르크스를 우연히, 낯선 이국 도시에서 다시 접하게 된 것이다.
   
   곧바로 마르크스가 태어난 생가로 달려갔다. 트리어 남서쪽 브뤼켄슈트라세(Brückenstraße)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로 지금은 ‘마르크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권위나 위용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바로 옆 4층 건물에 눌려 움푹 들어간 모양새다. 박물관 왼쪽 건물 1층은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단 잡화점, 오른쪽 건물 1층은 피자 판매점이 들어서 있다.
   
   독일풍의 소박한 구조와 장식이 박물관에 대한 첫인상이다. 마르크스 가족은 이 건물 1층 방 2개와 2층 방 1개에 세들어 살았다고 한다. 방이 전부 10개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3~4가구가 함께 거주했던 집이었을 듯하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류 계급 정도가 살던 집이다. 이 건물은 1928년 이후 지금까지 마르크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자 제1호 공산주의자다. 히틀러 나치 정권과 상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박물관 건물이 인쇄공장으로 쓰였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이 건물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형이 일찍 죽으면서 장남이 된다. 출생일은 공교롭게도 한국의 어린이날과 겹친다. 필자에게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서거일과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뜬 것은 1821년 5월 5일, 52세 때다. 전혀 다른 시대의 인물로 느껴지지만, 두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서 3년간 함께 숨을 쉰, 서로 연결되는 세대다. 나폴레옹이 왕과 성직자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고, 마르크스는 산업자본가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평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마르크스가 세계를 활동영역으로 삼았다는 점도 다르다.
   
   생가 1층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 벽에 그려진 그림 하나가 눈에 띈다. 눈에 익숙한 20세기 혁명가들의 얼굴이 벽에 그려져 있다.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찌민, 마오쩌둥이 그려져 있다. 필자가 기억하는 기존의 마르크스 추종자들과는 조금 다르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아버지 레닌이 빠진 대신 체 게바라와 호찌민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 직원에게 레닌이 왜 빠졌는지 물어봤다. “레닌은 러시아인조차도 싫어한다. 예전에 반드시 등장하던 스탈린, 엥겔스도 이미 한 세대 전에 사라졌다. 마오쩌둥은 아직 자리를 지키는 마르크스 사상의 제1 계승자다.”
   
   
▲ 마르크스가 2살 때 옮겨간 집 1층에 자리 잡은 1유로숍(왼쪽)과 내부의 기념품들.

   “북한 관광객 많아지면 김정은 얼굴 그릴 수도”
   
   다른 혁명가들도 많은데 왜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찌민이 등장했는지 다시 물어봤다. “최근의 상황이지만, 쿠바를 비롯한 남미인들의 방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베트남인도 엄청 몰려온다. 독일인이 가장 많이 찾지만, 남미와 아시아인 방문객이 절반 정도다. 의외로 레닌과 스탈린을 배출해낸 러시아인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수요공급원칙에 따라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찌민, 마오쩌둥을 ‘혁명 스타’로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중에 북한 사람들이 많이 들른다면 김정은 얼굴이 그려질 수도 있다.”
   
   박물관은 생가라고는 하지만 마르크스 생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물건들은 별로 없다. 마르크스가 평생 사용했다는 회중시계와 마르크스 가족용 의자만 눈에 들어올 뿐, 텅 빈 공간을 지키는 종이자료나 사진이 전부다. 마르크스 가족이 실제 사용한 방이 3개라고 하지만 건물 전체가 수많은 전시물로 덮여 있다. 마르크스의 런던 망명 당시의 상황, 엥겔스와 함께 발표한 ‘공산당선언’, 저서 ‘자본론’과 공산주의 체제에 관한 스토리와 배경 설명이 박물관 콘텐츠의 대부분이다. 마르크스 개인사와 당시의 시대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공간이 될 듯하다.
   
   
▲ 트리어의 마르크스 생가(위쪽)와 생가 1층 벽을 장식한 벽화.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찌민, 마오쩌둥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다.

   1유로숍이 들어선 제2의 집
   
   전시물 중 필자가 주목한 것은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 인생 전체를 통틀어 혁명사상가 남편을 지지하고 사랑한 ‘아내의 내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마르크스가 예니와 결혼한 것은 1843년, 25살 때다. 예니는 마르크스보다 4살 위다. 연상의 여인인 셈이다. 대학에 들어간 지 1년 만인 1836년 18살 때 혼약하고 7년 뒤 결혼했다. 예니는 어릴 때부터 알았던 친구이기도 하다. 귀족 출신 명문가의 딸이다. 유대인인 마르크스는 변호사 출신 아버지가 이렇다 할 배경의 전부다. 마르크스 집안의 뿌리는 유대인 랍비에서 시작한다.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가족 모두가 개종한 것은 아버지 때부터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 프로이센 체제에 맞춰 살아가는 과정에서 유대교와 멀어졌다. 유대교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히틀러 나치 이전부터 있었던 유럽의 일상적 풍경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유대교와 무관한 개신교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런저런 배경과 상황을 비교해보면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딸 셋을 키우며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마르크스는 일기 곳곳에 예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기술하고 있다. “나를 위한 예니의 고통스러운 (가족의 반대와 주변의 편견에 맞선) 싸움으로 인해 (그녀의) 건강마저 심하게 악화됐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뒤흔든 혁명가 이전에 고독한 인간이자 착한 남편이었다. 돈과 무관한 생활이었기에 예니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은 적도 많다. 다른 모든 위인에게서 보듯, 아내의 사랑과 헌신이 없었다면 마르크스라는 인물도 없었을 듯하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박물관 직원이 “중국인 관광객과 달리 관람을 오래한다”며 말을 걸어왔다. 관광버스로 한꺼번에 몰려와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5분 만에 떠나는 것이 중국인 관광객들이라고 한다. 특히 독일 정부가 주선하는 박물관 공식 방문 대상자의 대부분은 중국 정부의 고위직들이라고 한다. 박물관 직원이 느닷없이 “중국인이 방문객의 30% 정도지만, 마르크스 생가에 관한 중국인의 영향은 100%에 가깝다”고 불쑥 얘기했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봤지만 “제2의 마르크스 생가에 가보면 알 것”이란 대답만이 돌아왔다.
   
   마르크스 박물관은 마르크스가 생후 1년간만 살았던 집이다. 마르크스가 2살 되던 때 그의 아버지는 트리어 중심가 시메온가세(Simeongasse)의 집으로 옮겨갔다. 작지만 마르크스 가족이 처음으로 소유한 집으로, 마르크스가 대학에 진학한 1935년까지 이곳에서 산다. 마르크스 박물관보다 한층 더 의미를 갖는 곳이지만 의외로 기념 동판만 달랑 들어서 있다. 마르크스 신자들이 보면 화를 낼 법도 하다. 기념관이 아니라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안에 들어가 살펴볼 수도 없다. 박물관 직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스쳐 지나갈 만한 허름한 곳이다.
   
   설상가상으로 시메온가세 집 1층은 1유로짜리 상품으로 채워진 유로숍(Euro Shop)이다. 박물관 직원이 말한 ‘중국인 영향 100%’란 의미가 뭔지 알아차렸다. 1유로 상품의 대부분은 ‘메이드 인 차이나’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인구 10만명의 도시 트리어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붐비는 곳이 중국제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유로숍일 듯하다. 마르크스 생가는 몰라도 유로숍은 트리어 시민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성장기를 보낸 유로숍 집은 트리어의 최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고도 트리어는 고대 로마 이후 발전한 독일 문명 문화의 초석 같은 곳이다. 그 증거는 트리어의 상징인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에 있다. 검은 문이란 의미로, 서기 2세기 로마시대 때 완공된 높이 30m의 3층 초대형 출입구다. 원래 고대도시 트리어를 지키던 4개의 문 가운데 하나였는데 나머지 3개는 사라진 상태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고대 건축물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를 키운 포르타 니그라 대광장
   
   마르크스 유로숍 집 바로 오른쪽에 들어서 있는 포르타 니그라는 축구장 5개 크기의 대광장을 호위하고 있다. 고대 로마 이후 지금까지 트리어의 비즈니스는 물론 정치활동의 중심지가 포르타 니그라 대광장이다. 유년기, 청소년기의 마르크스는 그 같은 ‘광장 비즈니스와 정치’를 피부로 느꼈을 듯하다. 마르크스가 성장기를 보낸 집을 보면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마르코 폴로 생가가 떠오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중심은 리알토(Rialto)다리다. 베네치아는 공화정 이념에 충실한 곳이지만 섬이기 때문에 탁 트인 초대형 광장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의 물건들이 리알토다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베네치아 번영과 영광의 상징이자 증거가 리알토다리다. 마르코 폴로 집은 리알토다리에서 불과 1분 거리에 있다. 15살 나이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마르코 폴로 세계관의 출발점이 바로 리알토다리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콜럼버스가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동방견문록의 출발점이 바로 리알토다리다. 비약이 심할지 모르겠지만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자본론’의 출발점이 바로 포르타 니그라 대광장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요즘 미국에서 또다시 사회주의 붐이 일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공유경제도 크게 보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추종 여부는 모르겠지만,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니 샌더스는 민주사회주의의 심벌로 추앙받고 있다. 마르크스 생가 벽화를 채우고 있는 남미 아시아인 계승자들이 구미권 사회주의 지도자로 대체될 날도 멀지 않았을까. 인간의 이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 사상은 인류의 관심을 끄는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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