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호. ‘어락도(魚樂圖)’. 화선지에 채색. 3600×1920㎝. 2010
김무호. ‘어락도(魚樂圖)’. 화선지에 채색. 3600×1920㎝. 2010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 위의 다리(濠梁)에서 노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란 거요.”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시오?” 혜자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아니니 물론 그대를 알지 못하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오.” 그러자 장자가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말해 봅시다. 그대는 ‘어찌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라고 했지만, 이미 그것은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내게 물은 거요. (그대는 내가 아니면서도 나에 대해 그렇듯 알고 있지 않소!) 나는 호숫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단 말이오.”

‘호량의 대화’라는 이 이야기는 ‘장자(莊子)’ 추수(秋水) 편에 나온다. 서로 대자연에 도취하여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호량의 대화’는 물고기의 즐거움, 즉 ‘어락(魚樂)’에 대한 제목으로 이후 수많은 물고기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장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주(莊周)의 저서로 BC 290년경에 만들어진 책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입 달린 사람이라면 한마디씩 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였다. 공자, 노자, 맹자, 장자, 한비자, 묵자 등 유가, 법가, 도가, 묵가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자신의 주장과 사상을 거침없이 설파하던 시대였다. 그들이 쏟아낸 ‘말말말…’ 등을 모아서 엮은 책들이 ‘논어’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등이다. 동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에 해당한다. 모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주옥 같은 내용이다.

그중 소위 ‘자’ 자가 들어간 책 중에서 예술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책은 단연 ‘장자’다. ‘장자’는 수많은 비유와 풍자를 담아 독자들로 하여금 한없이 넓은 세상을 향해 상상력을 펼치게끔 자극해준다.

우리가 흔히 쓰는 ‘대붕의 뜻을 어찌 알리오’라는 말은 대붕이 구만리 장천을 날아간다는 말에 매미와 비둘기가 비웃었다는 ‘대붕도남(大鵬圖南)’에서 파생되었다. 조련사가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길길이 날뛰었고, 조련사가 다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말을 바꾸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조삼모사(朝三暮四)’도 ‘장자’에 나온다.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위(魏)나라 혜왕(惠王) 앞에서 신의 경지에 이른 솜씨로 소 한 마리를 잡았다는 포정해우(庖丁解牛), 별일도 아닌 것으로 소동을 부리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와우각상(蝸牛角上), 견문이 좁고 세상 형편을 모르는 사람을 풍자한 우물 안 개구리의 정저지와(井底之蛙),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난 후 ‘내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었는가’라고 묻는 호접몽(胡蝶夢)도 역시 ‘장자’가 그 출처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골계미와 해학미가 가슴을 울린다.

‘장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심미의 세계가 비단 숭고미나 우아미만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준다. 정치학과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뜬금없이 ‘장자’를 얘기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한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자’의 세계는 매미나 비둘기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도 드높다.

일필휘지, 쏘가리가 튀어 오르다

김무호 작가가 2010년에 제작한 ‘어락도(魚樂圖)’를 봤을 때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작가가 제대로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무호는 3m가 넘는 화선지에 쏘가리 한 마리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렸다. 그렸다기보다는 단숨에 휘갈겼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작가는 붓을 들고 붓을 놓을 때까지 숨 한번 쉬지 않고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를 화선지에 옮겨 놓았다. 진한 먹을 붓에 적셔 화면을 쓸어내리듯 형태를 만들었고, 배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에는 비백(飛白)으로 처리해 까실까실한 붓질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먹의 무거움과 가벼움, 부드러움과 뻣뻣함의 대비로 인해 푸드득거리는 물고기의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어락도는 유어도(遊魚圖)라고도 한다. 물고기의 속성이 물속을 헤엄치면서 노는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붓질은 형상을 만드는 화가로서의 붓질이 아니라 상형문자를 쓰는 서예가로서의 붓질이다. 이런 현상은 ‘서예와 회화는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의 이론에서 비롯된다. 한문의 서체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으로 분류되는 지점도 서예가의 필력에서 결정된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을 최고로 친다. 붓질보다 뜻이 먼저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의재필선이 좋다 해도 화가가 붓을 든 이후의 길은 붓이 정한다. 화가는 그저 붓이 가는 길을 따라갈 뿐이다. 물론 화가의 흉중에 붓이 가는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화가가 붓을 이기지 못하거나 자칫 머뭇거리면 필력이고 뭐고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필력이 그림의 수준을 결정하는 알파요 오메가다. 김무호의 ‘어락도’는 작가가 의도한다 해도 두 번 다시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계산된 그림이 아니라 붓을 든 날의 흥취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무호는 서예적인 필력으로 물고기를 그린 다음 그 바탕에 회화적인 색을 입혔다.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에는 검은색 반점이 흩어져 있고 비늘 사이로 파란색 물감이 흘러내린다. 파란빛은 강물에서 갓 잡아올린 생명력의 상징이다. 물고기를 제외한 바탕에는 적색, 황색, 백색을 칠했다. 물고기의 몸에 그린 청색과 흑색을 합하면 한국미의 특징인 오방색(五方色)이다. 일체의 배경은 생략해버리고 대신 오방색으로 바탕색을 칠한 발상은 대담하면서도 참신하다. 제목은 ‘어락도’이지만 ‘장자’의 어락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존의 작품 경향에서 멀어도 한참 멀리 왔다. 작가는 관념에 얽매이는 대신 우리 시대의 어락도를 만들었을 뿐이다.

박제가(朴齊家·1750~?)가 그린 ‘어락도’는 김무호보다 200여년 전의 작품이다. 화면에는 물고기 한 쌍이 새끼들을 거느리고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왼쪽 빈 공간에는 또 다른 물고기 한 마리와 새우가 그려져 있다. 물고기는 비늘까지 꼼꼼하게 그린 반면 수초와 개구리밥 등은 연한 녹색으로 툭툭 찍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특히 물고기의 출현에 놀란 듯 도망가는 새우와, 수초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새끼 물고기의 모습은 화면에 생기를 부여한다. 화제(畵題)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나에게 묻지만 나는 호상에서 알았다(知之而問我 我知之 濠上也)’라고 적어 ‘장자’의 ‘호량의 대화’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은 실학자로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을 지낸 북학파의 거두이다. 그는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사검서(四檢書)’라고 일컬어졌다. 말하자면 그가 그림만을 전문적으로 그린 직업화가가 아니라 취미로 그린 선비화가라는 뜻이다. 정치를 하는 지식인이 이 정도 실력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정치하는 사람은 오로지 목청 높여 정치구호만 외치는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박제가의 작품은 ‘어락도’ 외에도 ‘꿩’ 그림이 현존한다.

박제가. ‘어락도’. 종이에 연한 색. 26.7×33.7㎝. 개인
박제가. ‘어락도’. 종이에 연한 색. 26.7×33.7㎝. 개인

조선시대 화가들이 쏘가리를 그린 이유

물고기를 그린 그림을 어해도(魚蟹圖)라 한다. 어해도는 ‘물고기와 게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꼭 특정한 물고기와 게만을 한정 짓는 것은 아니고 가리비, 조개 등의 어패류와 마름풀, 부들 등의 수초 등 물과 관련된 생물은 전부 포함된다. ‘어락도’ 역시 어해도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물고기 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전으로 중인층과 여항세력들이 새롭게 문화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양반 사대부 못지않은 안목과 재력으로 ‘아트 컬렉터’로 활약했는데 길상성과 장식성을 겸한 병풍을 선호했다. 그 결과 단폭으로 그려진 어해도는 물론 8폭, 10폭, 12폭 등의 어해도 병풍이 제작되었다. 이런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장한종(張漢宗)·장준량(張駿良) 부자와, 조정규(趙廷奎)와 그의 손자 조석진(趙錫晉), 지창한(池昌翰), 김인관(金仁寬), 장승업(張承業), 안중식(安中植) 등의 작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어해도를 선호했던 이유는 생물에 대한 관심과 집안을 장식할 용도 이외에 길상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어해도의 가장 길상적인 특징은 과거급제, 입신양명과 부귀영화에 대한 염원의 표현이다. 물고기 그림은 과거급제를 바라는 약리도(躍鯉圖), 학문에 정진하기를 힘쓴다는 삼여도(三餘圖), 해마다 풍족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연화유어도(蓮花遊魚圖), 쏘가리를 그린 궐어도(鱖魚圖), 메기를 그린 점어도(鮎魚圖), 게를 그린 해도(蟹圖) 등등 다양하다.

그중 쏘가리를 그린 궐어도는 문인화뿐만 아니라 민화에서도 특히 많이 그려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쏘가리의 궐(鱖)이 궁궐의 궐(闕) 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나 자식이 과거급제로 궁궐에서 근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집안에는 반드시 궐어도가 있었다. 낚시 바늘에 쏘가리의 입이 꿰인 그림은 더더욱 인기를 끌었다. 수능시험 날 대문 밖에 선 학부모들이 교문에 엿을 붙여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그까짓 그림이 무슨 힘이 있어 불합격할 사람을 합격시키겠는가마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도권에 진입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궐어도를 붙여놓았다. 그러니까 물고기 그림은 거의 부적 같은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김무호가 그린 ‘어락도’ 역시 쏘가리 그림이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믿음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자의 ‘호량의 대화’는 ‘복수(濮水)의 낚시질’과 짝을 이룬다. 복수의 낚시질의 내용은 이렇다.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초(楚) 위왕(威王)이 대부 두 사람을 파견하여 말했다. “선생에게 국정(國政)을 위임하고 싶소.” 장자가 낚싯대를 들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초나라에 신령스러운 거북이 있어 죽은 지가 3000년이나 되었는데, 초왕이 이것을 천에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기어 귀중하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대부들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장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그냥 가 보시오. 나는 장차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겠소”라고 했다. ‘세설신어’에 나온 내용이다. ‘호량의 대화’와 ‘복수의 낚시질’에서 호복한상(濠濮閒想)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사는 한가로운 심정을 의미한다.

물고기 그림을 그린 진짜 이유

그런데 장자와 혜자의 논쟁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두 사람이 논쟁을 하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그저 한가롭게 노닐 뿐이다. 원래 ‘장자’에서 말한 ‘어락’도 ‘늘 즐겁게 사는 물고기처럼 근심 걱정 없이 인생을 즐기라’는 뜻일 것이다. 자족하고 자득하라는 뜻을 내포했던 어락이 사람들의 욕망과 기복 때문에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러나 과유불급이 시사하듯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맹자’ 등문공에 보면 대장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천하라는 넓은 집에 거하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 자기의 도를 실천하여, 부귀도 그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신념을 변하게 하지 못하며, 어떠한 무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한다.” 대궐에 들어가 높은 자리, 막강한 권력 등을 누려야 대장부가 아니다. ‘장자’ 소요유에는 “뱁새가 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은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다”고 적혀 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기 분수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평생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자득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대신 부질없는 권력욕과 오만함 때문에 자신은 물론 자식대의 운마저 끌어다 써서 못된 부모가 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 살기가 힘든 시절에 연일 계속되는 피켓시위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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