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 ‘돈 워리’(‘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감독 구스 반 산트·2018)를 다뤄보겠습니다.

‘배트맨’ 시리즈의 고섬시티 악당 조커를 주연으로 내세운 화제작 ‘조커’(‘Joker’·감독 토드 필립스·2019)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그 배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가 바로 ‘돈 워리’의 주연입니다.

배종옥 그 배우가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세상에,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1974년생이더군요.(웃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냥 열심히 연기하는 할리우드 배우 중 하나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지, 나를 사로잡는 연기자는 아니었어요.

신용관 뻔히 알던 배우가 어느 영화를 계기로 마음에 확 와 닿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호아킨 피닉스가 누구지?” 싶은 독자들은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을 자랑하는 ‘글래디에이터’(‘Gladiator’·2000)에서 주연 ‘막시무스’(러셀 크로 분)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황제 아들 ‘코모두스’ 역을 맡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명연기의 배우를 떠올리면 됩니다.

배종옥 배우생활을 하다 보면 익히 퍼져 있는 자기 이름값을 뛰어넘는 연기를 한순간 펼칠 때가 있거든요. 나로선 에단 호크의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2015)와 지난번 우리 코너에서 언급했듯 엠마 톰슨의 ‘위트’(‘Wit’·2001)가 그렇게 다가왔어요.

신용관 그리고 이번에 ‘돈 워리’의 호아킨 피닉스가 그러했군요.

배종옥 그 배우의 진가를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배우로서의 감성의 폭과 깊이가 그렇게 넓고 깊은지 미처 몰랐어요.

신용관 영화는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에 있는 도시 포틀랜드에서 활동한 카투니스트 존 캘러핸(1951~2010)의 실화를 소재로 했습니다. 원제 ‘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은 그가 펴낸 자서전 제목을 그대로 따왔지요. ‘걱정 마요, 그는 걸어서는 멀리 못 갈 거니까’라는 뜻인데, 여기서 ‘he’는 영화에 따르면 ‘희망’쯤으로 해석됩니다.

배종옥 주인공이 휠체어 신세인 하반신 마비 환자이니 말 그대로 주인공 존 캘러핸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신용관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알코올중독자 ‘존’은 만취한 상태에서 친구와 함께 파티에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20대 나이에 전신마비 장애인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더욱 술에 탐닉하게 되지요.

배종옥 그러던 어느 날 존은 술을 끊기로 결심, 단주(斷酒) 모임에 나가고 거기에서 인생의 은인이라 할 멘토 ‘도니’(조나 힐 분)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도니의 여러 말들이 뇌리에 남더군요. “저절로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아요. 매일 그 상처들과 씨름해야 해요. 어떤 고통은 영영 사라지지 않고 어떤 수치는 영원히 남아 있어요. 그걸 이겨내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요” 같은 말은 정말 좋았습니다.

신용관 사실 영화의 기본 스토리는 상당히 눈에 익은 내용이지요. 상투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불의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일상의 영웅’ 이야기를 채우는 디테일은 굉장히 신선합니다. 가령 단주 모임에서 존은 자신이 알코올중독자가 된 내밀한 사연을 고백하지요. 생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엄마’에 대한 분노와 그리움으로 13살 때부터 술을 마셨던 겁니다. 그리고 친구 잘못으로 휠체어 신세가 된 ‘눈물의 개인사’를 펼치지만 웬걸 회원들의 반응은 싸늘하지요.

배종옥 저도 그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술을 끊자며 둘러 모여앉아 존의 얘기를 경청한 어느 누구도 존의 처지를 동정하지도, 심지어 공감하지도 않았다는 거지요. 오히려 “징징거리며 신세 한탄하길 그만두라. 절대 자기 연민(self-pity)에 빠지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신용관 실존주의의 선구로 꼽히는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1813~1855)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을 보면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입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저는 저 자신의 상황을 반추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자기 연민’이라 결론 지은 적이 있지요.

배종옥 영화 ‘돈 워리’의 주제와 꼭 맞아떨어지는군요.

신용관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Lawrence· 1885~1930)의 시 중에 ‘Self Pity’라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측은히 여기는 야생(野生)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새조차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배종옥 아주 인상적인 비유네요. ‘돈 워리’는 사실 자기 연민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남자를 그리고 있는 셈이니까요.

신용관 영미에서는 잘 알려진 구절이라 미 해군 특수부대원이 되기 위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한 여성(데미 무어)을 묘사한 ‘지. 아이. 제인’(‘G. I. Jane’·1997)에서도 대사로 인용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지. 아이. 제인’도 리들리 스콧 감독 영화네요.

배종옥 치유와 용서라는 눈 익은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돈 워리’가 인상적인 영화로 남을 수 있는 건 상당 부분 배우들의 호연 덕분이라고 봅니다. 존의 재활을 돕는 자원봉사자 ‘아누’ 역의 루니 마라 또한 과하지 않으면서도 능숙하게 호아킨 피닉스와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신용관 엎드려 기계에 매달린 존과 눈을 맞추기 위해 병실 바닥에 누운 아누는 존이 “우리는 외진 시골의 촌뜨기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억지를 부려도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그녀가 존의 코에 꽃다발을 들이밀어 향기를 맡게 하며 삶에의 의지를 환기시키는 그 간단한 신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배종옥 주변의 어느 누구든 “꼴이 어떻든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 말해준다면 아마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을 겁니다.

신용관 영화에서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는데 실제로 두 배우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Mary Magdalene’·감독 가스 데이비스·2018)을 찍으면서 애인 사이가 되었다고 하네요. 실제 연인이 함께 영화에 출연하면 속칭 ‘케미’가 남다를 텐데요.

배종옥 아무래도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는 경험이 없어서.(웃음)

신용관 ‘돈 워리’를 연출한 구스 반 산트는 제70회 아카데미에서 무려 9개 부문을 수상한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1997)의 감독이지요. ‘굿 윌 헌팅’이 MIT 심리학 교수 ‘숀’(로빈 윌리엄스 분)이 “네 탓이 아니다”며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을 위로하는 영화라면, ‘돈 워리’는 “네 탓도 인정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로 영화가 실없이 무거워지는 걸 막아내고 있습니다.

배종옥 아무래도 좌절을 넘어서는 내용이라서인지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많습니다. 노자에 심취한 도니는 ‘도덕경’을 끌어오지요.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며, 평온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신용관 마치 한국인들이 술자리에서 건배사 하듯, 금주 모임을 이끄는 도니는 “나의 오늘이 평범하기를 기도합니다”라며 시작합니다. 평범한 일상, 그게 사실 축복이겠지요.

배종옥 여담이지만 저는 하반신 장애인이 어떻게 섹스하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답니다.(웃음)

신용관 이 몸 또한.(웃음) 제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자학은 깃털로 해요. 몽둥이가 아니라”.

배종옥 저는 ★★★★. “존은 절망에 빠지고, 나는 호아킨 피닉스에 푹 빠져버렸다.”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배종옥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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