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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78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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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맥주의 성지 브뤼셀에서 천연효모 램빅에 취하다

▲ 브뤼셀 맥주의 성지로 평가받는 ‘델리리움 카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맥주를 파는 기네스 신기록 매장이다.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벨기에 여행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 덤으로 끼워서 받은 것이 그간 벨기에 체험의 전부였다.
   
   지난 9월, 목적지를 브뤼셀로 잡은 것은 ‘그 유명한’ 벨기에 맥주 때문이었다. 유네스코도 인정한 세계 ‘무형문화유산’인 벨기에 맥주 탐사가 여행의 목적이었다. 맥주 찬미론자가 본다면 맥주 성지순례 정도라고나 할까? 맥주세계에서 벨기에 맥주가 아주 특별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안 건 10여년 전이다. 이탈리아 친구와 만났던, 미국 뉴욕의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 맥줏집이 무대였다. 일단 맥주 한 잔 값이 고급 와인보다 더 비싸다는 점에 놀랐다. 쉽게 마시고 즐기는 ‘조연급’이 아니라 마치 테이블 중심에 선 ‘주인공’ 같았다. 놀랍게도 이탈리아 친구는 와인이 아닌, 벨기에 맥주 신자였다. 처음 만났던 벨기에 맥주에 관한 인상은 ‘맥주로 불리는 벨기에 스타일 와인’이란 것이다. 벨기에 맥주가 왜 특별한지, 의문과 공부가 이후 이어졌다.
   
   10여년 전부터 뉴욕에서 크래프트(Craft), 즉 소규모 수제 장인 맥주의 열기가 시작됐다. 콜로라도산(産) 쿠어스(Coors)가 그러하듯, 미국 맥주의 대부분은 독일 체코계 필스너 계통의 대량생산 제품이다. 알코올 농도 5도 전후로, 물처럼 부드럽다. 크래프트 맥주의 열기는 기존의 ‘밋밋한’ 맥주시장의 판도를 바꾼다. 알코올 도수도 강하고, 맛이나 향도 백인백색인 크래프트가 뉴욕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원래 미국에서 크래프트 맥주의 성지는 서부 오리건이다. 프랑스 문화권 지역으로, 고급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대세에서 벗어난, 서부 ‘긱(괴짜 매니아·Geek)’의 상징인 크래프트 맥주가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온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연히 필자가 들렀던 그리니치 빌리지는 그 같은 동부 크래프트 맥주 열기의 전위병에 해당됐다. 벨기에 맥주는 기본적으로 크래프트 맥주다. 미국 내 수많은 크래프트 맥주의 뉴욕 진출에 앞서, 벨기에인에 의한 소규모 수제 장인 크래프트 맥주가 이미 맨해튼에 진출한 상태였다.
   
   벨기에 맥주의 위상은 크래프트 맥주의 ‘질(質)’에 그치지 않는다. ‘양(量)’ 또한 손색이 없다. 벨기에에는 10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다고 한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도 많지만, 벨기에만의 독자브랜드가 780종류에 달한다. 인구 1100만에 불과한 나라지만, 5000만 한국에 비해 20배 이상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당연한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벨기에의 알코올소비량은 OECD 권내에서도 톱을 달린다.(2018년 기준) 100% 순수알코올 기준으로 벨기에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2.6L에 달한다. 한국은 OECD 내 10위로 9.9L 정도다. 폭탄주로 찌든 한국이라고 하지만, 1년에 맥주 200L 이상을 즐기는 벨기에인에 비하면 아직 새 발의 피다.
   
   
   왜 벨기에 맥주가 유명한가
   
   자벤템(Zaventem)에 있는 브뤼셀국제공항에 내렸다. 3년 전인 2016년 3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슬람 테러사건 발생지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벨기에 맥주와 관련해 주목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왜 벨기에 맥주가 유명한가’라는 점이다. 왜 유네스코가 직접 나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인지, 왜 옆나라인 프랑스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아닌 벨기에 맥주인지라는 점이다. 둘째는 수많은 벨기에 맥주에 맞춰진 맥주잔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알았지만, 벨기에 맥주의 경우 맥주잔이 맥주의 종류에 따라 전부 다르다. 뉴욕에 있는 벨기에 맥줏집을 오가며 들은 풍월은 있지만, 역시 원조지역에서 어떤 맥주잔이 어떤 맥주에 맞춰지는지 알고 싶었다. 벨기에에서 쓰이는 맥주잔은 브랜드에 따라 각양각색인데 유리가 두껍다는 공통점이 있다. 크게 보면 텀블러형, 성배형, 튤립형, 풍선형 등이 인기다. 맥주의 향과 거품, 온도 등을 고려해 다른 잔들이 쓰인다.
   
   벨기에 맥주의 성지는 수도 브뤼셀이다. 사실 벨기에 맥주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뤼셀 맥주라는 말이 타당하다. 이유는 브뤼셀 주변에서만 자라는 맥주용 천연효모 때문이다. 벨기에 맥주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눠진다. 에일(Ale)과 램빅(Lambic)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독일 체코풍 필스너 맥주 영역권의 나라다. 인공효모에 의한 하면발효(下面醱酵)가 필스너의 기본이다. 섭씨 5~10도의 저온에서 인공효모를 맥주원액 밑에서 발효시키면서 숙성시키는 식이다. 한국인이 즐기는 라거(Larger) 맥주가 필스너의 대표주자다. 벨기에 맥주는 다르다. 섭씨 15~20도의 고온에서 인공효모를 맥주원액 위에서 발효시키는 상면발효(上面醱酵) 방식의 에일 맥주와, 상면·하면 관계없이 천연효모의 자연발효 방식을 따르는 램빅 맥주가 주류다.
   
   
▲ 델리리움 카페의 진열장을 메우고 있는 각종 맥주와 맥주잔들(오른쪽). 맥주의 향과 거품, 온도 등을 고려해 다양한 맥주잔이 쓰인다.

   브뤼셀 맥주의 최고봉
   
   좁은 의미의 벨기에 맥주는 천연효묘의 자연발효에 의한 램빅이다. 천연효모의 탄생지가 브뤼셀 근처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필스너는 물론, 에일 맥주도 브뤼셀 밖에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램빅은 다르다. 오직 브뤼셀 근처 토양에서만 자라는 천연효모가 필요하다. 램빅 맥주, 다시 말해 좁은 의미의 벨기에 맥주는 오직 브뤼셀에서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램빅 맥주용 천연효모를 수입해서 만들면 어떨까? 효모는 물·태양·기후·토양의 종합 결산물이다. 브뤼셀 천연효모를 수입하려고 해도, 이동 중에 죽어버린다. 무사히 도착한 뒤라도 변질되거나 그대로 사라진다. 나폴리 피자의 진짜 맛은 오직 나폴리에 가야만 만날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 역시 천연효모가 주된 원인이다. 나폴리에서만 자라는 천연효모가 피자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맛이 특별하다. 천연효모는 나폴리를 벗어나는 순간 죽거나 변질된다. 알코올, 빵, 간장, 된장, 김치를 포함한 모든 음식의 출발점은 효모의 맛에 달려 있다. 효모 자체가 특별한 맛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재료들을 얼마나 부드럽고 깊게 연결시켜주느냐가 효모, 특히 천연효모의 역할이다.
   
   벨기에 맥주, 아니 브뤼셀 맥주의 최고봉인 램빅 탐험에 나섰다. 목적지는 브뤼셀 맥주의 성지에 해당하는 ‘델리리움 카페(Delirium Cafe)’다. 미국·일본에도 지점을 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맥주를 파는 기네스 신기록 매장이다. 전 세계 60개국에서 수입된 맥주와 더불어 벨기에 특제 맥주도 판매한다. 브뤼셀 시내 한복판 ‘피델리테(Fidlit)’에 있다. 브뤼셀 관광 제1 명소, ‘그랑 플라스(Grand Place)’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 벨기에인들은 아침부터 맥주를 마신다. 피델리테로 가는 길을 따라 노천 테이블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거기서 마시는 알코올 음료 대부분이 맥주다. 음식의 경우 대부분이 홍합 스팀 요리와 튀긴 감자다. 억지를 부리자면, 브뤼셀 노천카페 메뉴의 십중팔구는 맥주와 홍합 요리다.
   
   델리리움 카페는 막다른 골목에 붙은, 길게 이어진 매장이다. 맥주만이 아니라 럼, 데킬라 심지어 일본술(日本酒)도 판다. 전 세계 알코올 백화점이라고 보면 된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민망스러운’ 조각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제네케 오줌(Jeanneke Pis)’이란 제목의 청동조각으로 벌거벗은 여자 어린이가 ‘작은 일’을 보고 있다. 오줌이 모이는 곳에 동전을 던지면 행운이 함께한다는 설명서가 붙어 있다. 1987년 6월 24일 현지 예술가가 만든 것으로 ‘델리리움 골목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오줌싸개 소년(Manneken Pis)은 브뤼셀에 들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명소다. 제네케 오줌은 오줌싸개 소년에 대응되는, 벨기에식 남녀평등의 상징물이다. 소년이 물인 데 비해 소녀의 경우 맥주라는 점에서 한층 더 앞선 듯하다.
   
   
   수도원 맥주의 진수
   
   델리리움 카페에 들어가 램빅 맥주 중 가장 유명한 것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저런 설명 끝에 앵두향이 가미된, 벨기에인 모두가 좋아한다는 맥주로 결정했다. ‘크리크(Kriek)’란 맥주다. 영어로 앵두(Cherry)라는 말이다. 250㏄ 한 잔에 5유로다. 언뜻 보면 위스키용 잔과 비슷한 잔에 제공됐다. 맛은 이름 그대로 앵두의 향과 맛을 맥주에 버무린 듯하다. 혀끝에 뭔가 남지 않는 맛인데, 진하지 않고 담백하다. 목청을 틔우기 위한 맛이 아니라, 코로 마시는 풍미의 맥주다. 천연효모 램빅을 의식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맥주가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신선하고 상쾌하다. 알코올 농도 약 8%로 다소 높지만,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맛있는 알코올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크리크 램빅은 특별한 회사의 브랜드와 무관했다. 앵두의 풍미를 가미한 모든 맥주가 크리크라 불린다. 따라서 크리크 램빅을 만드는 회사는 수십 군데에 달한다.
   
   ‘트래피스트(Trappist) 맥주’는 벨기에 맥주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키워드다. 전 세계 14군데의 수도원에서 생산된 맥주를 의미한다. 벨기에가 가장 많은 6군데, 네덜란드가 2군데다. 와인처럼 맥주도 수도원을 통해 진화, 개발돼왔다. 그러나 벨기에 트래피스트 맥주야말로 전 세계 수도원 맥주의 기준에 해당한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의 권위가 없다면 나머지는 무의미하다. 벨기에 트래피스트 맥주는 전통 양식에 따라 제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통적으로 수도원의 맥주는 음료가 아니라 음식으로 취급됐다. 위를 채우는 실제 음식이 맥주라는 인식이다. 그래서인지 벨기에 트래피스트 맥주를 마시면 보리밥을 왕창 먹은 듯한 포만감이 든다.
   
   반쯤 취한 채 끝난 3일간의 벨기에 맥주 순례의 결론이지만, 램빅 플러스 트래피스트 맥주가 벨기에 맥주의 진수이자 핵이다. 물론 거기에 맞는 맥주잔은 필수요소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 램빅 트래피스트 맥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벨기에 역사 문화 책부터 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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