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에 다소 냉소적 의미로 ‘강남좌파’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그때 “나는 강남좌파다. (나 같은) 강남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일갈한 것이 바로 조국(曺國) 전 장관이다. 실제로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더 많아졌다’. 바야흐로 강남좌파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일까.

그들과 유사한 부류로 미국에는 ‘리무진 진보주의’,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 프랑스에는 ‘캐비어 좌파’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한동안 예외적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부류들이 좌파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하는 국제적 비교 연구가 등장했다. 바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48)의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Brahmin Left vs Merchant Right·2018)다. 부제(副題)는 ‘불평등의 심화 및 정치적 갈등구조의 변화’다.

그에 앞서 저자는 저서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21th Century·2013)에서 지난 수백 년간의 통계자료에 근거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자본수익률은 항상 경제성장률을 앞선다. 따라서 경제가 발전할수록 불평등도 심화된다.” 그의 단정적 결론에 대해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런 불평등 문제에 정치적인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좌파 정당이 자신의 존재이유나 마찬가지인 불평등 문제에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천착해 답을 모색해본 것이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다. 본문 65쪽과 별첨자료(도표) 113쪽으로 구성된 논문이다. 전문이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이 논문은 1948년부터 2017년까지 약 70년간의 프랑스·미국·영국의 투표 자료에 근거해 세 나라의 정치적 갈등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한다. 이런 탄탄한 실증적 접근이 이 논문의 최대 강점이다. 저자는 세 나라의 경우를 차례로 분석한 다음, 공통적인 변화 양상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좌파 정당(사회당·민주당· 노동당 계열)의 지지층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교육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계급투표가 이루어졌다. 즉 저학력 저소득층은 좌파 정당을 지지한 반면, 고학력 고소득층은 우파 정당을 지지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고학력층의 좌파 정당 지지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아예 확고한 현상으로 굳어졌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학사학위 소지자의 51%, 석사학위 소지자의 70%, 박사학위 소지자의 76%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고학력층의 확대 및 다양화다. 과거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대부분의 대학 졸업자는 의사·법률가·교수·엔지니어 등 상층 전문직에 진출하여 안정된 삶을 향유했다. 하지만 차츰 고학력층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들의 직업·고용형태·수입 등도 폭넓고 다양해졌다.

둘째는 저학력의 전통적 산업 노동계급의 몰락이다. 그들은 대규모 사업장을 배경으로 뚜렷한 정체성과 조직력을 자랑하던, 말 그대로 좌파 정당의 핵심 기반이었다. 하지만 산업의 해외탈출이나 자동화로 인해 대부분이 레스토랑 직원, 운전사, 청소부 등 하층 서비스 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들은 더 이상 좌파 정당의 중심적 지지층으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구조적 위기를 맞아 좌파 정당은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새로운 지지층을 찾아나섰다. 그것이 바로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전문직 종사층이었다. 그들은 대개 고학력 화이트칼라 중산층이었다. 이에 따라 좌파 정당은 ‘경제적’ 진보정치보다 ‘문화적’ 진보정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물론 좌파 정당의 문화적 진보정치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사실 전통적 노동자 계급은 늘 문화적 보수주의에 안주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문화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은 좌파 정당 엘리트의 주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 정당은 아예 중하층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상실한 채 문화적 진보정치에 골몰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연스럽게 불평등 문제에 더 이상 ‘절실한’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새로운 하층 서비스 노동자나 중하류 계층은 정치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 어떤 정치 세력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또한 그들도 스스로를 조직하거나 동원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광범위한 계층이 정치적으로 배제된 탓에 불평등 문제는 점점 더 정치적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좌파 정당이 전통적 역할을 회복하여 불평등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대체로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세계화라는 시대적 추세다. 좌파 정당의 새로운 지지층인 고학력의 사회문화적 전문직 계층은 세계화의 수혜자다. 그래서 최근에 좌파 정당도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왔다. 반면 몰락한 노동계급은 세계화의 피해자다. 이처럼 좌·우뿐만 아니라, 개방주의·보호주의가 또 다른 정치적 균열선으로 등장했다. 한마디로 정치지형이 전통적인 2분위 구조에서 4분위 구조로 분화되었다.

둘째는 우익 포퓰리즘이다. 몰락한 중하층 노동자 계급은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에 안주하고 경제적으로는 보호주의를 지지한다. 우익 포퓰리즘이 바로 이 점을 파고든다. 실제로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서 반(反)이민과 보호주의를 앞세운 우익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포퓰리즘은 지역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좌파 정당은 더 이상 광범위한 중하층 집단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고학력의 지적인 엘리트(즉 브라만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변모했다. 반면 우파 정당은 전통적으로 비즈니스 엘리트(즉 상인 우파)를 대변해왔다. 그리하여 정치는 두 부류의 엘리트가 양분하는 ‘이중 엘리트’ 정당 체제(‘multiple-elite’ party system)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또한 정치에 무관심하다. 이로 인해 좌우 정당 지지층 간의 균열선보다 정치에 포섭된 층과 배제된 층 간의 균열선이 더 넓고 강한 실정이다. 어느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의 무려 60~70%가 어떠한 정당도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저런 포퓰리즘적 유혹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는 왜 좌파 정당이 불평등 문제에 침묵하는가를 역사적·실증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그것은 좌파 정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지만, 우파 정치 또한 그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오늘날 서구 정치가 광범위한 유권자를 소외시킨 채 ‘엘리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 무엇보다 문제다.

우리나라 정치도 마찬가지다. 탄핵으로 인한 우파의 몰락이나 조국(曺國)으로 인한 좌파의 곤경은 결코 별개가 아니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다. 바로 이런 이해와 성찰이 일체의 건설적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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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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