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순 작 ‘코끼리 걷는다’
엄정순 작 ‘코끼리 걷는다’

‘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화가 엄정순에게 이 질문은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오랜 숙제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았다. 녹슨 수도 펌프가 쿨렁거리면서 뱉어내는 녹물을 보고 ‘오렌지 주스’를 상상했다. 볼록한 수저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괴물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별난 아이’ 혹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다. 더 이상 자신의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궁금증은 마음속 질문을 점점 키웠다. 그 질문이 그를 화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화가가 된 이후 ‘본다’에 대한 의문은 정반대에 있는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해답 없는 질문을 끌어안고 그는 23년 전 충북 충주의 한 장애인학교를 찾아들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 전임교수로 있을 때였다. 교수직도 버리고 시각장애 학생들의 미술수업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특수교사 자격증이 없다 보니 자원봉사자 자격이었다. 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는 컨테이너를 빌려 3년 동안 살다시피 하면서 시각장애 학생들을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시각예술가와 시각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안 보이는 아이들한테 무슨 미술? 뜬구름 잡는 소리! 쓸데없는 일.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았지만, 그와 아이들은 서로의 다른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고 ‘본다’에 대한 세상의 고정관념을 깼다. 특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은 미술을 할 수 없다’는 통념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매년 시각장애 학생들을 데리고 태국 치앙마이에 코끼리를 만나러 가는 프로젝트이다. 그곳에는 쇼를 하다 다치거나 병든 코끼리들을 돌봐주는 코끼리공원(ENP)이 있다. 만지고, 느끼고, 거대한 코끼리와 교감을 하고 온 아이들은 각자가 ‘본’ 코끼리를 다양한 작품으로 만든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손에서 세상에 없는 코끼리들이 탄생했다. 코가 없는 코끼리, 코만 있는 코끼리, 납작하게 펼쳐진 코끼리, 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코끼리…. 아이들의 작품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온전히 감각에 기대 만든 코끼리는 눈으로 본 코끼리보다 코끼리의 본질에 가까웠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자유로웠다. 아이들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그가 처음에 품었던 질문처럼 ‘본다’라는 단어를 화두로 던졌다.

엄정순 작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엄정순 작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보다’의 사전적 의미는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 또는 ‘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이다. 이 뜻풀이는 이제 ‘눈으로’가 아닌 ‘오감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로 수정돼야 한다. 지난 10월 25일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인사이드 미, 아웃사이드 미-나와 세상 보기’ 전시를 찾았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눈이 아닌 오감으로 풀어낸 미술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학생들이 자신의 몸을 본뜬 모양에 색칠을 한 작품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일반적인 갤러리와는 달리 작품을 마음대로 만져볼 수 있고, 시각장애인의 동선을 안내하는 선형 텍스트 레일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는 이런 전시를 매년 수차례씩 열고 있다. 전시를 본 후 그와 마주했다.

“학교에 가고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산 중턱에 있다 보니 늦은 밤 컨테이너까지 가는 길이 무서웠어요. 시각장애 학생이 저를 데려다주는데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겁니다. 안 보이는 세계를 보려면 어둠에 익숙한 사람과 가야 하겠다, 그런 깨달음이 아이들과의 작업에서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해줬습니다. 아이들에게 바짝 엎드렸죠. 마음을 내려놓으니 아이들이 더 잘 보였습니다. 안 보이는 아이들과 보이는 작업을 해? 가능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실 저도 모르는 세계였습니다.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아이들이 보는 방식을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저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합니다.”

시각장애 학생들과의 만남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눈이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빛과 어둠만 보는 눈, 50㎝ 내의 것만 보는 눈, 시야의 반이 어둠인 눈, 뿌옇게 보는 눈, 터널처럼 가운데만 보는 눈,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이는 눈, 전맹인 눈 등 제각각 고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눈을 가진 개인을 보지 못하고, 우리 사회는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생각했다. 즐거운 발견에 그의 가슴이 뛰었다. 시각장애의 세상은 그냥 깜깜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에는 사람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누구는 예쁘다 하고 누구는 밉다고 하는 건 왜 그런 거예요?”

“반짝이는 건 어떤 거예요?”

“선생님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각기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들을 던졌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깨우침이 오는 순간들이었다.

“미술은 눈으로 하는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을까요?” 그가 반문했다. 어느 날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30분 만에 무려 드로잉 10점이 완성됐다.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으니 정말 작업이 빠르더라”고 했다. 어둠이 결핍이나 비효율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척점에 선 그와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이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뭘 가르쳐줄까? 귀하고 경이로운 경험을 혼자 알기는 아까웠다.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예술실험실을 표방하는 비영리법인 ‘우리들의 눈(Another way of Seeing)’을 만들었다.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 우리들의 눈이고 미술을 통해 서로의 보는 방식을 알아가자는 일종의 프로젝트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사로 참여하는 예술가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들의 눈’ 엄정순 대표 ⓒphoto 엄정순
‘우리들의 눈’ 엄정순 대표 ⓒphoto 엄정순

눈이 아닌 손끝으로 보다

‘우리들의 눈’은 다양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찾아가는 맹학교 미술수업, 점자촉각 아트북 프로젝트, 시각장애 학생 미술공모전인 ‘프리즘 프라이즈’, 시각장애인과 서울 북촌 주민이 함께한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네이버스 갤러리’, ‘뮤지엄 투어 프로그램’ 등 작은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들이 우리 사회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다. 문턱 높던 뮤지엄도 시각장애인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우리들의 눈’은 몇몇 뮤지엄과 손잡고 시각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모든 프로젝트들의 결론은 전시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시를 통해 시각의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떴다. 전시를 본 관객들이 남긴 관람평들이다.

‘본다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눈 뜬 자의 생각이 부끄럽네요. 세상을 보는 눈이 손끝에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갑니다.’

‘저는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곳에 들른 이후 보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각장애 학생의 미술대학 진학과 예술가 탄생을 지원하는 ‘가지 않는 길’ 프로젝트도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2015년 처음으로 미대 진학 학생이 탄생했고 사진작가를 키우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코끼리 프로젝트’이다. 왜 코끼리일까.

“어느 해인가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어요. 우연히 들판을 천천히 걸어가는 코끼리를 본 순간, 난데없이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어요. ‘그가 우리를 재빨리 근원으로 데리고 가는 듯한….’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아 코끼리에 대한 자료를 찾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600여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한 마리의 코끼리를 만났습니다.”

역사 기록에 코끼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이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조공으로 회색 코끼리를 받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코끼리를 보내고 대신 고려 대장경 판본을 요구했다. 그렇게 한반도에 들어온 코끼리의 삶은 험난했다. 구경 온 관료가 코끼리에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졸지에 살인마가 된 코끼리는 전라남도의 작은 섬으로 유배됐다. 너무 많이 먹고 기이하게 생긴 코끼리는 쓸모없고 불편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곳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코끼리는 다시 뭍으로 나왔다. 충청도로 경상도로 떠돌던 끝에 또다시 사람을 죽이는 사고를 쳤다. 그동안 세종이 즉위했다.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보내자는 충청도 관찰사의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교지를 내렸다.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보내어 병들고 굶어죽지 않게 하여라.”

이 문장을 본 순간 그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세종의 당부는 600년의 시간을 넘어 그를 움직였다. 그 이후 그는 코끼리를 매일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코가 코끼리의 정체성이라고 하지만 그는 어딘가로 향하는 묵직한 뒷모습이야말로 가장 코끼리답다고 생각한다. 근원으로 데려가는 듯한 ‘코끼리 걷는다’ 시리즈다. 그의 작업은 선의 작업이다. 수없이 선을 중첩하다 보면 형태가 드러난다. “내 작업에서 선은 곤충의 더듬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더듬다 똑같이 더듬는 아이들을 만난 거지요. 그러고 보니 그림은 늘 촉각적이라고 생각했네요.”

너무 크고 달라서 슬픈 코끼리는 시각장애 아이들과도 연결이 됐다. 맹인모상(盲人摸象), 불교 경전 ‘열반경’에 나오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뜻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서 자기가 본 것만 주장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비유하는 우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시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로 변질됐지만 사실은 ‘본다’의 본질을 꿰뚫는 단어이다. 이 단어에서 시작해 ‘코끼리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아이들이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통해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대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코끼리 프로젝트는 세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그의 개인 작업인 ‘코끼리 걷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코끼리 만지기’,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전시이다. ‘코끼리 만지기’는 전국 맹학교를 순회하는 투어 프로젝트로 구상했다. 전국을 떠돌았던 조선 최초 코끼리의 외로운 여정을 따라가는 의미였다. 전국 맹학교는 12개(우리나라 시각장애인 등록 수 25만여명)이다. 2009년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매년 한 학교씩 선정해 전국을 순회 중이다. 먼저 6개월간 매주 음악, 냄새 등 오감을 통해 코끼리를 상상하는 교육을 하고, 코끼리를 만나고, 돌아와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것까지 1년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코끼리 찾아 삼만리였다. 보는 것도 힘든데 앞이 안 보이는 아이들이 만진다고 나섰으니 듣도 보도 못 한 시도였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코끼리는 보기보다 예민하다. 우여곡절 끝에 광주 우치동물원과 연결이 됐다. 3년을 진행하다 코끼리가 팔려가는 바람에 다시 헤맨 끝에 기적처럼 찾은 곳이 치앙마이 근처의 코끼리 캠프였다.

<b></div>01</b>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 photo 우리들의 눈<br/><b>02</b> 청주 맹학교 협업작품<br/><b>03</b> 인천 혜광학교 협업작품<br/><b>04</b> 대전 맹학교 협업작품
01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 photo 우리들의 눈
02 청주 맹학교 협업작품
03 인천 혜광학교 협업작품
04 대전 맹학교 협업작품

보이는 눈, 안 보이는 눈. 우리들의 눈

해외 프로젝트는 국내와는 차원이 달랐다. 안 보이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려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학생 10명이면 30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비용이었다. 사전수업부터 이동 비용, 작품 만드는 재료값 등 1년에 최소 1억원이 필요했다. 그는 재료도 최고를 고집한다. 잘 마르지 않는 전문가용 점토라야 아이들이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업 파트너인데 저만 전문가용을 쓰고 아이들은 문방구용을 쓰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비용 마련부터 시작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번 다녀오면 녹다운이 된다. 그래도 부쩍 성장하는 아이들과 작품들을 보면 주문에 걸린 듯 다시 일어서게 된다. 갤러리에 걸린 미술과는 다른 살아있는 예술의 마법이다.

그를 정작 지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다. 그는 애초에 봉사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본다’는 본질을 찾아 함께 탐험을 나선 길동무였고, 20여년 여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평생에 걸친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생각을 밝혔지만 사람들은 멋대로 ‘봉사’라는 포장을 씌웠다. 장애인을 이용한다는 오해도 서슴지 않았다. ‘봉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프로젝트에 숨은 다양성을 놓치고 단지 좋은 일 한다는 데 멈추고 만다.

최근 ‘우리들의 눈’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갤러리 문을 닫고 사무실을 축소했다. 그는 “민들레 홀씨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뿌린 씨앗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퍼져나갔다. 홍콩,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아시아연대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 있다. 퍼져나간 씨앗들을 따라 ‘우리들의 눈’은 필요한 곳으로 달려갈 생각이다. 아이들이 선물한 ‘예기치 못한 관점’들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의 가치를 함께하는 후원자들이 늘어난다면 그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보는 것에만 치우쳐 있는 시대에 균형을 잡아주고 감각의 회복을 이끄는 일이다. ‘본다’는 본질의 탐구는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단어이다. 그에게서 시작된 이 질문은 우리 사회 곳곳으로 확장되고 있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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