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을 치른 젊은이들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부모의 마음은 더 타들어간다. 누구나 좋은 점수를 받아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의사, 변호사, 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려고 한다. 정작 자신의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못한다. 결국에는 극히 일부만 뜻을 이루고 대다수는 루저(loser)가 되고 만다. 마치 과거(科擧)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실제로 과거가 전부였던 왕조시대에도 자신의 꿈을 좇아 자신만의 삶을 멋지게 가꾸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중국 명나라 말의 서하객(徐霞客·1587~1641)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리(地理)와 산천유람에 흥미를 느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니의 따뜻한 격려에 힘입어 자신의 희망대로 평생 동안 탐사여행을 즐기는 낭만적 삶을 살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라는 소중한 기록유산을 남겼다.

그는 여행 중에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무려 60만자에 달한다. 또한 행적만 있고 일기가 남아 있지 않은 경우 등을 고려해보면 대략 20만자 정도가 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본래는 80만자나 되는 더욱 방대한 분량이었다.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일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가 남긴 자료는 후학들에 의해 ‘서하객유기’라는 이름으로 편집되었다. 우리말로도 최근에 총 7권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명(明)·청(淸) 교체기에 강소성(江蘇省) 사대부가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과거를 통해 입신하기보다 산천을 두루 탐사해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홀어머니 때문에 주저했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여전히 과거를 외면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이때 어머니가 나서서 행장을 꾸려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이로써 스물한 살의 아들은 가슴속에 간직했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여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마흔일곱까지는 주로 목적지와 집을 오가며 여행했다. 홀어머니를 두고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상(喪)을 치르고 나서 그는 2년 동안 준비한 다음, 쉰 살에 서남 지역 탐사여행을 떠났다. 이것은 아예 기한을 정하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도중에 병을 얻어 그의 탐사는 3년여 만에 중단되었다. 이 기간의 기록이 ‘서하객유기’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처음에 그는 봄과 가을을 이용해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여행을 하다가 점점 반경을 넓혀갔다. 목적지는 태산, 천태산, 황산, 오대산, 항산 등 주로 명산이었다. 한 번에 짧게는 반 달, 길게는 두 달여씩 유람을 했다. 목적지에서 보낸 기간만 그렇지, 오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당시 교통이나 숙박 사정을 감안하면 대단한 신고(辛苦)였을 것이다. 특히 그의 여정과 경험과 관찰은 후대 사람들의 여행 지침이 되다시피 했다.

그의 여행은 단순한 유람을 넘어 점점 탐사와 탐험의 성격을 더해갔다. 여행 거리와 기간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준비 끝에 서남 지역 탐사여행에 나서기로 했다. 마침 출발일에 숙부가 찾아왔다. 숙부를 대접하다가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술이 취한 채로 그날 밤 배에 몸을 싣고 길을 떠났다. 그의 각오가 얼마나 굳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여행 내내 강렬한 호기심과 과학적 관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답사하며 그 결과를 옛 문헌과 일일이 대조했다. 이런 과정에서 옛 문헌의 오류를 여럿 바로잡기도 했다. 특히 서남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석회암 지형(이른바 카르스트 지형)을 열정적으로 탐사했다. 그는 신기한 지질의 분포나 다양한 지질현상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관찰은 후대의 지질학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가 직접 탐사한 석회암 동굴만 해도 무려 100개가 넘는다. 그는 횃불을 들고 깜깜한 동굴에 들어가 특징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 안은 더욱 이어져 두 개의 하늘로 통한 문을 지나 길은 점점 동북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종유석들이 있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재촉하기에 억지로 멈추게 하고는 세밀히 살펴보았다.” 심지어 그는 현지인들이 귀신이 있다며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동굴에도 혼자 서슴없이 들어가곤 했다.

그의 시선은 단순히 명산대천(名山大川)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생활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특히 잘못된 정치와 자연재해로 인한 하층민의 고통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채석장이들 집이 조용히 남아 물가를 수십 자 둘러싸 있으나, 사람들은 모두 다 옮겨갔으니 채석 일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강도와 기아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번은 선상에서 강도의 공격을 받아 네 군데나 칼에 찔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절강성, 강서성, 호남성, 광서성, 귀주성, 운남성 일대의 광대한 자연을 답사하며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만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탐사는 그가 발병(足疾)을 얻어 불가피하게 3년여 만에 중단되었다. 한 지방관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그는 몇 달 투병 끝에 그만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당시 여행은 대부분 두 발로 했을 것이다. 더구나 산천을 답사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두 발로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발에 고장이 나서 그의 여정은 멈췄다. 평생 유람과 탐사를 꿈꿨던 그에게 걷지 못하는 삶은 곧 죽음이었다. 실제로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자 죽었다. 여행가로서는 사뭇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장대한 여행은 대부분 왕명(王命)이나 종교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하객처럼 개인이 호기심과 탐험정신에 따라 이처럼 엄청난 여행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는 방대한 답사기록을 통해 다양한 방면에 걸쳐 소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그는 단순한 여행가나 탐험가에 머물지 않았다. 동시에 문학가요, 지리학자요, 지질학자요, 인문학자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가 ‘서학(徐學)’이라고 불리며 다방면에서 활기를 띠고 있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길을 가고자 한다. 왕조 교체로 어수선하기는 했어도 그의 시대는 여전히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양명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도 한때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끝내 명산대천을 누비고 싶은 열망은 억누르지 못했다. 이런 엉뚱한 꿈은 자칫 개인과 가정에 먹구름을 불러오는 화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손수 행장을 꾸려주며 격려했다. 이에 힘입어 아들은 사대부의 고리타분한 운명을 부숴버리고 자신만의 길로 나섰다. 그리고 발병이 나서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서하객유기’는 그 길에서 거둔 소담한 열매다. 그 절반은 단연코 어머니의 몫이라고 할 만하다. 만약 그와 같이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무턱대고 과거에 매달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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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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