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솔 광장 전경. ⓒphoto 셔터스톡
마드리드 솔 광장 전경. ⓒphoto 셔터스톡

2050년 8월 15일 마침내 우주공화국 평화사절단이 지구에 도착한다. 유엔본부 총회실에서 지구-우주 평화조약 서명식이 이뤄진다. 곧바로 환영식을 겸한 우주공화국 대표단의 지구 시찰도 시작된다. 길고 긴 우주여행 때문에 방문단 모두가 지쳐 있었다. 시차를 이겨내는 최고의 특효약이 태양이라는 사실은 우주인들도 잘 알고 있다. 태양빛으로 채워진 ‘인류 문화문명의 핵(核)’을 첫 번째 시찰지로 원한다는 우주인의 요청이 들어왔다. 지구의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성(聖) 속(俗)이 공존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바람도 추가됐다.

황당한 가정이지만, 만약 우주인의 요청에 맞출 경우 어디가 제일 후보지로 떠오를까. 이집트·아프리카·이탈리아·그리스·멕시코·자메이카·일본 등 태양과 관련한 나라들이 리스트에 오를 듯하다. 하지만 자연과 성, 속 모두를 갖춘 곳은 아니다. 만약 필자가 우주인 지구 시찰 안내원이라면 강력 추천하고 싶은 곳이 하나 있다. 스페인, 그중에서도 수도 마드리드 한가운데 있는 ‘솔(Sol) 광장’이다. 태양의 열기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청춘들로 뒤엉킨 공간. 지구를 비추는 자연광이 가득한 공간이자 인류를 대표하는 청춘들이 모여드는 광장, 그리고 가톨릭 문화문명 중심지로서의 삼위일체 공간이 바로 솔 광장이다.

전 세계 청춘들이 몰려드는 태양의 광장

솔(Sol)은 스페인어로 태양이란 말이다. 솔 광장의 원래 의미는 ‘태양의 문(Puerta del Sol)’이다. 중세 마드리드 성벽 동문에 인접한 광장에서 유래됐다. 솔 광장과의 인연은 5년 전인 2014년 12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국영 방송국이 전국에 방영하는 신년축하 현장이 솔 광장이란 사실을 당시 처음 알았다. 한국으로 치자면 종로의 종각에 해당하는 셈이다. 12월 31일 저녁, 솔 광장에 들렀다가 혼쭐이 났다. 그 넓은 광장 전체가 숨 쉬기조차 힘든 인산인해였기 때문이다. 솔 광장 남쪽 우체국 건물 시계탑 종은 스페인판 보신각 종이다. 12월 31일 밤 12시, 시계탑 종소리가 12번 울려퍼진다. 전통을 따르는 스페인인이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포도알 12개를 종소리에 맞춰 먹는다. 신년 직전 12개 포도알을 먹어야 신의 축복이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페인 문화권인 남미에서도 똑같이 행해지는 전통이다.

마드리드공항에 내리는 순간 솔 광장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요리가 가능한 호스텔이 목적지다. 솔 광장은 스페인 전체는 물론 수도 마드리드의 최고 중심지다. 증거는 광장 내 우체국 앞에 새겨진 ‘제로 킬로미터(Zero Kilometer)’ 동판에 있다. 스페인 도로 표식 출발점이다. 솔 광장이 스페인 도로 표식의 기준점이란 의미다. 가령 운전 중 스페인 도로에서 200㎞란 숫자를 만날 경우 마드리드까지 200㎞라는 의미다. 스페인은 고대 로마 스타일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 맞춘 중앙집권식 표식판이다. 모든 길은 마드리드 솔 광장으로 통하는 셈이다. 솔 광장이 ‘제로 킬로미터’ 출발지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공항에서 직행하는 지하철이나 열차가 따로 없다. 솔 광장은 보행자 천국의 한복판에 있다. 버스가 있기는 한데 근처에 못 내리기 때문에 한참 걸어들어가야만 한다. 기차와 지하철을 번갈아 탄 끝에 겨우 ‘제로 킬로미터’ 근처 호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페인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인이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곳이 한낮의 솔 광장이다. 낮에 솔 광장에 나갔다가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태양의 위력과 마주친다. 여름이 아닌 겨울도 마찬가지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스페인에서 양산과 긴소매 옷은 필수품이다. 그러나 동양인과 달리 현지인들은 40도에 육박하는 여름 대낮에도 무덤덤하다. 솔 광장 중앙에 들어선 둥근 분수 주변은 항상 만원이다. 실버 세대로 채워진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달리 청춘들이 대부분이다.

‘곰과 딸기나무(el Oso y el Madroo)’는 솔 광장을 찾는 관광객이 가장 먼저 가는 ‘인증 샷’ 명소다. 셀카족이 볼 때 ‘마드리드=곰과 딸기나무’다. 광장 동쪽에 위치한 청동상으로, 마드리드 시정부를 상징하는 문양이기도 하다. 곰이 딸기나무 열매를 먹으려 기어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딸기나무는 전혀 생소한 과실수일 듯하다. 앵두 크기의 과실로 딸기처럼 붉기는 하지만 식감은 호박맛 스폰지로 느껴진다. 배의 석세포가 섞인, 달지 않은 사과맛의 과일로 지중해 연안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인증 샷’ 명소와 관련해 궁금한 것은 ‘왜 서울에는 글로벌 시민 모두가 동의할 만한 캐릭터가 없는가’라는 점이다. 남대문·동대문·경복궁·창덕궁·남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소가 떠오르긴 하지만, 외국인 모두가 단숨에 동의할 글로벌 명소는 아니다. ‘파리=에펠탑, 일본=아사쿠사 가미나리몬(淺草雷門), 뉴욕=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글로벌 캐릭터를 찾기 어려운 나라가 한국이고 서울이다.

솔 광장의 거리예술가들. ⓒphoto 유민호
솔 광장의 거리예술가들. ⓒphoto 유민호

거리예술가들이 수놓은 보행자 천국

솔 광장은 100m 길이의 반원형 공간이다. 가운데 두 개의 분수가 있고 중간에는 말을 탄 카를로스 3세 청동상이 서 있다. 18세기 중반 스페인 국력이 최정상에 달했을 당시의 계몽전제군주다.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통치한 당대 유럽 최고의 통치자다. 솔 광장은 동쪽이 프라도뮤지엄, 서쪽이 왕궁(Palacio Real de Madrid)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마드리드 체류 기간 중 하루에 두세 번씩 왕복한 곳은 광장에서 왕궁까지 이어진 약 1㎞의 길이다. 광장을 기준으로 하면, 아레날(Arenal) 거리를 통해 연결되는 보행자 천국 거리다. 햇볕을 막아줄 큰 천막이 드리워져 있고 유럽에서 가장 밀집된 거리예술가들의 무대라는 점 때문에 틈만 나면 찾았다. 글로벌 시대 덕분이겠지만 가게에서 파는 상품들이 거의 비슷하다. 굳이 마드리드가 아니더라도 살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로컬 분위기가 나는 희귀한 것은 극히 드물다. 스페인 음식이야 대만족이지만, 상품으로 제한할 경우 플라멩코·투우 관련 물건을 빼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거리예술가들은 그 같은 ‘글로벌 피로와 무감각’을 없애줄 청량제다.

양적 풍부함은 솔 광장에서 왕궁까지 거리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거리예술가의 수는 물론 퍼포먼스 종류도 다양하다. 뉴욕·로마·파리보다도 월등히 많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예술 공간이다. 대략 10m마다 하나씩 있다. 노래, 춤에서부터 악기 연주와 그림, 캐릭터 코스튬, 스포츠 연출, 무술경연, 인간조각에 이르기까지 백인백색이다. 하나씩 보면서 지나갈 경우 최소한 3시간은 필요하다.

마드리드 거리예술의 대표주자는 ‘동작 그만’ 인간조각(Human Statue)으로 대부분 솔 광장에 집중돼 있다. 유럽 어디에 가도 볼 수 있는 거리예술이지만 솔 광장의 경우 한층 더 진화된 모습으로 연출되고 있다. 요즘 거리예술의 대세로 떠오른 ‘인도풍 인간조각’에다 할리우드식 연출을 더한 스타일이다. 인도풍 인간조각이란 지팡이 하나만 잡은 채 온몸이 떠 있는 식의 연출을 의미한다. 마치 알라딘의 카펫처럼 보는 순간 놀라게 만드는 중력 무시 공중부양 인간조각이다. 솔 광장은 인도풍에서 한발 더 나간다. 중력 무시 공중부양을 우주의 괴물이나 스페인 전통 이미지로 연결시킨다. 신기함에다 할리우드식 펀(Fun)을 추가하는 셈이다. 인도풍 인간조각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할리우드 공중부양이다.

필자가 직접 봤지만 뉴욕·파리·로마의 경우는 인도풍이 대세다. 왜 솔 광장에서는 ‘펀’의 할리우드풍이 인기를 끌까.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인도와 무관한 스페인’에 있다. 역사적 아이러니지만 스페인은 인도 식민지와 전혀 무관한 나라다. 1492년 이뤄진 콜럼버스 대항해의 원래 목적은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얼떨결에’ 아메리카 대륙이 나타나면서 신대륙을 발견한다. 당초 신대륙이 인도인 줄 알고 원주민을 인디언으로 부르게 된다. 유럽의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화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다. 놀랍게도 스페인은 인도 진출을 도외시한다. 대신 포르투갈이 먼저 인도로 진출한다. 유럽 내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후에도 스페인은 인도를 멀리한다. 솔 광장에서 접한 인도풍 인간조각에 대한 무관심은 그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판다 코스튬과 신을 찬양하는 예술가들

판다 코스튬은 솔 광장 거리예술의 독보적인 존재다. 이유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형 캐릭터로 대략 높이가 5m 정도다. 워낙 크기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초대형 풍선같지만 사람이 안에 들어가 움직인다. 옆에 가서 사진을 찍는 순간 곧바로 누군가가 달려와 촬영비를 요구한다. 요즘은 거리 캐릭터 촬영에서 1유로를 던져줬다가는 모욕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1인당 5유로는 줘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가족 촬영의 경우 10유로는 기본이다. 판다 캐릭터를 보면서 흥미로운 것은 표정이다. 전혀 순진하지 않은, 탐욕에 찬 모습으로 비친다. 스페인은 중국이 추진하는 해상실크로드의 주요 대상지 중 하나다. 중국의 엄청난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부는 ‘아직’ 해상실크로드 계획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공산독재국 중국을 불편한 심기로 대하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40년간 지속된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염증과 후유증이 배경에 있다. 그러나 스페인이 영원히 중국을 멀리하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값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솔 광장에서 벗어나 왕궁 쪽 거리인 아레날로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면서 음악이 울려퍼진다. 바이올린, 아코디언, 기타 독주자,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 가수, 쾌걸 조로(Zorro) 가면을 쓴 3인조 악단, 춤과 노래로 어우러진 4인조 플라멩코 무용단, 전자기타로 시작하는 청바지 청년들의 프레디 머큐리 스타일의 하드록 공연….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펼쳐지고 있다. 관심 있게 본 음악은 실내악, 아니 실외악 합주단이다. 더블베이스·첼로·비올라·바이올린으로 구성된 현악 6중주단이다. 일단 실력이 대단하다. 거리가 아니라 당장 공연무대에 올라설 정도의 음악 실력이다. 관광객 수준을 고려해 귀에 익은 곡만 연주하지만 연습 도중에 잠시 들려준 파가니니 곡 하나만 봐도 특별하다. 연주가 끝난 뒤 서로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자 마드리드 한 동네에 사는 음악동호회라고 답한다.

노래와 관련해 인상 깊었던 것은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보여준 공연이다. 기타로 반주를 하며 부르는데 청중들 모두 합창을 하면서 두 사람을 격려했다. 노래에 맞춰 흔드는 시각장애인의 몸동작이 너무도 어색했지만, 스페인어 특유의 강한 악센트 노래가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주로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온 거리예술가가 솔 광장 주변에 많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국민 모두가 친밀감을 느끼는 나라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페인은 식량난으로 허덕여야만 했다. 파시스트 정권, 프랑코 총통을 제거하려던 미국의 경제제재가 주된 이유였다. 당시 국제미아로 고생할 당시 스페인을 도와준 나라가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Juan Pern)이다. 밀 무상원조를 통해 스페인 국민의 굶주림도 해결된다. 페론이라고 하면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언급되지만, 적어도 스페인 국민이 본다면 생명의 은인으로 풀이된다.

남미에서 온 거리예술가 중 특히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가톨릭 단체의 선교공연이다. 저녁 8시부터 하는 공연이지만 매일 지켜봤다. 성가와 춤으로 신을 찬양하는 공연이다. 젊은 남녀가 나와 큰 율동과 함께 흰 깃발을 흔들며 신을 찬양한다. 1시간 내내 지속된 엄청난 열정에 압도됐다. 전 세계 교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뜨거운 신앙이 솔 광장 전체에 넘쳐흘렀다. 예수가 말한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 실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남미 출신 예술가들을 통해 확인했다.

국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나 할까. 왕궁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예술도 조용해진다. 그림이나 1인 연주가 대세다. 앳된 모습의 스페인 어린이가 캐리커처 예술가의 모델로 앉아 있다. 젊은 부모가 옆에서 웃으라고 말하지만 아직 웃음을 배우지 않은 듯 입만 웃고 얼굴은 무표정하다. 주변 모두 박수를 치면서 웃음을 원하지만 반대로 어린이의 표정은 한층 더 어색해진다.

불과 10여년 전, 솔 광장에서 왕궁에 이르는 길은 청년실업자의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스페인이 국가부도 직전이란 얘기도 매일 전해졌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스페인은 유럽경제 모범생으로 급부상한 상태다. 독일 하향세를 받쳐주는 유럽경제의 구세주란 말도 들린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내수진작이 급성장의 원인이다. 주변에서 이젠 웃으라고 독려하지만 아직 웃을 수 없다고 말하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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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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