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서령. ‘노랑저고리’. 비단에 채색. 36×26㎝. 2018년
임서령. ‘노랑저고리’. 비단에 채색. 36×26㎝. 2018년

“어디 여자가 정초부터 남자보다 먼저 대문을 들어서? 재수없게!”

지난 설날이었다. 시어머니의 동생 부부인 시외삼촌 내외가 세배를 왔다. 운전을 한 시외삼촌은 주차하느라 늦게 들어오고 선물을 든 시외숙모가 먼저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가 대뜸 한 소리였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팔순 시누이한테 잔소리를 들은 손아래 올케도 이미 육십 중반이었다. 조카며느리 앞에서 핀잔을 듣는 것도 민망했던지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요즘 누가 그런 거를 가려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러자 시어머니가 버럭 역정을 내셨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여. 어른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어디서 말대꾸를 하고 그래?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니고 저 잘되라고 하는 소린디.”

자칫 험악해질 수도 있던 분위기가 “아, 예예. 알았어요, 알았어” 하면서 자리를 피해버린 시외숙모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 그날의 해프닝은 명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명절 때만 한정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뼛속까지 남존여비사상으로 무장한 시어머니의 레이더망에 걸려드는 순간 언제 어디서고 혀를 끌끌 차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그런 시어머니였으니 며느리인 나와의 갈등도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애가 좀 더 큰 다음에 하면 안 되겠냐?”

큰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 대전에 살고 계신 시어머니가 집에 오시더니 대뜸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귀한 장손을 길러야 할 며느리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싶은 나의 열망은 시어머니의 손자사랑보다 강했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바람에 오랫동안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불편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어머니가 아니었다. 둘째를 낳고 몇 달 후였다. 평소 내가 가고 싶었던 잡지사에서 기자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 포기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취재도 많고 마감 때면 밤늦게까지도 근무해야 하는데 두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도저히 어떻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맡기고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시대였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얘기다.

태어날 때는 우리 모두 귀한 생명

임서령(57)의 ‘노랑저고리’는 눈부시다. 그러나 눈물겹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는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옷고름을 만지고 있다. 붉은 댕기를 한 머리카락은 가느다란 세필로 무수하게 반복해 그렸는데 아이의 머리를 매만졌을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배경을 생략한 것은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초상화에서 흔히 쓰는 장치다. 인물을 묘사한 선이 특별하게 거칠거나 큰 변화가 없어도 아이의 모습이 돋보이는 이유다. 작가는 따뜻한 색과 꼼꼼한 붓질을 통해 인물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저런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엄마일 것이다. 작가는 붓을 드는 순간만큼은 엄마의 마음이 되어 아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더없이 고운 모습으로 단장한 아이의 웃음 속에는 앞으로 그녀가 헤쳐나가야 할 수많은 난관이 전혀 예측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이의 모습은 눈부시지만 눈물겹다. 우리가 저 미소를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그녀가 그린 여자들은 노랑저고리를 입은 어린아이부터 곱게 단장한 성숙한 여인, 나이 든 할머니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그녀의 여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이나 사회적 인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의 시각은 아니다. 그저 ‘여자라는 사람’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남자와 동권(同權)을 가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여자다. 작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여자라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작가가 그린 여인들은 자족적이고 독립적이다. 그래서 작품 속의 여인들을 보는 순간 의문을 갖게 된다. 저렇게 고운 여인들이 왜 눈물을 흘려야 할까. 저렇게 당당하고 멋진 여인들이 왜 손가락질을 당하고 차별을 받아야 할까. 그녀들이 겪어야만 하는 수모는 전부 그녀들 잘못일까.

‘노랑저고리’ 속에는 ‘첫딸은 살림밑천’이라 말하면서 남동생들을 위해 돈 벌어 오게 만든 윗세대의 억압이 들어 있지 않다. 딸이라서 버림받고 또 딸이라서 목숨 걸고 아버지를 살려야 했던 ‘바리데기 신화’의 딸 희생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있지 않아 다행스럽다. 그래서 ‘노랑저고리’는 눈물겹되 과거처럼 절망스럽지는 않다. 딸이라서 무조건 희생을 강요했던 시대가 아니라 그런 희생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자미상. ‘백자도6폭병풍(百子圖六幅屛風)’.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 74.8×46.3㎝. 국립고궁박물관
작자미상. ‘백자도6폭병풍(百子圖六幅屛風)’.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 74.8×46.3㎝. 국립고궁박물관

귀한 자식은 오직 아들뿐이다

‘백자도6폭병풍(百子圖六幅屛風)’은 수많은 아이들이 호화로운 장소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여섯 폭 병풍에 그린 작품이다.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노는 공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중층의 전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국적인 태호석과 기화요초가 만발한 정원은 마치 구중궁궐을 옮겨다놓은 듯하다. 정원의 조경수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소나무, 오동나무, 버드나무 등은 사람들이 욕망했던 상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한다는 상서로움을, 버드나무는 오리와 함께 그려 벼슬살이에 대한 기원을 담았다. 아이들이 물속에 들어가 서로 뺏으며 노는 연꽃은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아이들은 봄에서 겨울이 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어떤 놀이를 하고 있을까. 연꽃 따기, 원님 놀이(행차 놀이), 풀 싸움, 원숭이 놀이, 매화 따기 등을 하고 있다. 4폭에는 죽족(竹足)이라는 죽마를 타고 원님 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인다. 원님 놀이는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크게 출세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은 거의 ‘3등신’으로 보일 정도로 머리가 크다. 머리는 모두 양쪽으로 틀어올린 쌍계머리를 하고 있고, 옷은 청색과 적색·녹색 등의 중국식 전통 복장이다. 건물양식과 조경, 아이들의 백자도가 중국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도는 중국의 송(宋)대부터 영희도(嬰戱圖)라는 제목으로 그려졌고, 명청(明淸)대에는 동자유희도(童子遊戱圖)로 제작되었다. 중국의 영희도에서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 다닐 정도로 바글바글하다. 그러나 조선의 백자도에서는 한 장면에 7~8명에서 10명이 조금 넘는다. 대신 놀이 자체가 강조되었다.

백자도는 수많은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린 길상화(吉祥畵)다. 길상은 상서로운 일,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을 말한다. 백자도는 백동자도(百童子圖) 혹은 백자동도(百子童圖)라고도 부른다. 백(百)은 ‘많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숫자다. 그림 속에 등장한 아이들이 꼭 백 명이 아니더라도 그 수가 많으면 백자도라 할 수 있다. 백자도는 다산, 즉 자식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옛날 여인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대상은 ‘다자(多子)’ 또는 ‘다남(多男)’이었다. 오직 아들과 사내아이만이 그 대상이었을 뿐 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 백자도는 남자아이들만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여자아이들을 그렸다 해도 백자도라 부르지 않았다. 길상화는 더더욱이 아니었다. 아들도 아니고 겨우 딸을 낳았을 뿐인데 무슨 상서로운 일이라고 길상화라 부르겠는가. 조선시대에는 여자아이들을 그린 백자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백자도가 아니라 ‘일녀도(一女圖)’도 없다. 그나마 신한평이나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있다거나 아들에게 밀려 내박쳐진 여자아이들일 뿐이다. 임서령의 ‘노랑저고리’처럼 여자아이를 독립적으로 그린 인물화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은 전통시대에 가장 절실하고도 간절한 기원이었다. 백자도는 주로 병풍으로 제작되어 혼례용 치장 그림으로 많이 쓰였다. 처음에는 왕실의 가례(嘉禮)나 사대부가의 혼례식에서 치장용으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그 전통이 일반 백성들의 여염집에까지 파급되었다. 백자도가 혼례식에서 쓰였다는 것은, 남녀가 합방하는 첫날부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갖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기왕 아들을 낳으려면 그 아들이 건강하게 잘 크기를 바랐다. 출세를 해서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재물도 풍부하면 금상첨화다. 그런 바람과 욕망을 그림 곳곳에 상징적으로 그려 넣었다. 백자도가 다남에 대한 기원을 넘어 부귀영화와 평안한 삶에 대한 ‘멀티풀’한 기복화로 발전하게 된 이유다.

백자도가 멀티풀한 기복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필요했다. 그 모델이 바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였다. 곽분양의 이름은 곽자의(郭子儀·697~781)다. 그는 중국 당(唐)대의 명장(名將)으로 국가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분양(汾陽)이라는 지역의 왕으로 봉해졌다. 그래서 곽자의라는 이름 대신 곽분양이라는 직함으로 더 많이 불렸다. ‘곽장관’ 혹은 ‘곽도지사’와 같이 한번 장관이면 영원한 장관 타이틀을 부여한 것과 마찬가지다. 곽분양은 사람이 누려야 할 모든 복을 전부 누렸다. 만고의 충신이라는 명예로 칭송받았고,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85세까지 장수했다. 자식복도 많아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 즉 ‘팔자칠서(八子七壻)’를 두었는데 그들 모두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 곽분양은 부귀, 다남, 장수, 명예 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온전히 누린 사람의 ‘아이콘’이었다. 백자도는 곽분양행락도에서 아이들 부분만 따로 떼어내 독립적으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혼인에 쓰는 병풍에는 백자도나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瑤池宴圖)를 그린다’고 되어 있다. 요지연도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자신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의 연못인 요지(瑤池)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그 연회를 축하하기 위해 불교의 불보살과 도교의 신선들이 총출동한 것만 봐도 요지연도가 길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최고의 복락을 누린 곽분양을 넘어 신선들까지 축복을 해주는 ‘사내아이의 탄생’은 조선시대 여인들의 최우선 순위 소원이자 의무였다.

조선시대에 아들 낳기를 갈망했던 정서는 남아선호사상에서 출발한다. 노후가 보장되지 않았던 농경사회에서 아들이야말로 확실한 노후대책이었다. 그러니까 남아선호사상은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달라는 특혜이자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적인 혈통주의가 대가족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씨족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자 집안의 바람막이며 사회적 활동의 대행자였다. 다른 집안으로 가버리는 딸 대신 아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안전장치이자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충분조건이었다. 그런 담보물을 낳았으니, 아들 낳은 여자들은 당당하게 젖가슴을 내놓고 다닐 수 있었다. 아들의 돌 사진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꼭 아랫도리를 벗겨 고추를 드러내고 찍었다. 봐라. 나도 아들을 낳았다. 이런 뜻이었다.

근현대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가수 도성아가 1958년에 부른 자장가 ‘금자동아 은자동아’의 가사도 오로지 아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가사 내용은 이렇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삼대독자 외자동아/ 나랏님께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자동아/ 삼정승 육판서에 꿈도 버리고 대대로/ 물려받은 이 가문을 지켜야 한다’. 이 노래가사에서 강조된 것은 가문이다. 남자아이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는 힘이 필요없다

“아빠, 지금 그거는 남녀 성차별적인 발언인 거 아시죠?” 운전을 하던 남편이 앞차를 보면서 “저러니까 여자들이 운전하면 욕을 먹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아빠를 향해 던진 말이다.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마음이 환해졌다. ‘얘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아지겠구나.’ 그런 안심과 믿음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시어머니가 될 여성들의 사고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내가 시어머니한테 당한 만큼 내 며느리에게도 똑같이 되갚아주겠다던 사고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 또한 아들만 둘이다. 언젠가는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나의 며느리에게는 내가 겪었던 시집살이 같은 것은 결코 겪게 하지 않을 것이다. ‘노랑저고리’의 주인공이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부터 하는 일도 시키지 않을 것이다. 며느리를 시댁에 일하러 들어온 ‘무수리’로 취급하는 대신 내 아들만큼 귀한 인격체로 대우할 것이다. 내 며느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여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이 더 이상 핸디캡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혈통에 대한 의식이나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많이 희박해졌다. 전쟁이나 약탈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했던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데는 그다지 큰 힘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여성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토론의 전면으로 내세운 ‘82년생 김지영’의 출현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보다 훨씬 현명한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그래서 더욱 인간답고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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