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유. ‘마릴린 먼로(케네디)’. 캔버스에 유채. 194×155㎝. 2012년
김동유. ‘마릴린 먼로(케네디)’. 캔버스에 유채. 194×155㎝. 2012년

내가 본 것은 진실일까? 착각한 것은 아닐까?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을 외면해버린 편파적인 시각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래전에 읽은 기사 때문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근태 전 의원(1947~2011)의 얘기다. 김 전 의원이 1994년에 택시를 타게 되었다. 이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와 합승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들이 김 전 의원을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이근안씨 아니세요?” 그녀들은 당시 뉴스와 언론매체를 통해 수시로 접한 ‘김근태와 이근안’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이 항상 같이 따라 나왔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누구인지조차 헷갈렸을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금세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착각한 것을 보면 그녀들이 아는 내용은 가십거리 정도였을 것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근안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를 8차례나 전기고문한 고문기술자였고, 김근태는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민주투사였다. 그런 두 사람의 신분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바꾸어버렸으니 그 말을 들은 피해자의 심정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아는 상태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아 생긴 문제다.

이것을 착시현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헛것을 봤다는 뜻이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헛것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날파리증에 걸린 사람은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허공에 먼지나 날파리 같은 것들이 떠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비문증이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손을 저어 허공의 날파리를 잡으려 해도 파리는 잡히지 않는다. 날파리는 허공이 아니라 자신의 눈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날파리증에 걸린 사람은 계속해서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한다. 비문증은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을 때도 발생하는 굉장히 흔한 질병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김동유(54)가 그린 ‘마릴린 먼로(케네디)’는 ‘보는 것’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마릴린 먼로가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먼로의 얼굴은 수많은 작은 케네디의 얼굴들이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픽셀(pixel) 같은 1225개의 케네디 얼굴이 군집을 이뤄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의 얼굴은 하나가 되었을까? 같은 시대를 살았고, 불륜스캔들도 있었다고 하니 그 사실을 폭로하기 위한 작품일까?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녀가 출연한 영화 ‘7년 만의 외출’(1955)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먼로가 지하철 통풍구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허벅지를 드러낸 장면은 세기의 섹시스타를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반면 케네디는 당시 미국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대통령이었다. 그의 인기는 1960년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으십시오”라고 기염을 토할 때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해 1963년에 암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니 암살된 이후에도 여전했다. 그 두 사람의 이미지만큼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내가 누리지 못한 상류사회의 선남선녀들로 부와 권력과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마릴린 먼로는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아는 것처럼 머리는 비고 백치미만 있는 그런 형편없는 영화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독파한 독서가였고, 톨스토이를 비롯한 대가들의 저서를 수백 권 소장할 정도로 지적이었으며, 베토벤을 즐겨 듣는 수준 높은 클래식 매니아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실재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드러난 것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김동유는 ‘마릴린 먼로(케네디)’처럼 얼굴 속에 얼굴이 들어 있는 ‘이중 그림’으로 파란을 일으킨 작가다. 그는 대중적인 스타나 유명인의 얼굴을 ‘더블 이미지’로 결합해 더 강한 이미지로 전환하거나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에는 김일성이, 쿠바의 체 게바라 얼굴에는 카스트로가,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 얼굴에는 마릴린 먼로가 들어 있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성이 있어 더 강한 이미지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엇갈리듯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작가가 유명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유명하기 때문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일단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경계심을 푼다. 그렇게 마음을 푸는 찰나 작가는 곧바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알고 있는 먼로는 진짜인가? 당신이 알고 있는 케네디는, 게바라는, 마오는, 그리고 박정희는 진짜 그들인가? 굉장히 낯설고 당황스러우면서 철학적인 질문이다. 작가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 모두 한 시대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떠들썩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 무엇도 시간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현재 김동유는 유명인들의 이중 그림에서 회화 이미지에 균열이 가는 ‘크랙’ 작업을 하고 있다. 오래된 명화가 시간에 의해 금이 간 듯한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시간의 풍화작용에 대한 사유와 질문을 던진다.

(왼쪽부터)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4㎝. 루브르박물관 / 작자미상. ‘비로자나불도(毘盧遮那佛圖)’. 13세기 중반. 비단에 채색. 162×88.2㎝. 일본 후도인(不動院)
(왼쪽부터)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4㎝. 루브르박물관 / 작자미상. ‘비로자나불도(毘盧遮那佛圖)’. 13세기 중반. 비단에 채색. 162×88.2㎝. 일본 후도인(不動院)

부처 속의 부처-우주의 중심

김동유의 더블 이미지를 보는 순간 고려시대의 불화 ‘비로자나불도(毘盧遮那佛圖)’가 떠올랐다. 고려 불화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작품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중앙에는 큰 원이 그려져 있고, 비로자나불은 그 원 안에 앉아 있다. 화면 바깥까지 뻗어나간 큰 원은 부처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빛, 신광(身光)이다. 신광 안에서 부처는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돌리고 두 손으로 오른쪽 무릎을 감쌌는데 머리 뒤의 두광(頭光)이 신광과 보조를 맞춘다. 화면 상단에는 ‘만오천불(萬五千佛)’이란 글씨가 적혀 있고, 그 아래로는 조금 더 작은 글씨로 ‘대평(大平)’이라고 쓰여 있다. 글자 중간 부분에 떨어져나간 흔적이 있지만 글자를 읽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림 안에 ‘만오천불’을 그려 넣었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경에 특이한 문양들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얼굴과 팔 등 신체가 드러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부처님이 입은 법의(法衣), 주변 공간, 글자가 쓰인 곳까지 모두 작은 화불(化佛)들로 가득 메우고 있다. 심지어는 그림의 테두리 부분까지도 화불로 채웠다. 화불은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해 나타나는 모습이다.

비로자나불도는 불교의 진리를 부처의 몸인 법신(法身)으로 그린 그림이다. ‘비로자나’는 ‘광명이 두루 비친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광명을 온 누리에 두루 비치게 하여 모든 이들을 이끌어주시는 부처님이다. 즉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이것을 근거로 해서 나오게 하는 원천적인 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색깔이나 형체가 없는 우주의 본체이자 진여실상(眞如實相)이다. 형체가 없으니 설법도 말로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한다. 침묵으로 하는 설법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각각의 털구멍에서 화불이 구름처럼 나와 신기하게 모든 시방세계를 가득 채운다’고 되어 있다. 그곳에서 나온 무수히 많은 화불들이 비로자나불의 무량한 광명에 의지해 연꽃을 뿌리며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 대신 설법한다. 이때 모든 존재들은 장엄한 연꽃으로 피어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이룬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에서 주불(主佛)로 모시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비로전(毗盧殿)이라 부른다.

‘비로자나불도’는 화엄경의 경전 내용을 바탕으로 그렸다. 비로자나불의 털구멍에서 화불이 구름처럼 나온 모습을 부처의 옷과 허공과 글자와 글자 테두리에까지 그려 넣었다. 부처의 세계가 가득 채워져 나가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면 하나에 ‘만오천불’을 압축해서 그려 넣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불(佛)’ 자로 대신했다. 그러니 비로자나불 속에 화불을 배치한 이중 그림은 경전의 내용을 함축한 최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과일과 채소로 만든 황제의 얼굴

이중 그림의 흔적은 서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형식으로 그려진 그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고도 이색적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화가들의 사유구조가 이렇게도 비슷할 수 있을까? 놀랍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의 ‘여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 초상화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위스 인근 지역에서 힘을 규합하더니 오스트리아로 발을 넓힌 후 스페인 지역까지 뻗어나간 유럽의 근성 있는 가문이었다. 카를로스 대제라 부르는 카를 5세가 대표적 인물이다. 아무튼 이런 ‘한 권력’하는 가문의 황제 얼굴을 그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이상하다. 얼굴은 복숭아, 오이, 가지, 마늘, 콩 등의 과일로 그렸고 머리 위는 포도, 버찌, 호박, 밀 등으로 그렸다. 반면에 목 아래로는 짚과 밀, 이삭으로 그렸는데 얼굴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이다. 정물화를 그리던 뛰어난 기교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여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린 4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아르침볼도는 4부작을 그리면서 황제의 얼굴을 각 계절에 맞는 과일과 곡식, 채소로 그려 넣었다. 황제의 초상화로 사계절을 그린 것은, 그의 통치로 논과 밭에서 나는 곡식과 과일 등이 풍요로워지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말하자면 황제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선전화다. 다만 그 선전이 너무 노골적이면 반감을 살 수 있으므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소재에 익살과 해학을 담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 태생으로 합스부르크 왕궁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정교하고 세밀한 정물화에 매우 뛰어났다. ‘여름’에서 목의 테두리 부분에 자신의 이름 ‘GIUSEPPE ARCIMBOLDO’를 새겨 넣었고, 어깨에는 작품의 제작 연도인 ‘1563’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그 솜씨가 얼마나 옷감의 질감을 잘 살렸던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눈속임이 재미있었던지 그는 10년 후인 1573년에 다시 막시밀리안 2세를 주인공으로 한 4부작 초상화를 제작한다. 그런데 그 4부작 중 ‘겨울’은, 스산한 계절의 특징을 감안한다 해도 황제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괴이하게 그려져 있어 늘 술에 절어 살았던 황제의 진면목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 같다. 이 작품들이 단순히 황제를 예찬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인생의 사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아르침볼도의 ‘여름’을 보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과일인가? 황제인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비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그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 바른 견해다. 바른 견해란 자기와 세계를 보는 올바른 가치관을 의미한다.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 잘 봐야 한다. 무엇을 보라는 말인가. 지금 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문제의 본질을 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궁극으로 삼는 성불(成佛·부처를 이루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견성(見性)에서부터 시작된다.

불교에서만 보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에도 견(見)이 나온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노자는 워낙 허풍이 센 분이라 대충 들으면 헛소리하는 것 같은데, 곱씹어보면 그게 인생의 진리를 얘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그 너머의 세계까지 들어가라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눈감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百聞不如一見)’는 말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 잘 봐야 하는가? 잘 보지 않으면 헛것을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헛것만을 보고 사는 인생은 인생 그 자체가 헛것이다. 김동유와 고려 불화와 아르침볼도의 작품 세부를 보면 보이는 것 너머 진짜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나이가 드니 시야가 흐려져 정확히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정확히 볼 수 없는 것을 정확하다고 얘기하려니 자꾸 목소리가 커지고 고집만 피우게 된다. 혹은 보는 것도 귀찮아 그마저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과거에 봤던 기억을 되살려 주야장천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를 외쳐 댄다. 조심해야겠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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