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씨쏜. ‘유유자적’. 한지에 채색. 52×52㎝, 2018년
루씨쏜. ‘유유자적’. 한지에 채색. 52×52㎝, 2018년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 한다. 한마디로 출세하는 것이다. 출세는 유교사회에서 사대부가 도달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입신양명이란 단어는 ‘효경(孝經)’에 나온다. ‘효경’은 공자(孔子)의 제자 증자(曾子)가 쓴 책이다. 비록 증자가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전체 내용은 공자의 가르침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효경’의 저자를 제대로 밝히려면 ‘공자 저(著), 증자 편(編)’이라고 쓰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효경’에서 공자님은 입신양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이 문장에서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리는 것’이 바로 입신양명이다. 그 앞에 있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문장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불감훼상’해서는 안 되는 몸에는 간, 폐, 심장뿐만 아니라 머리카락, 손톱, 발톱도 포함된다고 여겼다. 김홍집 내각이 1895년에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했을 때 사람들이 “손발은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도 바로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문헌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결국 단발령은 시행되었지만 김홍집은 살해되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전 국민을 불효자로 만들겠다고 함부로 가위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도대체 효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공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는 사람이 제일 존귀하고, 사람이 하는 일로는 효도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맹자 또한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여긴 요순(堯舜)의 도(道)를 ‘오직 효제(孝弟)’뿐이라고 단언했다.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요순의 도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중요한 효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로부터 시작해 ‘입신양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이 둘이야말로 효의 알파와 오메가라 할 수 있다. 입신양명의 첫 번째 관문이 과거합격이다.

김홍도. ‘포의풍류도’. 종이에 연한 색. 27.9×37㎝. 개인
김홍도. ‘포의풍류도’. 종이에 연한 색. 27.9×37㎝. 개인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오랜만에 편안한 그림을 만났다. 귤이 탱글탱글 익어가는 늦가을에 제주도에 내려왔다. 직장도 그만두고 출근할 일도 없으니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전부 놔둔 채 몸만 내려왔다. 한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한 달 살기’를 실천해볼 예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도 데려와 함께 지내며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나 자신을 점검해봐야겠다.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다가올 미래를 겸손하게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봐야겠다. 루씨쏜(35)의 ‘유유자적’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회화 3점을 합성해서 만들었다. 정선의 ‘독서여가’와, 김홍도의 ‘포의풍류’, 그리고 신윤복의 ‘연당야유도’다. 향나무가 있는 선비의 서재는 정선의 ‘독서여가’에서, 사방관을 쓰고 비파를 연주하는 선비는 김홍도의 ‘포의풍류’에서, 그리고 거문고를 타는 여인은 신윤복의 ‘연당야유도’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인물을 그리는 선이나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가 얼마나 절묘하던지 원래부터 한 작품인 듯 자연스럽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가들의 작품을 ‘감히’ 한 화면 속에 결합하려고 생각한 그 발상도 대담하지만 그 인물들을 서로 겉돌게 하지 않고 녹여낸 것도 대단하다. ‘유유자적’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들도 몇 개 보인다. 오른쪽 기둥 아래 세워져 있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간판이 대표적이다. 피리를 불거나 부채를 들고 있거나 서 있는 고양이들은 마치 인간들이 연주한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다. 마당에 앉아 있는 네 마리 고양이는 사람과 반려동물이 이루어낸 화음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장소성과 시간성을 알려주는 장치도 설치되어 있다. 담장은 구멍이 숭숭 뚫린 돌 현무암으로 쌓았고 그 뒤에 귤과 야자수가 서 있다. 이곳이 제주도라는 장소성과 계절적으로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이라는 시간성을 짐작게 해주는 상징물이다. 루씨쏜은 과거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시간적인 거리감을 일시에 제거해버리는 재주가 있는 작가다.

‘유유자적’ 속에 등장하는 선비는 자족적이다. 한때 입신양명을 위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지금은 낙향해 보통사람으로 돌아왔다. 공직에서 물러났으니 업무에서 해방되었고, 업무 때문에 허둥거렸던 시간을 온전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 진즉 그만둘 것을. 그런 후회가 새록새록 들 정도로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다. “배부른 소리 하시네요. 그래도 ‘법카’ 쓰는 재미가 있는데 자연인으로 살아보세요. 그런 재미를 누릴 수 있나. 밥 한 끼 먹는 것도 전부 돈인데….”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진짜 모른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도장을 찍어야 하는 사람의 비애를. 이제 더 이상 그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을 살 것이다. 사람이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알아야 진짜 인생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신윤복. ‘연당야유도’. 종이에 연한 색. 28.2×35.2㎝. 간송미술관
신윤복. ‘연당야유도’. 종이에 연한 색. 28.2×35.2㎝. 간송미술관

출처,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병기 시인의 ‘낙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낙화(落花)는 꽃이 시들거나 말라서 떨어지는 것이다. 다음 구절이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로 이어진 것을 보면 분명히 꽃이 떨어지는 것을 묘사한 시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에 자꾸만 눈길이 멈춘다. 이 시는 단순히 꽃이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출처(出處)’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출처는 ‘사물이나 소문 따위가 생기거나 나온 곳’을 뜻한다. ‘자금 출처’니 ‘소문의 출처’니 할 때 바로 그 출처다. 이 뜻이 조금 더 발전하면 입신양명과 관련된 출사(出仕)와 은퇴(隱退)로 연결된다. 이때의 ‘출(出)’은 벼슬한다는 뜻이고, ‘처(處)’는 벼슬을 하지 않고 물러가는 것을 뜻한다. 공직에 나가 바른 뜻을 펼치는 것이 출이라면, 여의치 않아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처다. 때에 맞춰 출처진퇴(出處進退)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출처 문제에 있어 어떻게 하면 선비로서의 인격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리에도 어긋나지 않을까 항상 고민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사군자(士君子)의 큰 절조(大節)는 출처 한 가지에 있을 따름이다”고 강조했다. 사군자는 사대부를 뜻한다. 출처를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대충 사대부의 노선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도 출처에 대해 언급했다. “사군자의 도는 출사하기도 하고 은퇴하기도 하며, 침묵하기도 하고 발언하기도 한다.(士君子之道 或出或處 或默或語)” 여기에서 나온 출처어묵(出處語默)은 사람이 처세하는 데 근본이 되는 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어묵이야말로 군자의 도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도 힘들지만, 세상에 나가야 할지 혹은 물러서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어느 지점에서 나아갈 것인가. 어느 순간에 물러서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전 생애가 결정된다. 마땅히 나가야 할 때 주춤한다거나 물러서야 할 때 발을 빼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뒤바뀔 수도 있다.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屈原)은 ‘어부사(漁父辭)’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고 하였다. 여기에서 ‘갓끈을 씻는다’는 뜻으로 탁영(濯纓)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속된 인간 세상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갓끈을 씻을 것인가, 발을 씻을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물의 깨끗함과 탁함에 달려 있다. 물이 깨끗할 때는 나아가 벼슬을 해야 하지만 물이 흐리면 물러나 은거하는 것이 출처지의다.

그런데 말이 쉽지 출처를 결정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다. 출처의 시기를 제대로 아는 것을 ‘중용(中庸)’에서는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했다. 시중이란 출처와 거취를 타이밍에 맞게 적절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때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것을 도라고 부른 것만 봐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시중은 상황에 알맞게 하는 것이다. 시중지도에는 과불급(過不及)이 없어야 한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시중을 가장 잘한 인물로 공자를 꼽는다. ‘논어’ 술이에는 공자가 제자 안연(顔淵)에게 말한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다. “등용되면 도를 행하고, 등용되지 않으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로구나.(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여기에서 나온 ‘용행사장(用行舍藏)’ 혹은 ‘용사행장(用舍行藏)’은 출처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공자가 55세의 늦은 나이에 자신의 도를 받아줄 수 있는 군주를 찾아 기약 없이 헤맸던 이유도 바로 시중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벼슬이 아니라 자신의 도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출처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조 없이 높은 자리만을 탐하는 사람들은 결코 행할 수 없는 신념이었다. 제발 좀 떠났으면 하는데도 절대로 안 떠나고, 아쉬울 것 없다는데도 거듭 뒤돌아보는 요즘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시중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학자들이 이렇게 출처를 중시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사를 하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에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공효까지 더해져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봤다. 수기치인에 바탕한 학문적인 뒷받침과 냉철한 세계관을 갖추는 것이 출사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사대부들의 출처에 대한 기본 관념은 이처럼 훌륭했지만, 모두 다 훌륭하게 실천하지는 않았다. 출처가 중요한 줄은 알지만 누군가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처보다는 출 쪽에 가서 줄을 서고 싶어 했다. 기왕 출 쪽에 줄을 설 생각이라면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출사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종남첩경(終南捷逕)’이다.

당(唐)나라 때의 얘기다. 노장용(盧藏用)이란 사람이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자 세상 사람들이 그를 경모(敬慕)하여 그의 이름이 높이 알려졌다. 그 결과 노장용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노장용의 마음을 예리하게 간파한 도사(道士) 사마승정(司馬承禎)이 한마디 거들었다. “종남산이야말로 벼슬길에 오르는 첩경이로구먼.” 이때부터 종남첩경은 은거하여 명성을 얻고 그 명성으로 벼슬을 구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은 벼슬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 마음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속 보이니까 은거하는 척하면서 벼슬길로 나가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컴백할 때가 언제인가’를 더 정확히 아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경멸했던 부류에 속한다.

조선시대 진짜 선비들은 벼슬을 하다가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기의 뜻을 거두어 속에 감추고 낙향했다. 그것이야말로 ‘수지부모’한 ‘신체발부’를 진정으로 ‘훼상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신양명보다 더 중요한 효가 바로 출처였다.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에 내려온 선비가 비파를 연주하며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정선. ‘독서여가도’. 종이에 채색. 33.5×29.3㎝. 간송미술관
정선. ‘독서여가도’. 종이에 채색. 33.5×29.3㎝. 간송미술관

준비되지 않은 출세

입신양명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좋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출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서경(書經)’에서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지위를 얻으면 교만하려 하지 않아도 교만해지고, 녹(祿)을 얻으면 사치하려 하지 않아도 사치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끊임없이 신독(愼獨)을 강조했다. 남이 보는 곳에서는 물론 혼자 있을 때조차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분수에 차서 넘치게 될 근심이 없고, 길이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영혼을 팔면서까지 하는 입신양명은 효가 아니다. 잘못하면 부모의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들의 앞길까지 막아버리는 것을 최근에도 자주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진정한 입신양명은 무엇일까. 후기 성리학자인 윤증(尹拯·1629~1714)은 이렇게 말한다. “입신양명이란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는 것만이 아니다. 학업을 성취해서 우뚝이 거유(鉅儒)가 되어 가문을 빛내는 것이 이른바 효(孝)라고 할 수 있다.” 오늘도 소신 있게 살아가는 수많은 자연인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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