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正初)이건만 우울한 뉴스뿐이다. 특히 지난 연말 국회는 제1야당을 배제한 채 주요 법률을 제·개정했다. 이처럼 정치적 타협이 완전히 실종된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 일깨워주는 통찰이 있다. 바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Upheaval·2019)이다. 이 책은 위기 극복을 통해 대변동을 달성한 사례들을 분석하고, 거기로부터 공통적인 교훈을 추출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호주의 과거 경험을 돌아보고 이어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세계의 미래 과제를 짚어본다. 핀란드는 소련의 제2도시 레닌그라드의 코앞에 위치한 소국이다. 1939년 소련은 핀란드 영토의 일부 할양을 요구했다. 핀란드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곧바로 소련이 침입했다. 전쟁은 1941년에도 재발했다. 핀란드는 매번 영웅적으로 싸워 러시아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자신도 엄청난 희생을 면치 못했다.

핀란드는 자유주의 체제로 독립국가를 이루면서도 공산주의 초강대국인 소련과 공존하는 방안을 절실하게 모색했다. 그들은 물밑에서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면서 절대로 소련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진정성을 전달하려고 부심했다. 이를 두고 서방에서는 경멸조로 ‘핀란드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전략이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의회의 결정으로 대통령 선거를 연기하기도 하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언론들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자발적 검열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방과의 유대도 공고히 했다. 소련 역시 핀란드를 아예 위성국으로 만들기보다 서구의 창(窓)으로 활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함대를 맞아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더 이상 쇄국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국가 개조에 나섰다. 무엇보다 정신이나 문화는 일본적인 것을 유지한 채 서양의 행정·군사·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핀란드와 메이지 일본은 외부충격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전형적 사례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정직하고 현실적이었다.”

칠레는 민주주의 전통이 비교적 확고한 나라였다. 그러나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인해 참혹한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민주저항세력들은 17년 만에 다양한 제휴를 통해 독재체제를 종식시켰으나 군부를 의식해 점진적이고 타협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참극이 벌어졌으나 이에 대한 반성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나라는 양상은 달라도 내부적 위기에 대처한 전형적 사례다.

독일은 냉전이 도래하자 연합국에 의해 재무장을 재촉받았다.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는 이를 이용해 우선은 경제 부흥에 매달렸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나치에 대한 고발과 재판을 통해 스스로 과거와 단절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1968년 학생시위를 겪고 이듬해 최초로 좌파 총리가 탄생했다.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며 동구 국가들과 실질적인 화해를 시도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브란트의 현실적 정책은 계승되어 훗날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호주는 오랫동안 영국을 이상적인 모국으로 여겼다. 이른바 백호(白濠)주의를 고수하며 영국을 위해 유럽까지 달려가 싸웠다. 그러나 영국은 차츰 호주의 방패막이가 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호주는 독립적인 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독일과 호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내부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전형적 사례다.

한편 오늘날 일본은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국채 증가, 여성의 열악한 지위, 출산율 저하, 고령화 등에서 단점도 있다. 더구나 이민을 외면하고 역사적 반성을 회피하고 해외자원을 무차별 남획한다. 이처럼 현대 일본은 이기적으로만 행동할 뿐 정직한 자기성찰을 거부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10년 후의 일본이 암울하다는 것이 저자의 전망이다.

미국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다. 적극적인 이민정책, 굳건한 민주주의, 확고한 연방제 등이 주는 이익도 막대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장점은 정치적인 타협의 전통이다. 그것은 다수에 의한 폭정과 좌절한 소수의 무력함을 동시에 예방하거나 축소해주는 장치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타협의 악화다.

무엇보다 치솟는 선거비용이 병폐다. 이로 인해 정치가는 거액을 내는 소수 기부자에 의존한다. 지역별로 유권자 성향은 뚜렷이 갈려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극단적 주장이 더 효과적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채널이나 매체의 다양화가 오히려 각자 선호하는 ‘틈새 정보’만 골라 보는 편향성을 낳고 있다. 휴대전화 등을 통해 ‘나홀로’ 활동이 증가하는 것도 문제다.

정치적 타협의 악화 이외에도 투표율 하락, 불평등 방치, 미래투자 결여 등이 미국의 또 다른 과제들이다.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위기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미약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 보호에 급급하고 다른 국가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오만과 약점으로 인해 미국은 자신의 다양한 이점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세계는 핵무기 폭발, 기후변화, 자원고갈, 불평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초유의 지구적인 과제다. 아쉽게도 세계는 국가보다 위기를 인정하고 극복하기가 더 어렵다. 다행히 양자간 또는 다자간 협약이나 EU·UN 등을 통해 부분적인 성과도 거두지만 여전히 미진하다. 지금은 희망과 파괴가 교차하는 혼란기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조만간 결론이 날 테고, 그때까지 이제 수십 년밖에 남지 않았다.”

저자는 우리에게 핀란드의 경험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최근에 34세의 세계 최연소이자, 여성 총리를 배출한 핀란드는 위기 앞에서 유연한 정치적 타협을 발휘하곤 했다. 그들은 이웃한 대국의 위협을 받으며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다양한 선택안을 고려한 끝에 냉정한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급 인사가 상대 측과 끊임없는 물밑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되 “그런 일을 밖으로 떠들어대거나 홍보하지 않았다”.

‘대변동’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풍부한 영감을 선사한다. 나아가 정치적 타협을 발휘해 국론을 한데 결집하는 나라는 위기 극복에 성공한다는 교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저자의 고백처럼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한’ 것을 무시하여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저자는 현실이 아무리 혹독해도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강조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인가. 솔직한 자기 평가는 보이지 않으며 네 탓만 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없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 과거의 경험이나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려는 진지함도 없다. 우리의 핵심가치는 무엇이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혼란스럽다. 심지어 코앞의 위협인 북핵을 놓고도 중구난방이요, 속수무책이다. 성공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유연한 선택을 구사했다. 동북아의 약자인 우리야말로 유연해야 살아남는다. 그럼에도 불길한 파열음을 내며 선택권을 스스로 옥죄고 있다. 한국은 어느 일방을 파멸시켜 국력을 모으기 불가능한 나라다. 정치적 타협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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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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