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금인명배(金人銘背)’ 공자성적도, 조선 1742년, 종이에 색, 39.6×28.7㎝,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금인명배(金人銘背)’ 공자성적도, 조선 1742년, 종이에 색, 39.6×28.7㎝, 국립중앙박물관

막말의 시대다. 막말이 인터넷상에서 문자로 전환되면 ‘악플’이 된다. 악플은 ‘악성 리플(reply)’의 준말로 ‘인터넷상에서 상대방이 올린 글에 대한 비방이나 험담을 하는 악의적인 댓글’을 말한다. 악플은 언어폭력이다. 분명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범죄라서 악플러는 자신의 막말(글)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냥 험담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자신도 한마디 거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카더라’라고 한 말이 무슨 범죄가 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 마치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다는 식이다. 악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글에 의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그냥 마음 상하는 정도의 상처가 아니다. 자살로 내몰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회복 불가능한 상처다.

최근에 설리, 구하라 등의 아까운 연예인들이 악플에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까짓 욕 몇 마디 얻어먹었다고 목숨까지 끊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욕을 먹어도 충격을 받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일제히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한다고 생각해보라. 더구나 인터넷상에 올라온 글은 글쓴이가 지우지 않는 한 사라지지도 않는다. 24시간 내내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 당사자는 얼마나 격렬한 심적 부담을 느끼겠는가. 이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이런 폭력은 끝내야 한다. 누군가는 악성 댓글 해결 방안으로 인터넷 실명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옛 선인들이 얼마나 막말을 경계했는가를 살펴보면서 현재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자.

입을 세 번 봉한 동상이 의미하는 것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주(周)나라의 태조인 후직(后稷)의 태묘(太廟)에 들어갔다. 태묘의 섬돌 앞에는 동상이 서 있었는데 그 사람의 입이 세 번이나 봉해져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는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라고 시작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은 이어서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함이 많으니라. 진실로 말을 삼가는 것이 복의 근원이로다. ‘입이 어찌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으리오?’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문이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본 공자는 제자들에게 “‘시경’에서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마치 깊은 못에 임한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고 했다. 자신의 몸가짐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입으로 인한 화를 입을까 걱정하겠느냐”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함구 또는 신언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일화다. ‘전전긍긍하고 여림심연하고 여리박빙해야’ 하듯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입 다물기’다. 공자의 이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삼함(三緘)’ 또는 ‘삼함명(三緘銘)’은 ‘말을 삼가라’는 의미로 알려지게 되었다.

공자가 말조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에피소드는 ‘금인명배(金人銘背)’라는 제목으로 그려졌다. ‘동상의 등에 새겨진 명문을 보다’란 뜻이다. 그림에서 공자는 중앙에 서서 제자들에게 동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금인(金人)’, 즉 ‘신언인(愼言人)’이 손에 홀을 들고 좌대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금인의 입을 자세히 보니 반창고 같은 것이 위아래로 세 줄 붙어 있다. ‘삼함’이다. 입에 반창고를 붙인 ‘삼함’ 대신 등에 적힌 명문을 강조한 그림도 있다. 청대(淸代) 1686년에 제작된 ‘성적전도(聖蹟全圖)’의 ‘금인시신(金人示愼)’에는 ‘금인’의 뒷모습을 그리고 등에 ‘입을 봉한 동상의 등이다(緘口銘背云云)’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그 동상의 앞모습은 필시 입이 세 번 봉해져 있을 것이다.

‘금인명배’는 1742년에 제작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성스러운 발자취를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다. 공자의 생애를 작게는 50장면에서 많게는 112장면까지 그린 일종의 그림 전기다. 그림에는 작은 설명과 시를 곁들여 공자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공자성적도’는 원(元)나라 때부터 제작이 시작된 이후 명청(明淸)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버전으로 출판되었다. ‘공자성적도’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진여(金振汝)라는 초상화가가 1700년에 그린 작품 10폭이 현존한다. ‘금인명배’가 들어 있는 이 ‘공자성적도’는 김진여 작품보다 42년 뒤인 1742년(영조 18년)에 당시의 동궁인 사도세자를 위해 제작되었다. 이 ‘공자성적도’를 진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사서(司書) 이기언(李箕彦)의 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동궁 저하가 ‘공자성적도’를 보면서 반드시 그 내용을 주목하여 보아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담아 몸에 체득하여, 처하는 곳마다 경각심을 가지고 그 행동을 따라한다면, 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이익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이기언의 발언은 비단 동궁 저하뿐만 아니라 학문에 힘쓰는 모든 선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기언의 발문이 있는 ‘공자성적도’는, 똑같은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 규장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상하권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두 권 모두 하권만 전한다. 원래 중요한 책이나 그림은 ‘천(天), 지(地), 인(人)’ 세 벌을 제작하던 관행에 비추어보면 한 질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로서는 그 전말을 알 수 없다. 혹은 한 권이 다른 한 권을 보고 베꼈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군다나 그림의 수준도 들쑥날쑥이라 여러 사람이 붓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 ‘신언인도(愼言人圖)’, 1773년, 종이에 먹, 114.8×57.6㎝,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신언인도(愼言人圖)’, 1773년, 종이에 먹, 114.8×57.6㎝,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이 후배 정치인에 전해준 인생 비법

김홍도(金弘道·1745~?)가 그린 ‘신언인도(愼言人圖)’는 ‘금인명배’에서 동상만 독립시킨 작품이다. 그림 속 인물이 ‘신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맨 위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쓴 제발과, 신언인의 입에서 볼 수 있는 ‘삼함’ 그리고 발 아래 놓인 대좌다. 신언인의 등에 써 있어야 할 명문은 강세황의 제발로 대신했다. 제발에는 ‘공자가어’의 ‘관주’에 있는 ‘함구’의 전문이 들어 있다. 그림이 낡아서 원래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김홍도는 ‘신언인’을 그리면서 배경을 전부 생략했다. 이것은 그의 풍속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다. 덕분에 인물이 배경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감상자의 눈에 들어온다.

‘신언인도’는 김홍도가 그의 나이 29세 때인 1773년에 문신 정범조(丁範祖·1723~1801)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기년작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773년일까. 그림은 통상 주문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1773년은, 60세까지 백수로만 살던 강세황이 영조의 ‘망극한 성은’을 입어 9급 참봉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해다. 그 후 강세황은 고속승진을 거듭해 70세에는 지금의 박원순 시장이 앉은 자리인 한성판윤에 오르게 된다.

반면 평생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던 정범조는 그의 나이 49세인 1773년에 갑산으로 유배를 떠난다. ‘신언인도’는 혹시 그런 상황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범조보다 열 살이 많았던 강세황은 ‘신언인도’를 통해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몇 마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인생살이의 ‘노하우’를, 날마다 쳐다보면서 되새길 수 있는 그림으로 알려준 것은 아닐까.

‘삼함’과 ‘신언인’의 의미와 같은 단어로 마도견(磨兜堅)이 있다. 마도견은 마도건(磨兜鞬)이라고도 하는데 ‘삼가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해 명초의 학자 도종의(陶宗儀)는 ‘철경록(輟耕錄)’에서 “양주 곡성현의 성문 밖 길가에 석상이 있는데, 그 배 위에 ‘마도견 신물언(磨兜堅愼勿言)’이라고 새겨둔 데서 온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마두견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마(磨)라는 것은 옥의 티를 갈아 없애는 것처럼 함이요, 두(兜)는 그 입과 혀를 함봉하는 것이요, 견(堅)은 금을 녹여도 변치 않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말을 삼가는 것의 뜻이 이와 같다. 이어서 이익은 “성인(聖人)이 말을 삼가라는 뜻을 나타낸 것은 ‘주역’에 열두 대목, ‘논어’에 열다섯 대목, ‘예기’에 여덟 군데”라고 강조했다. 책마다 ‘말조심’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말로 인한 사건사고가 빈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괄낭(括囊)’도 ‘삼함’과 동의어다. 괄낭은 ‘주머니 끈을 묶다’는 의미다. 입을 다물되 마치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경박하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지만, 암울한 시대에 자신의 재주를 속에 감추고 침묵을 지키라는 처신술도 포함되어 있다. 괄낭은 ‘주역’의 ‘곤괘’에 나온 말로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고 칭찬도 없을 것이다.(括囊無咎無譽)”에서 유래되었다. ‘주역’은 공자가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는 책이다. 공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주역’의 ‘계사전’에도 “언행은 군자(君子)의 자격 요건이다. 그 언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욕이 대체로 결정된다”고 적혀 있다.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들과 유튜브 출연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말을 삼갈 때와 삼가서는 안 될 때

강세황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다 신언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허목(許穆)은 ‘여덟 가지의 가훈’ 중에 ‘신언’을 넣었다. 17세기 기호학파의 대표적 산림학자인 송준길(宋浚吉)은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한다(愼言語 節飮食)’는 ‘주역’의 ‘이괘’를 인용하면서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음식을 절제함은 몸을 보양하기 위함이고 언어를 삼감은 덕성을 수양하기 위함이다.” 요즘처럼 ‘먹방’을 통해 온 국민을 식탁 앞으로 끌어들이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말이다. 18세기의 문인 윤기(尹愭)는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벽에 써 붙인 글’에서 ‘병은 입을 통해 들어오고, 재앙은 입을 통해 나간다’고 적었다. 윤기의 글은 중국 오대(五代) 때 정치인 풍도(馮道·882~954)의 ‘설시(舌詩)’를 인용한 문구임에 틀림없다. 풍도는 ‘다섯 왕조에 걸쳐 여덟 개의 성씨를 가진 열한 명의 임금을 섬길 정도로 처세에 능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73세까지 장수하는 동안 입이야말로 화복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소위 ‘정치 9단’의 실력자였던 풍도가 혀에 관한 ‘설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다.” 명대의 문인 진계유(陳繼儒)는 신언의 중요성을 글에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나 붓으로 쓰는 것이나 모두가 말인데, 입에서는 조심하고 붓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 말을 공손하게 한다고 하면 옳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말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올린 댓글도 조심해야 한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말을 삼가는 것 못지않게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두견에 대해 얘기했던 이익은 후진(後晉)의 손초(孫楚)가 지은 ‘반금인명(反金人銘)’을 예로 들면서 그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손초의 글은 이렇다. “진나라 태묘에는 석인이 있는데, 그 입을 크게 벌리고 그 가슴에 ‘나는 옛날 말 많이 하는 사람이다. 말을 적게 하지 말고 일을 적게 하지 말라. 말을 적게 하고 일을 적게 하면 후인들이 무엇을 전술하겠느냐’라고 썼다.” 손초의 글은 다분히 공자가 후직의 사당에서 본 금인명을 의식해 해학적으로 쓴 풍자임에 분명하다. 이익은 손초의 글을 인용한 다음 ‘분부를 받들면 순종이요 뜻을 어기면 거역이고, 용의 비늘을 거슬리면 반드시 화기에 빠지고 괄낭하면 허물이 없어 마침내 주륙을 면하기 때문에’ 말을 해야 할 때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조정에 있는 사람이 세 겹으로 입을 봉하는 것은 ‘시골 구석에 있는 필부 서민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못 박는다. 19세기의 문인 변종운(卞鍾運)도 이익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금인명의 뒤에 쓰다(題金人銘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금인의 입을 세 번 봉한 것은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뜻일 뿐이었지만, 입을 봉하지 않아야 할 때 입을 봉한 자들이 후세에 어찌 이리 많아졌는가. (중략) 하물며 조정에 앉아서도 나라의 안위를 논하지 않고, 대궐 앞에 서서도 임금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으니 이는 공경대부가 그 입을 봉한 것이다.”

막말하고 싶은 사람은 입에 반창고를

타인에게 막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부터 입에 반창고를 붙일 것을 권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지 거울을 보고 확인하시기 바란다. 세 개까지 붙일 필요도 없다. 하나로도 충분하다. 반창고 붙인 입이 창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막말하는 입보다는 훨씬 덜 부끄럽다. 적어도 그 입으로는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담 같지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근신하는 태도야말로 그 어떤 사회적·형사적 처벌보다 우선해야 하는 원칙이다. 말해야 할 때 역린이 무서워 지나치게 과묵한 조정 관료들은 제발 좀 입을 많이 열기 바란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달라고 국회로 보낸 것 아닌가.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금인명’과 ‘반금인명’의 중요성을, 우리가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옛날 사람들이 일찍이 깨닫고 가르쳐준다. 알고 보면 옛날 성인들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꼭 가봐야 할 ‘오래된 미래’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