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키스.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년. 채색목판화. 38×26㎝. 개인
엘리자베스 키스.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년. 채색목판화. 38×26㎝. 개인

결혼한 지 30년. 올 설에도 어김없이 시댁에 갔다. 예순 살이 되려면 두 해가 더 남았으니 친정에서보다 시댁에서 보낸 설 명절이 더 길다. 30년이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시댁에서 보내는 명절은 여전히 불편하고 낯설다. 새 화분에 옮겨 심은 화초처럼 아직도 적응을 못 했다는 뜻이다. 시댁이라고 해봤자 이제는 홀로 되신 시어머니만 계신다. 시어머니는 올해 여든다섯이 되셨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매우 건강하시다. 하루 종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명절 음식을 만들고 나면 밤에 허리가 아파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도 없는 나에 비해 꼿꼿하게 앉아 계실 정도로 체력도 좋으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어디서 그런 정력이 나오시는지 혹은 눈치가 없으신 건지 음식 장만하느라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은 며느리를 상대로 묵은 이야기보따리를 쉴 새 없이 풀어놓으신다. 거의 30년 동안 재탕에 삼탕을 거듭한 얘기다. 몇 해 전까지는 단물이 다 빠진 얘기를 듣고서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쳐줬지만 이젠 그런 코스프레도 포기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내가 본 적도 없는 시할머니와 돌아가신 시아버지에 대한 비난 대신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내용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추가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귀하게 자랐어.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친척들한테까지 엄청 이쁨 받고 자랐으니까.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어. 느이 시아부지한테 항상 ‘여보, 당신’ 소리만 들었지 ‘야! 쟈!’ 하는 소리 한번 안 듣고 살았다니까.”

고생만 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을 그런 식으로라도 미화시켜 위안을 삼고 싶으셨을까. 아니면 여든다섯 해의 인생을 결산해 보니 그만하면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이 들었던 것일까. 현대사의 격동기를 헤쳐온 시어머니를 보면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왜 명절 그림을 안 그렸을까?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엄마인 듯한 젊은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광화문으로 나들이를 갔다. 엄마와 아이들 모두 머리에 따뜻한 남바위를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웬만큼 사는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색 두루마기를 걸친 젊은 엄마는 때때옷을 입은 딸과 솜옷을 입은 아들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얘기를 한다. 엄마의 보호 아래 남매는 풍선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한다.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청장관전서’의 글을 보는 듯하다.

“6~9세 때에는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가 어찌 그리 좋았는지. 초록색의 소포자(小袍子)를 입고서 적색 비단띠에 홍색 가죽신을 신었다. 밤에는 윷을 놀고 낮에는 연(鳶)을 날리며 어른들께 세배하면 이마를 어루만지며 예뻐하였다. 이때에는 우쭐한 기분에 바람같이 달려 머리가 나풀거렸으니 좋은 시절이 이날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그림 속의 아이들 역시 우쭐한 기분이 되어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뒤쪽에 있는 해태상 아래에도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좌판에서 풍선을 사며 놀고 있다. 그 뒤로 광화문과 백악산이 실루엣처럼 그려져 있다. 조선의 풍경이지만 왠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정월 초하루 나들이’는 1919년에 조선에 온 스코틀랜드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의 작품이다.

한국회화사를 전공하면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조선시대에 그린 명절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추석이나 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동지, 한식 등과 관련된 풍속화가 아예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많이 그렸는데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명절 그림 자체를 그리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그림 분야는 명절 그림뿐만이 아니다. 왕과 왕비 혹은 왕자나 공주 그리고 지체 높은 집안의 여인들은 아예 그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서양화에서 나폴레옹, 루이 16세 등등의 군주 초상화나 신화를 빙자한 여인도 등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한 궁중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과는 판이하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 풍경은 매우 귀하면서도 소중하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에 건너왔는데 그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목판화를 배웠다. 서양인 화가가 목판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행을 택한 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17세기부터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를 중심으로 우키요에(浮世繪)가 인기를 끌었다. 천황의 거주지였던 일본의 옛 수도 교토(京都)에서는 금, 은박을 사용한 화려한 장벽화(障壁畵)가 유행했다. 반면 신도시인 에도에서는 새롭게 부상한 상인계층인 초닌(町人)들을 중심으로 우키요에가 풍미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우키요에는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歌舞伎)의 한 장면이나 연극배우들 그리고 유흥가의 기녀들이 주 소재였다.

그런데 이런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넘어가서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이름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을 그리는 데 지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등장한 우키요에는 과장적인 표현과 평면적인 묘사로 서양의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반 고흐, 모네, 드가, 고갱, 로트렉 같은 후기 인상파의 대가들이 자포니즘에 경도되었다. 그중에는 자포니즘의 원산지인 일본에 건너와 직접 목판화를 배우고자 했던 에너지 넘치는 화가들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물론 그녀의 출국은 일본에 먼저 가 있던 여동생 부부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목판화는 그녀의 가슴속에 꿈틀거리던 창작욕을 자극해 화가의 길을 가게 했다.

그녀는 일본에 체류한 지 5년이 지난 1919년 3월 28일에 한국을 찾았다.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녀는 한국의 명승지와 풍경화뿐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왕실의 공주, 고관대작들, 학자, 양반댁 규수를 비롯해 농사꾼, 아낙네, 어린아이 등 식민지를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 사람들의 풍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절대로 모델로 삼지 않던 공주와 양반댁 규수, 과부 등을 화면에 등장시켰다는 사실이 새삼 눈부시다. 그녀는 ‘예복을 입은 순이’라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한국 여자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의 가정 내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하대를 당하지만, 삼일만세운동 때는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 싸웠다.(중략) 한국 여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보여주었다.” 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그녀는 일본, 한국, 중국을 거쳐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찾아 그곳의 자연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정월 초하루 나들이’의 인물들을 보면서 ‘웬만큼 사는 집안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평가한 이유가 꼭 옷매무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 엄마가 정월 초하루에 저렇게 곱게 꾸미고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올 정도라면 집안에 하인이 많아 굳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는 뜻이다. 보통의 주부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설날은 분주하다. 주부는 설날만 바쁜 것이 아니다. 설 전날인 섣달 그믐날은 더 바쁘다. 지금은 설날에 세배를 하지만 과거에는 섣달 그믐날에 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웃어른을 찾아뵙고 인사 드리는 것이 세배였다. 웃어른을 모신 집에서는 찾아오는 손님에게 세찬을 대접해야 하니 그 또한 주부의 일이다. 정신없이 섣달 그믐날을 보내고 나면 저녁에 쉬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집안 곳곳에 등불을 밝히고 ‘뜬 눈으로’ 새해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만약 ‘헌 해’를 보내면서 잠에 취해 새해를 맞이하지 못하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이 있었다.

아무튼 주부는 한숨도 못 자고 밤을 꼴딱 샌 다음날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 차례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하고, 설거지를 하고, 또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내오다 보면 몸은 천근만근 가라앉는다. 그 사이 남자들은 떡국을 먹고, 사기(邪氣)를 쫓아낸다는 백주(柏酒)나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산소에 다녀오고, 윷놀이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남자나 어린아이 입장에서 보면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는 설날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읊었다. ‘생각하면 옛날 어렸을 적엔/ 설날만 돌아오면 어찌 그저 기쁘던지/ 세월 아까운 줄 전혀 모른 채/ 동네방네 다니면서 뛰어놀았지.’ 이것을 만약 여자 입장에서 썼다면 ‘어찌 그저 기쁘던지’ 대신 ‘어찌 그리 고달프던지’라고 썼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신부’. 1938년. 채색동판. 24×37㎝. 개인
엘리자베스 키스. ‘신부’. 1938년. 채색동판. 24×37㎝. 개인

며느리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날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키스가 ‘정월 초하루 나들이’를 그린 것은 조선 여인들이 처한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가 ‘신부’라는 작품을 그린 후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해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조금 길지만 그녀의 작품 설명을 들어보자.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좌석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큰상에 놓인 온갖 먹음 직한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 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 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뎌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다른 별채에서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더 이상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의 신부가 처한 상태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했다. 만약 조선의 화가가 그렸다면 어땠을까? 신부의 외모는 더 잘 그렸을지 몰라도 신부가 처한 상황까지 들여다보면서 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자들의 경우 이덕무나 장유가 행복한 시간으로 회상했던 설날은 결혼과 함께 끝난다. 그림 속의 신부는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앉아 있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 첫날부터 쫄쫄 굶어야 하는 신부의 모습은 앞으로 그녀가 겪어야 할 고난을 예고하는 것 같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행복 끝, 고생 시작인 셈이다.

‘신부’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도 마치 지금 현재 상황을 그린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예나 지금이나 결혼한 여자들이 겪어야 삶의 무게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결혼을 한다. 그런데 남자 집안에서는 일할 수 있는 무수리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 간극에서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즐겁고 행복했던 명절이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로 피하고 싶은 날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위패 속의 남편 집안 조상을 모시기 위해 허리가 휘어지도록 제사상을 차릴 때의 감정을 기혼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할까? 배울 만큼 배웠고 경제력도 있는 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왜 갑자기 부엌데기로 전락했을까?’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방송에서 ‘마음은 이미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에게 가 있고 어쩌고…’ 하는 멘트가 나올 때마다 기가 막힌다. 전부 남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도 이런 불평등한 시댁문화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일하면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육아의 어려움은 얼마나 큰가? 그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해버린다. 설날은 한 해의 시작을 기원하는 상서로운 날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결코 상서롭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축제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인 날이 어떻게 상서로운 날이 되겠는가?

여기서 잠깐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신부’의 뒤쪽 병풍을 보자. 신부를 강조하기 위해 병풍 그림은 흐릿하게 그렸지만 대략적인 구도만 봐도 병풍 속 그림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임을 알 수 있다. 곽분양은 당(唐)대의 명장으로 평생 부와 명예와 장수(長壽)를 다 누려 만복(萬福)의 대명사가 된 상징코드였다. 오늘 결혼하는 남녀도 곽분양처럼 행복하게 살라는 축원이 담긴 그림이다. 그런 축원을 받으며 신부가 굶고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축제가 되려면

설날을 가리키는 말은 여러 개가 있다. 그중에서 ‘원일(元日)’이 가장 많이 쓰였다. ‘으뜸이 되는 날’이라는 뜻이다. 시간적으로 가장 앞에 있는 날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일을 더 강조하면 ‘삼원(三元)’이 된다. ‘3개의 으뜸’이라는 뜻이니, 설날은 해(年)와 달(月)과 날(日)의 으뜸이 된다. 삼원 대신 ‘삼조(三朝)’를 쓰기도 한다. 삼조를 더욱 강조하면 ‘삼조삼삭(三朝三朔)’이 된다. 이밖에도 ‘으뜸이 되는 아침’은 ‘원단(元旦)’과 ‘원조(元朝)’를 비롯해 원정(元正), 원신(元新),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등으로도 사용된다. 모두 새롭고 좋은 날을 특별하게 부른 단어다.

시어머니가 스스로의 삶을 귀하게 대접받았다고 자평한 것은 다행이다. 고된 시집살이에 한이 맺혔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았다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특히 부엌일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며느리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축제다. 고강도 가사노동을 며느리 한 사람에게만 떠맡겨 결국 명절이혼에 이르게 하는 것은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다. 민족 최고의 명절을 축제로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른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할 숙제다. 한 해의 으뜸이 되는 가장 좋은 설날이 아닌가.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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