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9일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우리가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에 대한 기대를 한껏 모으던 그날, 후보에만 올라가도 영광이라는 이 자리에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는 무려 24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아이리시맨’이 10개 부문에, ‘결혼이야기’는 6개 부문에, 그리고 ‘두 교황’은 3개 부문에서 후보가 되는 등 총 8개 작품이 상을 노리고 있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능가하는 규모였는데 월트디즈니가 23개 부문, 소니가 20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것과 비교해보면 올해의 넷플릭스가 기존 영화 권력과의 거리를 얼마나 좁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19년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작품이 아카데미 1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고 영화 ‘로마’로 감독상과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전 세계에 강렬한 충격을 줬다. 전통적인 극장 개봉 방식을 취하지 않는 넷플릭스를 그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했는데도 얻어낸 성과였다. 그 기세가 2020년에도 계속됐고 기대감을 불러왔다.

결과는 어땠을까. 겨우 2개 부문 수상에 그쳤다. ‘아메리카 팩토리’가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그리고 ‘결혼이야기’에 출연한 로라 던이 여우조연상을 받는 데 그쳤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등이 출연한 ‘아이리시맨’은 2억달러에 가까운 예산을 들인 대작이었지만 단 하나의 상도 가져가지 못했다.

넷플릭스는 올해 아카데미에 맞춰 거액의 예산을 쏟았다.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2019년 10~12월 마케팅 비용을 지난해보다 20% 초과해 집행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오스카를 얻기 위한 비용이었다. 지난해 ‘로마’를 위해 넷플릭스가 쏟은 오스카 캠페인 비용은 2500만달러, 약 300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한 내용대로라면 올해는 이보다 더 집행했을 수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는 게 필요했다. 특히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월트디즈니가 보고 있는 앞에서는 더욱 그래야만 했다.

‘2개월에 2600만명’ 역시 디즈니

OTT(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ver The Top) 분야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이다. 아마존 프라임이나 HBO 맥스에 더해 애플TV+가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눈은 아마도 지난해 11월 12일 북미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월트디즈니의 디즈니+에 쏠렸을 터다. 디즈니+의 등장으로 넷플릭스 주가는 한때 3.7%나 하락했으니, 시장도 ‘넷플릭스 vs 디즈니+’ 구도를 가장 주목한 셈이었다.

디즈니+의 시작을 알리는 광고 영상. 2분가량의 짧은 길이에 디즈니 작품을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캐릭터 60여개가 등장한다. ‘알라딘’ ‘라이온킹’ ‘토이스토리’ 등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마블유니버스를 구성한 ‘아이언맨’ ‘캡틴아메리카’ 그리고 ‘스타워즈’ 캐릭터까지 빠르게 지나가는데 이 모든 캐릭터가 디즈니의 소유다. 마블과 픽사, 21세기폭스나 루카스필름의 콘텐츠가 모두 그들의 것이다. 2분 남짓의 시간 동안 디즈니가 증명하는 건 그들의 콘텐츠가 가진 질적 역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OTT 시장에 등장한 디즈니+는 넷플릭스 아성에 균열을 내고 있을까. 지난 2월 4일 월트디즈니는 회계연도 1분기 실적을 공개했다. 지난해 11월 12일 서비스 출시 첫날에만 1000만명 이상의 가입자를 유치한 디즈니+는 이번 분기 실적에서 가입자가 2650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실적 기준이 지난해 12월 28일이었으니 두 달도 안된 기간 동안 거둔 기록인데 블룸버그 컨센서스가 예상한 2080만명을 웃도는 호성적이었다.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CEO는 “2월 4일 기준 2860만명을 기록 중”이라고 밝혔다.

디즈니+의 호조는 예측 가능한 서비스라서다. 사용자들은 디즈니에서 무엇을 보고 얻을 수 있을지 너무 잘 안다. 넷플릭스에 비해 아직 라인업의 숫자는 적지만 콘텐츠 품질에서는 디즈니+가 평균 이상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OTT에서 전문가로 꼽히는 프로스트&설리번의 애널리스트 댄 레이번은 “디즈니는 고객이 자신들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가 OTT 시장에 도전했을 때 가장 애를 먹은 건 외부 콘텐츠의 라이선스 계약이었다. 2011년 미국의 유료 케이블TV 네트워크인 스타즈(Starz)와 협상이 결렬됐을 때는 회사가 위기에 처했던 적도 있다. ‘하우스오브카드’를 필두로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투자해 내놓은 오리지널 콘텐츠가 회원을 획득하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깨달음을 얻은 뒤 콘텐츠 투자는 점점 확대됐는데, 2019년 한 해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에 투입한 비용은 약 150억달러(17조7000억원)에 달한다.

반면 디즈니+는 콘텐츠 위기를 모른 채 크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인기 영화와 TV프로그램을 이미 갖추고 시작했다. 모든 작품의 지적재산권도 월트디즈니가 직접 보유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각 지역의 라이선스 계약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다투고 조율하는 수고를 디즈니는 겪을 필요가 없다. 약 1세기 가까이 쌓아온 업력(業力) 덕에 넷플릭스가 겪었던 성장통을 삭제하고 시작할 수 있었다.

“넷플릭스, 가격 안 내리면 더 뺏긴다”

이런 경쟁 속에서도 일단 넷플릭스의 패권은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 4분기(10~12월) 넷플릭스는 전 세계에서 900만명의 신규 회원을 받았고 글로벌 유료 회원 수는 1억6700만명으로 늘었다. 2019년 총 매출은 200억달러를 돌파했다. 일등공신은 제3세계. 중남미에서 200만명, 아시아에서 170만명이 증가한 덕이다.

그런데 이런 견고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의 주가는 실적 발표일에 소폭 하락했다. 표면적으로는 좋아보여도 내부적으로 뜯어보면 우려할 부분이 있어서다. 일단 가장 중요한 북미 시장에서 증가세가 미미했다. 디즈니+에 사람들이 몰리는 동안 넷플릭스의 미국 신규 회원은 50만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4분기 넷플릭스 앱의 글로벌 일간 활성사용자(DAU)는 3분기와 비교해 3% 감소했다. 특히 넷플릭스가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중남미와 인도에서 제동이 걸렸다. 추진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디즈니+가 아직 본격적으로 마법을 부리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봐야 한다. 넷플릭스는 지금 190여개 나라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디즈니+는 단지 미국과 캐나다,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에서만 마법을 부렸을 뿐이다. 3월이면 인도와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 2021년에는 한국과 일본 진출이 예상되고 있다. 컨설팅업체 니드햄의 저명한 애널리스트 로라 마틴이 투자자들에게 넷플릭스의 주식 매도를 권유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마틴은 “넷플릭스가 지금처럼 월 요금을 9~16달러 범위를 유지한다면 2020년에는 최대 400만명의 미국인 회원이 이탈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내세운 해법은 가격 인하다. 5~7달러 범위로 내려야만 경쟁력이 유지된다는 건데, 디즈니+의 월 비용은 6.99달러에 불과하다.

키워드

#IT
김회권 국제·IT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