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각 당파는 청년 인재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어느 20대 청년 인재(?)가 성폭력·데이트폭력 문제로 퇴출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처럼 우리 정치는 온통 청년층의 ‘이미지’만 좇을 뿐, 정작 그들의 적나라한 실상에는 여전히 무심하고 무지하다.

20대 청년층은 1960년대생의 자식 세대다. 흔히 586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생은 고도성장의 혜택을 가장 잘 누린 세대라고 일컬어진다. 그런 ‘유복한’ 부모 세대를 두었음에도 오늘날 20대는 왜 이토록 절망하는가. 이런 난제를 명쾌하게 풀어낸 것이 바로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2019)다. 부제는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이다. 즉 20대 청년층은 아주 ‘특이한’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도발적 주제다.

그들의 불평등은 단순히 삶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학력·소득·직업·인맥·문화적 역량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부모의 경제적·사회적 격차가 고스란히 자녀의 인적 자본의 격차로 체화, 이전되고 있다. 이런 계층의 격차는 그러한 대물림 혜택에서 소외된 ‘나머지’ 계층에 속한 20대를 삶의 단계마다 짓누른다.

여기서 ‘나머지’ 계층(약 90%)은 2등, 3등 시민이다. 반면 그런 특권을 대물림하는 계층(약 10%)은 1등 시민이다. 저자는 이 상위 10%를 ‘세습 중산층’이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신분이 갈리는 핵심적 요인은 이중적 노동시장에 있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대기업, 전문직, 공무원 등의 ‘내부자’와 중소기업 종사자, 비정규직 등의 ‘외부자’로 나뉘어 있다. 문제는 일단 외부자가 되면 평생 내부자가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첫 일자리로 신분이 결정되고 만다.

더구나 오늘날 20대는 베이비부머인 1960년대생의 자녀 세대로서 30대보다 숫자가 훨씬 많다. 반면 저성장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로 인해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중숙련 일자리가 사라짐에 따라 일자리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명문대 졸업장을 따서 좋은 일자리를 얻으려는 경쟁은 그만큼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명문대의 여학생 비율이 무려 40%까지 치솟았다. 좋은 일자리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우수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대거 늘어나자 상대적으로 남성 20대의 취업난이 가중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 20대 청년층에서 젠더 문제나 페미니즘 이슈가 민감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것이 종종 여혐(女嫌)이나 남혐(男嫌)으로 거칠게 분출되는 배경이다.

한편 오늘날 청년 담론에서 아예 배제되는 투명인간 집단도 있다. 지방대와 고졸 출신자다. 서울의 명문대 출신자가 ‘중심부’라면, 수도권 대학이나 지방 국립대 출신은 ‘반주변부’, 그밖의 대학이나 고졸 출신자는 ‘주변부’다. 그들은 아예 ‘실패자’로 간주된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근로빈곤층으로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더구나 제조업의 위축, 나아가 탈제조업 추세에 따라 지방의 괜찮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모든 기회는 서울과 수도권으로 더욱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구직 청년에겐 서울 사는 것도 스펙”이란 푸념이 있을 정도다. 정부의 분권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급기야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를 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20대 청년 세대의 일자리 경쟁은 어느 세대보다 격렬하다. 특히 좋은 일자리를 얻으려면 좋은 대학 졸업장이 필수이다. 문제는 20대들에게 이 ‘좋은 대학’의 기회가 이전보다 훨씬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부모의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 학벌, 인맥 등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복합적’ 불평등이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적나라한 실체인 것이다.

또한 대입 경쟁의 격화는 다시금 외고, 과학고, 자율고 등 명문고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세습 중산층은 단순히 학업에만 매달리지 않고, 아예 어려서부터 인생을 설계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유명 학원 강사는 단순히 공부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학생의 생활 전반을 관리하고 생활 자체가 입시에 최적화되도록 돕는 코치인 것이다.

이런 변화상은 최순실과 조국의 경우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1956년생인 최순실은 경제력은 뛰어났지만 문화자본은 빈약했다. 그는 자식에게 승마를 시켰다. 이것이 30대가 겪는 불평등이다. 반면 1965년생인 조국은 돈, 권력, 학벌, 인맥 등을 두루 겸비했다. 그는 체계적으로 자식들의 스펙을 관리하며 그들을 의사와 법조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마디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고스란히 대물림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20대가 겪는 불평등이다.

이처럼 오늘날 20대 청년층은 고급 일자리를 가진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 등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이다. 무엇보다 조국과 그 자녀들이 세습 중산층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전 세대가 경험한 불평등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주택을 사고 재산을 모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른바 ‘정상가족’의 모습이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자기 주도로 이런 정상가족을 꾸렸다. 반면 오늘날에는 ‘정상가족’을 이루려면 ‘번듯한 일자리’와 ‘부모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출신 계층에 달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특히 남성의 경제력은 결혼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층 남성은 부득이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남성 5명 중 1명은 마흔이 되도록 미혼 상태다. 여성들도 ‘완벽한’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비혼(非婚)이 낫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한편으로 세습 중산층 자식들은 더욱 폐쇄적으로 끼리끼리 결혼에 매달린다. 특히 부동산 또는 주택을 매개로 하는 계층 세습 현상은 2010년대에 들어서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복합적 불평등의 뿌리는 이른바 586이다. 그들은 학창 시절 탄탄한 인맥, 학벌, IT 지식 등을 쌓은 뒤 고도성장의 수혜를 입으며 사회에 진출해 IMF의 파고를 넘고 상층 중산층으로 도약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유무형의 자산을 총동원하여 자식에게 우월한 지위를 그대로 물려주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습 중산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도성장의 끝, 세습 자본주의의 시작”이다. 이전 세대들은 세대별로 비교적 동질적이었다. 반면 오늘날 20대는 계층별·집단별로 이질적이다. 특히 세습 중산층과 나머지 층은 아예 대조적이다. 더구나 각 집단도 다양하게 분절되어 있다. 이런 점을 외면하고 청년층을 뭉뚱그려 바라보면, 작금의 청년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요즘 정치권에 영입되는 일부 청년 인재들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한다. 그런 영입은 오히려 세습 중산층의 등용문으로 악용되기 십상이다. 오늘날 수많은 청년들이 점점 견고해지는 계층 칸막이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정치가 할 일은 영입 쇼가 아니라 그런 칸막이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일이다. 그리하여 좀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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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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