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 서울 청담동 사천 요리 전문점 파불라에서 만난 박정녀(오른쪽)·유재웅 부부.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2월 19일 서울 청담동 사천 요리 전문점 파불라에서 만난 박정녀(오른쪽)·유재웅 부부.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신영복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일화다. 층간소음으로 시달리던 그가 어느 날 집 앞 놀이터에서 윗집 아이를 만났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그 후로는 윗집에서 아이가 뛰어다녀도 아이 얼굴이 생각나 웃음 짓게 되더란 것이다. 윗집과의 관계가 일면식 없던 이웃에서 ‘아는 사람’이 되면서 달라진 변화였다.

어떤 일의 배경 혹은 누군가의 사연을 안다는 것은 밋밋하기만 하던 현상에 진한 깊이감을 더해줄 수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은 음식을 만든 사람의 얼굴을 알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음식을 만들고 식당을 운영하는지 알고 나면 이전과는 또 다른 음식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음식을 단순한 음식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철학이 담긴 결과물로 바라보게 된다.

“단순한 음식점 안내서가 아닌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음식업에 종사하는 셰프나 오너들에게는 응원을, 소비자들에게는 유용한 정보를, 미래 음식사업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살아 숨 쉬는 음식업계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음식이 좋아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 60대 부부가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과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미식가를 위한 맛집 50’(수도권 편)이다. 아내 박정녀씨는 웰스매니저(wealth manager)로 하나금융투자 롯데월드타워 WM센터 영업상무다. 남편 유재웅씨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문화체육관광부 해외홍보원장을 지낸 뒤 현재 을지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엔 ‘푸드커뮤니케이터’라는 영역을 개척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지난 3년간 매일경제에 ‘미식부부 맛집기행’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이번 책은 그동안 쓴 칼럼 가운데 음식점 50개를 엄선해 수정·보완을 거쳐 만들었다.

셰프·음식점 대표들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

이 책은 ‘가이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책으로, 마치 미쉐린가이드의 한국판과 같은 느낌도 난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좋은 음식점을 찾는 미식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5개 기준(맛·가격·서비스·청결·분위기)에 대한 별점 평가표를 매겨놓았다.

“책을 만들 때 미쉐린가이드를 보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음식점 순위를 매기는 평가서가 아니다. 어디에 가면 행복하게 한 끼 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때문에 이 책에선 여느 맛집 서적에서 볼 법한 ‘때깔 좋은’ 커다란 요리사진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보단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데 주력했다. 음식점 대표 혹은 셰프를 인터뷰하고 그들이 지금 이 식당을 운영하기까지의 역사를 물었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된장밥에 담긴 따뜻함을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30대 젊은 사장부터, 해외출장을 다니다 매료된 사천(四川·쓰촨) 요리에 꽂혀 제대로 된 사천 요리 전문점을 시작한 사업가까지, 다양한 음식만큼 다양한 사람 이야기를 담았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책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좋은 음식에는 만든 이의 절절한 인생이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감으로 음식을 맛보고 즐깁니다. 여기에 공들여 음식을 만든 이가 어떤 생각과 철학을 갖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감동이 배가될 겁니다. 음식을 매개로 만든 이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러한 취지에 최대한 부응하고자 저희들의 주관적인 음식평을 절제하고 좋은 음식을 만드는 셰프와 경영하는 오너들의 생각을 담아내는 데 훨씬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넘쳐나는 음식 관련 콘텐츠들 가운데 이 책만이 갖는 특별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 교수는 “저희 부부도 TV나 인터넷에 소개된 집을 찾아갔다가 실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범람하는 음식 콘텐츠 가운데 저와 주변인을 위해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에 담긴 식당들은 대부분 이들 부부가 오랜 시간 찾으며 ‘단골 인증’을 한 맛집들이다. 맛집 소개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거나 무상으로 식사를 하고 나온 경우도 없었다.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균형 있는 맛집 안내서를 제공하고 싶어” 칼럼을, 책을 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란 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쉐린가이드가 최근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 것도 결국 맛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평가 기준이나 평가단 선정 등에 있어 누구나 납득할 만한 객관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은 영역이다. 박정녀·유재웅 부부 역시 ‘무엇을 기준으로 맛집을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유 교수는 “음식점을 고르는 기준은 ‘행복감’”이라며 “평균적인 중산층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맛볼 가치가 있는 집, 그리고 그런 비용이 결코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곳을 위주로 골랐다”고 말했다. 박 상무는 “1인당 식사비용이 7만~8만원 하는 호텔이나 유명한 레스토랑은 아무리 맛이 있어도 제외했다”고 말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 훌륭한 음식을 만들지만 가격이 지나치게 비싼 집은 제외했다. 음식이 좋지만 널리 알려진 집도 뺐다.

평균 중산층이 찾는 행복한 식당들

이 책에 수록된 음식점들은 두 사람과 특별히 인연이 닿은 곳도 있지만 동서양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셰프와 미식가들의 추천을 받은 집도 있다. 추천을 받은 집은 이들 부부가 직접 찾아가 검증을 거쳤다. 현업에 종사하며 꾸준히 맛집 칼럼을 기고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맛집을 찾아 취재한다고 했다. 독자에게 좋은 정보를 전할 수 있다는 점도 좋지만, 좋은 음식 경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요식업 종사자들에게 힘이 되는 작업이기에 보람도 느낀다고 했다. 이번에 나온 ‘미식가를 위한 맛집 50’(수도권 편)의 후속편도 준비 중이다. “식사 후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가 음식 장사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식당에 가면 홀 너머의 공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일하는 요리사들이, 오너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홀 안으로 끌어들여 손님들에게 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요리사나 오너는 세상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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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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