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종식될 것’이라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이미 전국 각지에 소규모 봉쇄(이른바 코호트 격리)는 상당한 수에 이른다. 이번 감염병의 진원지인 중국의 우한은 도시 전체가 아예 통째로 봉쇄되고 있다. 크든 작든 봉쇄된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마침 페스트의 창궐로 봉쇄된 도시의 실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색적인 소설이 있다. 바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La Peste·1947)다. 이 소설은 ‘갇힌’ 사람들이 그 엄청난 비극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하지만, 결국에는 역병 퇴치를 위해 힘을 모은다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비극적 운명에 저항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라는 강렬한 작가 정신이 깔려 있다.

소설의 무대는 인구 20만의 오랑시(市). 194×년 4월 16일 죽은 쥐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4월 말에 사람들도 죽기 시작한다. 하루 수십 명에 달하던 사망자가 다소 줄면서 도시는 이내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다시 사망자 수가 치솟자, 순식간에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된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도시는 봉쇄된다. 모두가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감염자와 사망자가 폭증한다. 일단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면 환자는 강제입원되고 가족은 강제격리된다. 종종 경찰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환자를 탈취하는 일도 벌어진다. 도시는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 화장터에서 내뿜는 연기, 도시의 관문(關門)에서 들리는 총성 등이 뒤엉키는 ‘생지옥’이다. 식량보급 제한, 휘발유 배급, 절전, 등화관제 등은 물론이다.

이 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충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도피적 태도다. 기자 랑베르는 이 도시에 취재차 우연히 들렀다가 발이 묶인다. 그는 파리에 두고 온 젊은 아내를 그리워한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둘째, 초월적 태도다. 신부 파늘루는 이 재앙이 ‘사악한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규정하며, ‘아무리 잔인한 시련조차도 우리들에게는 유익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입장이다.

셋째, 반항적 태도다. 의사 리유는 최선을 다해 이 역병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체념하거나 신에게 기대지 말고 인간 스스로 운명에 도전, 즉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소임을 완수하는 성실한 의사다. 따라서 소설은 그의 반항적 도전을 통한 역병 퇴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페스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현장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 마침 사회활동가 타루가 리유를 찾아온다. 리유는 파늘루 신부의 신학적 해석을 겨냥하여 “그 병고의 유익을 증명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의기 투합한 두 사람은 민간보건대를 결성한다. 그때부터 리유는 의사로, 타루는 보건대 책임자로 역병 퇴치에 헌신한다.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리유와 타루는 “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는다든가, 결정적인 이별을 겪는 아픔을 막아주자”고 더욱 굳게 다짐한다. 그런 생각은 그저 당연한 것이어서 별로 칭찬을 받을 만한 것도 못 된다. 그런 일에는 어떠한 영웅도 필요 없다. 그저 소박한 시민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영웅적인 면모라고는 전혀 없는 그랑도 보건대에 들어온다. 그랑은 당장 지위조차 불안정한 말단 공무원이다. 그는 이혼하고 떠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엉터리 소설이나 끄적인다. 그런 ‘보잘것없는’ 인물이 퇴근 후 매일 저녁 보건대에 들러, 통계 작성 업무를 맡는다. 그의 성실성으로 인해 보건대의 활동은 행정적으로 탄탄한 기반에 올라선다.

기자 랑베르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도시를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그는 리유를 찾아와 무감염 증명서 발급을 요구한다. 리유가 거부하자, 랑베르는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리유는 “이제는 (당신도) 이 고장 사람이다”라고 대꾸한다. 차츰 랑베르는 ‘혼자만 행복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책하게 된다. 그는 탈출을 단념하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파늘루 신부는 신자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면서도 보건대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병원과 페스트가 들끓는 장소를 떠나지 않다가, 안타깝게도 11월에 죽고 만다. 또한 예심판사 오통은 아들을 잃고 자신은 격리된다. 하지만 격리가 해제되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봉사 활동을 한다.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최고위직 인물이지만, 재난 앞에서 헌신적인 면모를 보인다.

소시민들의 헌신

한편 어디에나 파괴적인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코타르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다. 다행히(?) 페스트의 창궐로 수사망이 느슨해지자 암거래, 불법 알선 등으로 돈을 벌어 흥청망청한다. 그는 “나는 훨씬 지내기가 좋아졌다.… 페스트 안에 있는 게 더 편하다”라고 지껄인다. 그는 재앙을 즐기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해 연말에 노(老)의사 카스텔이 혈청 개발에 성공한다. 이로 인해 사태가 극적으로 호전된다. 그랑도 감염되었다가 살아난다. 하지만 혈청도 안 듣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오통은 감염으로 끝내 죽고 만다. 그는 희망에 들뜬 시기에 희생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듬해 1월 말 페스트는 거의 종식된다. 그런데 정작 타루는 혈청주사를 맞지 않아 감염사한다.

이 소설에는 ‘위대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소시민이다. 그랑이 대표적이다. 그는 리유를 찾아와 보건대에 합류 의사를 밝히며,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영웅주의를 배격하며, 소시민들의 소박한 헌신이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리유가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다”라고 말하자, 랑베르는 “성실성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리유는 “그것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세상은 신적인 계시나 영웅적인 서사가 아니라, 각자에게 맡겨진 직분을 성실히 완수하는 소시민들의 분투에 의해 개선된다는 것이 작가의 강렬한 문제 의식이다.

작가가 처음에 구상한 제목은 ‘페스트’가 아니라 ‘수인(囚人)들’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갇힌’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도 그 감금을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페스트는 전쟁이나 부조리한 세상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페스트’는 그냥 ‘페스트’다. 그렇게 읽어야 감동과 교훈이 더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누군가의 푸념이 요즘 우리가 겪는 현실의 정곡을 찌른다.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예요.”

지금 우리는 엄중한 사태에 처해 있다. 외신에 따르면, 봉쇄된 우한시는 ‘생지옥’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런 재앙을 극복해 나가는 주역은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완수하는 전문가와 시민들이어야 한다. 정치지도자들의 섣부른 공명심은 되레 일을 그르치기 쉽다. 직분은 누구에게나 있다. 자신의 침방울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마스크를 쓰는 것도 어엿한 직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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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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