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 ‘제갈공명상’. 1902년 추정. 비단에 채색. 97×92㎝. 경상대도서관
채용신. ‘제갈공명상’. 1902년 추정. 비단에 채색. 97×92㎝. 경상대도서관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시청했다. 총 95부작으로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인데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했다. 드라마는 한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시기에 등장한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이 각각 위·촉·오(魏蜀吳) 삼국으로 분리되어 각축을 벌이는 과정이 실감나게 펼쳐진다. 원작은 원말명초의 걸출한 문학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다. 흔히 ‘삼국지’로 많이 알려진 책이다. 이 소설은 한 시대에 영웅이 되고자 했던 인물들의 ‘인재 풀(pool)’이 잘 갖춰져 있다. 그 덕분에 동아시아에 수많은 열성팬을 보유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지속적으로 제작된 이유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세 사람 외에도 주연급 조연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동탁, 여포, 원소, 초선,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량, 방통, 주유, 노숙, 조자룡 등등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던 익숙한 이름들이다. 수경선생(水鏡先生)으로 알려진 은사(隱士) 사마휘(司馬徽)와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佗)도 등장한다. 외과 전문의인 화타는 두통을 앓는 조조에게 뇌수술을 제안했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지금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뇌수술을 당시에도 할 수 있었다니 명의라는 말이 명불허전인 듯하다. 수경선생은 유비에게 “복룡과 봉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제갈량과 방통을 천거한 사람이다. 엎드려 있는 용인 복룡은 제갈량이고, 봉황의 새끼인 봉추는 방통이다. 복룡은 와룡(臥龍)과 동의어다. 제갈량을 흔히 와룡선생이라 부른다. 조조나 손권에 비해 아무런 ‘백그라운드’가 없었던 유비가 감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거물이 된 비결도 와룡과 봉추를 얻었기 때문이다.

젊은 제갈공명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

95부작 드라마를 통해 별처럼 떴다 사라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난 결론은 ‘역시 제갈량(諸葛亮·181~234)만 한 인물이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위가 오르거나 관작이 높아지면 오만해지거나 판단력을 잃었다. 50세의 나이에 새파란 젊은이였던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해 스승으로 삼을 만큼 겸손했던 유비도 황제가 된 후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그 오만함 때문에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해 죽음에 이른다. 의리의 사나이 관우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 중 촉나라의 영토가 가장 넓어지자 이 세상에 감히 자신을 이길 만한 장수가 없을 것이라는 오만함 때문에 오나라의 장수에게 패해 목숨을 잃는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원소, 여포, 주유 등 대부분의 맹장들 역시 두뇌회전이 느려서가 아니라 오만함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다.

그런데 오직 제갈량만은 예외였다. 그는 병법과 지략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오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17세기의 도학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재주와 덕을 겸비한 사람은 오직 제갈공명뿐’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평가다. 공명은 제갈량의 자다. 제갈공명은 능력도 뛰어나고 병권(兵權)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살았을 때도 존경을 받았지만 죽어서까지 사후세계의 신으로 승격되어 사람들의 추앙과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무속신앙에서 병권을 가진 신을 중시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능력이 죽어서도 계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제갈량에 대한 존경과 숭배는 중국 못지않았다.

칠원제씨 문중(회장 제금모)에서는 2013년에 채용신(蔡龍臣·1848~1941)의 작품을 경상대도서관에 기증했다. 그 작품이 ‘제갈공명상’이다. 무후(武候)는 제갈공명의 시호로 ‘충무(忠武)’를 뜻한다. 원래는 전남 곡성의 무후사(武候祠)에 봉안되었던 영정이다. ‘제갈공명상’에서 제갈량은 호피무늬 의자에 정좌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는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鶴氅衣)를 입었으며 손에는 깃털부채인 우선(羽扇)을 들었다. 와룡관은 윤건(綸巾·輪巾)이라 하는데 제갈량이 주로 쓰던 관이라 흔히 제갈건(諸葛巾)이라고도 한다. 제갈공명에서 시작된 와룡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대부들이 ‘최애’하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깃털부채는 제갈건만큼 중요한 지물(持物)이었다. 전장에서는 지휘봉이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채질 한 번으로 사나운 바람의 방향도 바꾸어버릴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상징물이었다. 이렇게 와룡관과 학창의와 깃털부채는 제갈량을 상징하는 지물이다. 지물은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여포의 적토마처럼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뜻한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그려진 제갈공명상은 거의 이 공식에 맞춰 제작되었다.

채용신이 그린 ‘제갈공명상’에서는 기존작품들과는 다르게 왼손에 ‘주역(周易)’을 들고 있다. 이것은 채용신이 제갈공명이라는 ‘인물 콘셉트’를 잡아내기 위해 많은 연구를 거듭했으며 매우 고심했음을 의미한다.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손에 안경이나 부채, 서책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가 유교국가였던 만큼 서책은 ‘성리전서(性理全書)’나 ‘주자대전(朱子大全)’이 대부분이다. ‘주역’을 들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것은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어오게 할 정도로 천문과 오행, 기문둔갑에도 밝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깃털부채와 ‘주역’이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갈공명상’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등장하던 족좌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가죽신을 신은 두 발을 돗자리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돗자리는 앞쪽 문양이 크고 뒤쪽은 작으면서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평면적으로 그렸다. 이것은 채용신의 작품에서 1920년대 이전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돗자리 문양이 약간 옆으로 비스듬하게 배치된다.

‘제갈공명상’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제갈량이 매우 젊다는 것이다. 숙종의 찬문이 실린 1695년 작 ‘제갈무후도’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바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제갈공명을 워낙 신출귀몰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항상 나이 많은 노인일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이 50세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를 받고 당시의 정세를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설파하던 때의 나이가 고작 27세였다. 지금 어른들이 20대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로만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는 얘기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20대를 제갈공명처럼 여겨 삼고초려할 자세만 되어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판은 너무 연로하신 어른들이 많다. 제갈공명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해도 되지 않을까? 충분히 잘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 속 제갈량의 얼굴에는 신중하되 주저하지 않고 자신감이 넘치되 교만하지 않은 젊은 지략가의 기백이 서려 있다.

필자미상. ‘제갈무후도’. 비단에 채색. 164.2×99.4㎝.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제갈무후도’. 비단에 채색. 164.2×99.4㎝. 국립중앙박물관

숙종, 제갈공명 같은 신하를 기다리다

우리나라에서 제갈공명의 초상화가 제작된 배경은 숭명배청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제갈량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때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초상화가 공식적으로 제작된 것은 선조(宣祖) 때부터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1603년 혹은 1605년에 평안남도 영유현(永柔縣)에 ‘제갈무후묘’를 만들게 한 후 ‘무후상’을 안치하게 하였다. 제갈공명처럼 충성스러운 신하가 출현해 어지러운 나라를 안정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병자호란을 겪은 현종(顯宗)은 1667년에 제갈무후묘호에 ‘와룡(臥龍)’을 사액했다. 숙종(肅宗)은 1686년에 중건비를 세웠다. 그리고 1695년에는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를 합향하게 하였으며, 제갈량과 악비, 그리고 남송 최후의 재상 문천상(文天祥)의 초상화를 보고 찬문을 지었다. 악비는 남송 때 여진족의 침입에 항거한 명장이었으나 정적의 모함으로 사형을 당했고, 문천상은 남송이 멸망할 때 원(元)나라에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충신이었다. 제갈량과 악비와 문천상 등 ‘삼충(三忠)’은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도 인정한 충절의 상징이었다. 영조(英祖)는 1763년에 와룡사를 삼충사로 바꾸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제갈무후도’가 탄생했다. 숙종의 어제(御製)가 적혀 있는 ‘제갈무후도’는 역시 누가 봐도 그림의 주인공이 제갈공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장치가 들어 있다. 와룡관과 깃털부채와 학창의가 그것이다. 숙종은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고 안정된 국정운영을 위해 제갈량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신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지연의’를 그림으로 제작한 ‘삼국지연의도’가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 대하소설을 시리즈로 그려야 하는 특성상 6폭에서 12폭까지 가능한 병풍 그림이 많다. 병풍으로 제작된 ‘삼국지연의도’는 민가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선호했다. 민간에 소장된 민화도 많지만 창덕궁에도 여러 폭의 왕실 병풍이 남아 있다. ‘삼국지연의도’ 병풍 그림에서도 특히 제갈량은 여러 장면에 등장한다. ‘삼고초려’를 비롯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게 한 장면, 남만(南蠻)의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풀어줬다는 장면, 거문고 한 대로 사마의(司馬懿)의 15만 대군을 물리친 장면, 조조군에 10만개의 화살을 얻어낸 장면 등등이다.

그런데 ‘제갈무후도’는 이런 드라마틱한 장면 대신 소나무 아래서 시동 한 명만을 데리고 앉아 편안히 쉬고 있는 평범한 제갈량을 선택했다. 그림 상단에 적힌 숙종의 어제는 ‘승상의 위대한 명성은 우주에 영원히 드리워졌다’로 시작해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함께 세상을 다스려 보지 못함이 안타까워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 글 속에 싣는다’로 끝난다. 또한 숙종은 제갈량의 출사가 욕심 때문이 아니라 유비의 정성에 감격해 몸을 바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진정한 충신은 출사하기 전이나 출사할 때나 한결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충(忠)’이다. 숙종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얻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을 정말 좋아한 이유는 단지 신출귀몰한 책략 때문만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계자서(誡子書)’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계자서’는 제갈량이 전장에서 죽기 직전, 8세 된 아들에게 남긴 유언 같은 글이다. 한자로는 총 86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비의 절절한 부정과 함께 그가 평생 지켜온 인생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조금 길지만 전문을 살펴보자.

“무릇 군자는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도달할 수 없다. 무릇 배움은 고요해야 하고, 재능은 모름지기 배워야 얻는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힐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 오만하면 세밀히 연구할 수 없고, 위태롭고 조급하면 본성을 다스릴 수 없다.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함께 떠나가니, 마침내 낙엽처럼 떨어져 세상에서 버려지니, 궁한 오두막집에서 탄식해본들 장차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8세 된 아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내용이다. 제갈량은 그의 아들이 ‘계자서’를 평생의 원칙으로 지켜나가면 흉흉한 세상에서 큰 낙오점은 없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제갈량의 마음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나이 든 사람이라면 ‘궁한 오두막집에서 탄식한다’는 ‘궁려(窮廬)의 탄식’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흰머리만 늘어나는 자신을 볼 때면 더욱 그럴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 또한 너도나도 앞장서서 궁려의 탄식을 쏟아냈다. 몸이 갑자기 쇠약해지거나 과거에 했던 일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밀려드는 회한 때문에 이구동성으로 탄식했다. 누군가는 ‘그럭저럭 지내다보니 반생이 어그러졌다’고 탄식했고, 누군가는 ‘고식적인 안일만 꾀하다’가 허송세월했다고 탄식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 붓을 들었다.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을 앞둔 자식과 조카와 후배들에게 제갈량의 마음을 담아 간곡한 어조로 편지를 띄웠다. 인생에 대해 빠삭하게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렇게 후회가 많은데 부디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 그런 뜻이 담겼다.

‘비선 실세’ 비난하는 ‘공식 실세’들

조선시대 선비들이 제갈량의 매력에 끌린 이유는 또 있다. 그가 죽을 때 주군인 유선(劉禪·유비의 아들)에게 올린 글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보면 황제의 총애를 받은 환관이나 간신들이 ‘비선 실세’가 되어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제갈량은 사실상 촉나라의 ‘공식 실세’나 다름없었다. 유비도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원하면 언제든 왕좌를 차지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어리석다 하여 왕좌를 빼앗지 않았고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 이권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위(魏)나라 장수 사마의와 싸우다 병사하기 전 주군인 유선에게 이런 글을 올린다.

“신은 성도(成都)에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전토 15경이 있으니, 자손들이 먹고사는 것은 넉넉합니다.… 그러니 신이 죽은 뒤에라도 곡식 창고에 남은 곡식이 있거나, 재물 창고에 남은 재물이 있어 이런 것으로 폐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이 덕까지 갖추었고, 관직이 높아져도 이권에 눈 돌리지 않는 초연함까지 겸비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제갈량에 대한 찬탄은 계속되고 있다. 반대급부로 지난 정권의 인물들은 ‘비선 실세’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공식 실세’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현 정권의 인물들에게 95부작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추천한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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