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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99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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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책]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신천지 향한 혐오는 적절한가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pcsun21@daum.net

코로나19가 신천지 교단을 통해 대량 전파되었다. 당연히 그 교단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더구나 교단의 불투명한 운영 방식은 여러 의혹과 비판을 자아낸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분노와 원망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정치인과 그 주변인들은 재빠르게 이런 대중적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이번 감염 확산을 아예 ‘신천지 사태’라고 규정하고 연일 강제수사를 재촉한다. 심지어 그 지도부를 ‘살인죄’로 고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과 없이 분출되는 혐오나 분노는 과연 적절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고 곤혹스럽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마땅한 안내서가 하나 있다. 바로 카롤린 엠케의 ‘혐오에 저항하자’(Gegen Den Hass·2016)이다. 영어로 옮기자면 ‘Against Hate’다. 우리말로는 ‘혐오사회’(2017)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독일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다. 또한 성소수자다. 따라서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진하게 녹아 있다.
   
   모두(冒頭)에 난민 이주자 버스를 가로막는 시위대의 모습이 소개된다. 시위대는 “우리가 이 나라의 국민이다”라고 외친다. 그 이면에는 난민은 ‘더럽고’ ‘위험한’ 존재라는 고정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혐오나 증오는 우리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 순수와 타락 등과 같은 이분법적 확신에 기반한다. 이런 근거 없는 확신이 사회 곳곳에 널려 있다.
   
   존경과 인정은 타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한다. 반면 멸시와 증오는 타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오해가 자꾸 쌓이다 보면 특정한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런 패턴의 핵심은 단순화와 협소화다. 즉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괴상한’ 존재로 단순화·협소화하는 것이다. 거기서 개개인의 독특한 서사(敍事)는 철저히 무시된다.
   
   이처럼 개개인의 문화적·사회적·정치적 다양성이 모조리 제거되면 사람은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역할·지위·특징만 지닌 파편적인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그가 속한 집단을 투영하는 단편(斷片)에 불과하다. 이런 협소한 시각은 우리의 상상력을 훼손시킨다. 이로 인해 감정이입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사람을 하나의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추게 된다.
   
   그런 고정된 이미지는 타인(난민·무슬림·유대인·성소수자 등)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정상적인’ 범주로 개념화하고, 타인은 거기서 배제하여 ‘비정상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 세계에는 유희적인 것이나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적인 사건도 모종의 의미와 의심스러운 배후가 있다고 여긴다.
   
   어느 경우든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밑바탕에는 동질성·본연성·순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동질성을 신봉하고 그 안에서 안도를 느낀다. 특히 민족이나 국가를 말할 때 동질성은 중시된다. 자신들이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다수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그 사람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 되어 배제의 대상으로 내몰린다.
   
   본연성(本然性)은 본래부터 그래야 마땅하다는 관념이다. 특히 성(性) 담론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태초에 그랬듯이 성별 구분은 확실해야 한다. 당연히 성소수자들은 ‘비정상’이다. 흔치 않다는 것은 곧 기이하거나 기괴한 것으로 단정된다. 오늘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상당히 개선되고 있지만, 성소수자는 여전히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순수성은 광신주의와 관계가 깊다. 광신적인 사람들은 깨끗하지 않거나 순수하지 않다고 지목된 사람들을 잡초처럼 골라내어 처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더러운’ 사람은 적이며, 적은 죽여도 좋다고까지 세뇌된다. 그것은 절대적인 악과 절대적인 선만 존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이다. 그런 곳에서 혐오와 증오가 일상화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동질성·본연성·순수성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만들어져 반복적으로 교육되고 계승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민족은 동질적이고 순수하다고 믿어지지만, 태초부터 그런 민족은 결코 없다. 그럼에도 증오하는 자들은 그런 이데올로기를 확신한다. 설사 허구일지라도 그런 확신이 없으면 결코 증오도 할 수 없다.
   
   반면 그들에게 미움받는 존재는 ‘모호해야’ 한다. 개개인이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모호한’ 집합체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비방과 혐오가 거리낌없이 활개를 칠 수 있다. 실제로 미움받는 자들은 개인으로 호명되지 않고 ‘○○들’(난민들·무슬림들·유대인들·성소수자들 등)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집단의 단순한 파편으로 간주될 뿐이다.
   
   당연히 혐오와 증오는 극단화에 뿌리를 박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양극단 사이에 길고 긴 회색지대가 있다. 거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 창의와 혁신이 나온다. 따라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우리가 순수하지 않은 것, 극단적이지 않은 것을 옹호하는 일이다. 물론 사회가 좀 더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론만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증오와 혐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따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연대하여 혐오의 사회경제적 근원을 찾아내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때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면 증오하는 자와 같아진다. 따라서 “증오하는 자에게는 부족한 것, 즉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自己懷疑)로써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요즘 코로나19 감염 사태에서 신천지 교단이 여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들’의 불투명한 신앙 행태로 인해 감염이 확산되었으니 ‘그들’은 지탄받아야 할 ‘반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을 그저 ‘모호한’ 집단으로만 바라본 결과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을 무조건 ‘그들’로만 속단하지 말고 개개인을 ‘구별’하여 바라보라고 제안한다.
   
   사실 그 안에는 교단 책임자부터 말단 신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감염증의 피해자다. 고의로 감염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들’에게 조직적인 과실이 있다면, 그 책임은 교단 책임자들의 몫이다. 아울러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단에 이끌리게 된 사회적 근원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오늘날 서구사회는 혐오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혐오 이슈가 제기되고 있다. 이번 신천지 논란도 하나의 중요한 시험대다. 그것이 이단이냐 아니냐는 시민사회의 어젠다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위해 여부에 모아져야 한다. 감염 자체는 아무 죄가 아니다. 이번에 그 핵심은 ‘고의로’ 방역을 방해했느냐다.
   
   우리는 저자의 호소대로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섣부른 기피나 혐오는 되레 방역에 장애가 된다. 나아가 그것은 시민적 품성을 타락시키고, 거기에 편승하려는 극단적 정치를 부추긴다. 최대한 자제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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