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은 미리 경고한 대로 비례정당을 창당했다. 그것을 비난하던 여당도 똑같은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주저하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하다. 심지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여당의 대응을 “경찰이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에 비유한다. 같은 일도 남이 하면 악이고 내가 하면 선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악 이분법이 버젓이 통용되는 것일까.

이 무거운 물음에 대해 상당한 실마리를 던져주는 문제작이 있다. 바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韓國は 一個の 哲學である·1998)이다. 이 책은 저자가 8년간 한국에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체험한 결실이다. 한국이 ‘철학’(성리학)에 의해 규율되어 왔다는 점은 잘 알려진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리학(性理學)은 ‘성(性)은 이(理)다’라는 학설이다. 여기서 ‘성’은 인간의 본성을, ‘이’는 천리(天理)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리학은 “자연의 법칙과 인간사회의 도덕이 완전히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라는 절대적 규범이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이’를 물려받은 ‘착한’ 존재다. 따라서 누구나 극기(克己)를 통해 ‘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성리학의 획기적 테제(These)다.

한국인은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사회와 우주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좀 더 논리정연한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세력만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논리정연한 체계(즉 철학)’는 오직 ‘하나’뿐이다. 이견은 절대 불허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에 ‘하나’가 들어간 이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도덕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왜 권력과 돈을 둘러싼 암투에 기꺼이 가담하는지, 또한 그런 싸움이 왜 그렇게 강렬한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거기에 도덕, 돈, 권력 등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식과 외양은 절대로 도덕적 명분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는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 된다. 이런 도덕적 쟁투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지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조선 철학은 독창성에서는 중국 철학보다 현격히 떨어지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사회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둘러싼 바늘구멍 같은 세밀한 이론이 강력한 폭탄이 되어 권력 중추를 파괴한다는 과격함은 중국보다 철저했다’. 글자 한 자로 인해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사소한 말꼬투리가 끔찍한 살상으로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조선은 경제력, 군사력 등 실질적인 힘을 기르기보다 도덕으로 무장하는 길을 택했다. 심지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도 지배층은 실질적인 사회개혁보다 오히려 도덕적 통제를 통해 기득권을 고수, 강화하려고 했다. 이미 실용성을 상실한 성리학은 사소한 도덕적 쟁점을 파고들었고 그 양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예송(禮訟) 논쟁이다. 왕가의 복상(服喪)을 둘러싸고 수십 년 동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 자체가 또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었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복상 문제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하나의’ 철학의 존폐가 걸린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이런 와중에 대동법과 같은 절실한 민생 문제는 무려 백 년간이나 표류했다.

조선처럼 도덕지향적인 사회에서 도덕의 최고 형태는 도덕, 권력, 돈이 삼위일체가 된 상태다. 그 결합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들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도덕은 예외 없이 상처를 입는다. 온갖 이해관계를 도덕으로 규율하려다 보니 도리어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은 도덕지향적이지만, 실제로는 도덕적이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집권 세력은 자신의 ‘리’가 절대적이라고 강변한다. 반면 도전 세력은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의’ 한국을 내세운 집권 세력에 대해 ‘또 하나의’ (다른) 한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도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복수(複數)다. 그 대립은 전체에 대해서든 아주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든 ‘결사적으로’ 강렬하다. 각 세력은 각자 자신만이 진정한 ‘하나’임을 강변한다. 그런 대결의 승패에 따라 ‘하나의 한국’이 다시금 세워진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한국이라는 무대를 ‘하나’의 보편적 철학으로 메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 하나는 결코 모두의 하나가 아니다. ‘하나’를 꿈꾸고 지향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가 훼손되고 만다. 즉 모두가 전체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결여의 아픔을 겪는다. 오로지 ‘하나의’ 철학만 용인되는 탓에 사람들은 독점이냐 배제냐로 내몰리고 만다.

한국에서는 ‘한국 최고’도 단 하나뿐이다. 바로 과거급제다. 오늘날 그것은 일류대 입학, 좋은 직장 등으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거기에 뽑히면 일약 ‘양반’이 되고, 탈락하면 가차 없이 ‘쌍놈’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극심한 경쟁과 압박에 시달린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일본 최고’가 여럿이다. 라멘을 잘 만들어도 최고이고, 스시를 잘 만들어도 최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은 현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순수성을 잃고 만다. 이로 인해 ‘하나의 철학’은 당파성으로 윤색되어, 또 다른 도전을 불러일으키고 다시금 도덕적 사생결단으로 빠져든다. 누구든 ‘하나’의 철학을 차지하면 승자가 되고, 그것을 상실하면 패자가 된다. 이때 승자는 ‘도덕적’ 존재가 되고, 패자는 ‘패륜적’ 존재로 추락한다.

‘하나의 철학’은 어두운 유산이다.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권위주의 시대, 국가개발 시대 등을 거치며 개선의 전기를 갖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놓치면 여전히 패륜 집단으로 매도된다. 한편 북한에서는 ‘하나의 철학’이 아예 극단적인 유일(唯一)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남북한의 상이한 현실이 공통적인 바탕에 근거한다는 주장은 각별히 새겨볼 만하다.

더구나 오늘날 ‘하나의 철학’은 완화는커녕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특히 현 집권 세력은 적폐청산을 외치며 자신과 자신의 철학만이 선하다고 강변한다. 마치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士大夫) 집단과도 흡사하다. 그들은 도덕적 훈계를 통해 모든 분야를 지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런저런 도덕적 결함을 드러내며 신(新)적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을 망국으로 몰고 간 ‘하나의 철학’이 21세기에 또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화려한 도덕쟁탈전을 벌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문화적 바탕을 날카롭게 파헤친 역작이다. 물론 한국이 성리학에 의해 ‘얼마나’ 지배되어 왔느냐는 논쟁적이다. 또한 ‘하나의 철학’이 갖는 강렬한 에너지에는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제삼자(일본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은 우리에게 크나큰 과제를 던져준다.

우리 정치는 전통적으로 ‘정책적’ 경쟁보다 ‘도덕적’ 쟁투에 골몰해왔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을 통해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한 선악 이분법적 쟁투였다. 더구나 오늘날 집권 세력에 의해 ‘하나의 철학’은 더욱 첨예화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에서 생산성은 실종되고 극한적 대결이 반복된다. 단적인 예(例)가 이번에 비례정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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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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