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천고최성첩’ 중 ‘희우정(喜雨亭)’. 조선 후기. 종이에 연한색. 25.8×32.7㎝.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천고최성첩’ 중 ‘희우정(喜雨亭)’. 조선 후기. 종이에 연한색. 25.8×32.7㎝.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 가면 ‘둥포러우’라는 유명한 요리가 있다. 우리가 ‘동파육(東坡肉)’이라고 부르는 돼지고기 요리다. 동파육은 삼겹살 덩어리를 중국의 전통주인 ‘소흥주(紹興酒)’에 담가 삶은 뒤 간장과 갖은 향신료 등을 넣고 조린 고기다. 겉면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모습만 보면 느끼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워 중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동파육은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요리다. 단순한 돼지고기 요리에 유명한 시인의 이름을 넣어 매출을 올리려는 중국인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동파육이 유명하게 된 것은 단지 중국인의 장삿속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름에는 소동파에 대한 백성들의 고마움이 담겨 있다. 소동파가 항저우 지사로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식수원인 서호(西湖)가 양쯔강(揚子江)의 범람으로 바닷물과 뒤섞이면서 온통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서호는 지난번 글에서 ‘매화를 아내 삼아, 학을 자식 삼아’ 은거했던 매처학자 임포가 살았던 그 동네 호수다. 소동파는 수천 명의 인부들과 함께 4개월 만에 서호의 남북으로 제방을 쌓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제(蘇堤)’다.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라는 뜻이다. 항저우의 백성들은 탁월한 능력의 공직자 덕분에 홍수의 피해로부터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호에 연(蓮)을 심어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제방 위를 거닐며 중국의 십경(十境)에 들어갈 만큼 수려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몇 해 전에 항저우에 가서 소제를 걸어봤는데 제방의 폭이 상당히 넓고 길었다. 제방을 쌓는 데 많은 공력이 들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여행객의 심사가 이러할진대 당시 항저우 백성들의 심정은 더했으리라. 그들은 헌신적인 목민관에게 감사함의 표시로 돼지고기를 보냈다. 소동파는 백성들이 보낸 돼지고기를 숨겨두고 혼자 먹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개발한 ‘레시피’로 요리를 해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때부터 이 돼지고기 요리를 ‘동파육’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파육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적극적인 행정을 펼친 한 고위 공무원을 위한 공덕비라 할 수 있다.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부른 이유

소동파가 백성을 위하고 헌신한 모습은 젊은 시절부터 확인할 수 있다. ‘희우정(喜雨亭)’은 그런 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를 알 수 없는 ‘희우정’은 오른쪽에 경물이 치우쳐 있고 왼쪽이 가벼운 구도다. 비가 많이 내린 듯 산 위에서는 폭포수가 시원스럽게 떨어지고, 숲에서는 안개가 피어오른다. 맑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날, 두 선비가 호숫가의 정자에 앉아 낚시질하는 배를 감상하고 있다. 차분한 필치로 그려진 맑은 산과 안개, 비에 젖은 나무 등이 천지에 가득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화첩이라서 그림 중앙의 접힌 부분이 박락된 점이 안타깝다.

‘희우정’은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천고최성첩’은 ‘오랜 세월 동안 가장 맹렬하게 인기 있는 화첩’이라는 뜻이다. 이 화첩은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1606년 조선에 가져와 알려졌다. ‘고문진보’나 ‘문선’ 등에 수록된 명문장들과 그림을 결합한 화첩이다. 그림과 시가 결합된 ‘천고최성첩’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아 여기저기서 보고 싶다는 열화와 같은 요청에 힘입어 여러 차례 모사본이 제작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세 권의 화첩이 소장되어 있고 선문대박물관에도 있다.

‘희우정’은 소동파의 시 ‘희우정기(喜雨亭記)’를 그린 작품이다. 소동파가 27세 때였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산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해 보니 가뭄이 심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비는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은 타죽기 마련이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다. 삼 일 동안 쉬지 않고 시원스럽게 내렸다. 쩍쩍 갈라지던 논바닥을 적시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소동파를 비롯한 관민들이 크게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어떻게 기뻐했을까. ‘희우정기’에 따르면 ‘관리들은 관청의 뜰에 모여 기뻐하고, 장사꾼들은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농부들은 들에서 손뼉을 치며 기뻐하니, 근심하던 자 즐거워하였고, 병이 났던 자 기뻐하였다.’ 그때 마침 정자가 완성되었다. 소동파는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지었다. 기쁜 비를 기념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옛사람들이 기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들어 이름을 지었으니, 잊지 않고 길이 기억하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목민관 소동파가 백성들의 근심과 기쁨을 함께하고자 했던 마음이 그러하였다. 농사를 근본으로 하는 민족에게 비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당나라의 두보(杜甫)도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春夜喜雨)’라는 시를 남겼다.

조선의 왕들 ‘희우’에 빠지다

조선에서도 ‘희우’에 관련한 일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기재잡기(寄齋雜記)’ 등 풍속과 야사를 다룬 책에는 태종(太宗)과 관련한 비 소식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세상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가뭄이 어찌나 심하던지 거의 모든 산천에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자 세종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죽어 하늘에 올라가면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과연 태종이 승하하자 큰비가 내려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부터 매년 음력 5월 10일 태종의 기일에는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太宗雨)’라고 하였다. 이 글에는 희우가 태종우로 각색되는 과정이 그럴듯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태종을 그만큼 인자한 성군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우 외에도 궁궐에서는 희우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회자되었다. 그중 가장 예술적인 흥취를 잘 보여준 사례가 세종 때의 일이다. 양화도 동쪽 언덕(마포구 망원동)에는 망원정(望遠亭)이라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있었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의 형이다. 평소 두 사람은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다. 세종이 농사의 상황을 살피고자 이 정자에 왔는데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않았다. 세종은 술잔을 기울이며 형에게 가뭄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술이 웬만큼 취했을 때 느닷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온종일 내렸다. 세종은 그 기쁨을 담아 ‘희우정’이라는 정자 이름을 하사하였다. 망원정이 희우정으로 개명을 하게 된 사연이다.

그때 이후 세종은 희우정에 자주 거동하였고 때로는 여러 날을 묵기도 했다. 어느 날은 당대의 풍류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성삼문(成三問), 임원준(任元濬)과 함께 희우정에 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을 했다. 이때 동궁이던 문종이 동정귤 두 쟁반을 보내면서 시를 지어 올리라고 했다. 그곳에 있었던 명사들은 시를 지었고, 안평대군은 그 풍경을 글로 썼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몽유도원도’의 화가 안견(安堅)은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이다. 물가에서 달을 감상한다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세종 이후에도 희우에 관련한 일화는 계속되었다. 성종은 비가 올 때마다 신하들에게 ‘희우부(喜雨賦)’를 지어 올리게 했다. 영조는 희우를 맞는 기쁨을 단순히 시를 짓게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활쏘기 놀이를 했다. 또한 희우랑(喜雨廊)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 전설사(典設司)에 걸라고 명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정조 역시 비를 보고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친정을 시작하던 바로 그해(1777)에 누각을 중건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 한 달 남짓 계속되던 가뭄이 해소되었다. 이에 정조는 아주 상서로운 일이라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누각의 이름을 ‘희우루(喜雨樓)’라 짓고 그 기록을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남겼다. 지금도 창덕궁에는 희우루가 건재하다.

희우와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인 반응을 보인 왕은 숙종이었다. 숙종도 재위 8년(1682) 3월 19일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다가 비가 내리자 ‘희우시(喜雨詩)’라는 시제를 내어 근신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8년 후인 숙종 16년(1690) 4월에는 그야말로 가뭄이 심각했다. 잇달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소용없었다. 계속된 가뭄으로 민가에서는 불이 났고 해로(海路)에서는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었다. 식량을 운반하던 배가 침몰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발생했다. 그러자 숙종은 하루 뒤인 4월 25일에 가뭄에 대한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여러 사람들의 협조를 구했다. 숙종은 자신의 덕이 모자라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큰물, 가뭄, 바람, 서리의 재앙이 거르는 날이 없다”고 하면서 “속이 타는 듯하여 차라리 죽고 싶으나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어서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므로 식량이 떨어지면 나라가 따라서 망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말과 더불어 “정부에서 직언을 구하되, 위로는 군덕이 부족한 것과 아래로는 시정의 잘잘못을 모두 숨김없이 아뢰게 하라”고 하교했다. 직언하는 사람의 ‘말이 방자하고 오만하더라도 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도 붙였다. 이런 재변을 가져온 것이 모두 자신의 덕이 없어서인데 신하들을 꾸짖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숙종의 하교는 단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죄수들을 대폭 사면하고 석방시키는 등 실천으로 옮겼다. 그 간절함이 하늘에 통해서였을까. 죄수들을 풀어준 다음 날 바로 비가 내렸다. 숙종은 얼마나 기뻤던지 창덕궁에 있던 ‘취향정’이란 초당의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희우정’으로 고쳤다. 지금도 창덕궁에 가면 희우루와 마찬가지로 희우정도 볼 수 있다. 그까짓 비 좀 온 것이 무슨 대수라고 굳이 소동파에서부터 조선의 왕들까지 줄줄이 소환해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수군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인 사회에서 비는 그 대본을 키우는 바탕인 것이다. 어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견. ‘적벽도(赤壁圖)’. 조선 전기. 비단에 색. 161.2×101.8㎝. 국립중앙박물관(왼쪽). 아래는 인물 부분 확대 그림.
안견. ‘적벽도(赤壁圖)’. 조선 전기. 비단에 색. 161.2×101.8㎝. 국립중앙박물관(왼쪽). 아래는 인물 부분 확대 그림.

소동파, 유배지에서 적벽을 감상하다

다시 소동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세종 때 ‘임강완월도’를 그린 안견은 ‘적벽도(赤壁圖)’도 그렸다. ‘적벽도’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그린 작품이다. 소동파는 여러 차례 유배를 가거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43세 때 조정을 비방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한 후 후베이성(湖北省) 황저우(黃州)에 부사로 좌천되었다. 말이 좌천이지 거의 유배나 다름없었다. ‘적벽부’는 이곳에서 탄생했다. 그는 46세 되던 1082년 7월 16일과 10월 15일에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집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적벽을 구경했다. 그리고 각각 글을 남겼는데 그 글이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다.

안견의 ‘적벽도’에서 소동파는 그의 특징인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배 앞머리에 앉아 있고, 중앙에는 생황을 불거나 퉁소를 든 손님들이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제갈공명이 와룡관을 쓰고, 맹호연이 호연건을 썼다면 소동파는 동파관을 썼다. ‘적벽도’는 인물보다 무성한 나무와 바위를 강조해서 그렸다. 뭉게구름처럼 그린 산과 그 위에 짧은 필치로 그린 풀, 침식된 듯 흑백이 뚜렷한 바위, 게 발톱처럼 날카롭게 그린 소나무 잎 등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런 적벽도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만 보면 소동파의 황저우 생활이 매우 낭만적이고 풍류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 그의 살림살이는 매우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마땅히 집을 지을 땅도 없어 군부대가 있던 자갈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소동파는 자신이 사는 집을 ‘동쪽 언덕’이란 뜻으로 ‘동파(東坡)’라고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불렀다. ‘동파노인’이란 뜻으로 ‘파옹(坡翁)’으로도 불린다. 그는 소동파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름은 소식(蘇軾)이고, 자(字)는 자첨(子瞻)이다. 그의 시는 아버지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중국과 조선시대 선비들은 ‘전적벽부’와 ‘후적벽부’를 줄줄 외울 만큼 그의 시를 사랑했다. 청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은 서재 이름을 ‘보소재(寶蘇齋)’라고 지을 정도로 소동파를 좋아했다. 보소재는 ‘소동파를 보물처럼 생각하는 서재’라는 뜻이다. 옹방강은 보소재에 소동파의 초상화를 3점이나 모셔놓고 해마다 소동파의 생일날이 되면 그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소동파의 후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그 정도였다. 이 3점의 초상화 중에는 소동파가 말년에 후이저우(惠州)로 귀양 갔을 때 갓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가 있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젊은 시절 중국에 갔을 때 평생의 스승이 된 옹방강의 서재에서 이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김정희 또한 공교롭게도 55세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9년을 보냈다. 이때 제자 허련(許鍊)으로 하여금 ‘동파입극도’를 번안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 작품이 ‘완당선생 해천일립상(阮堂先生 海天一笠像)’이다. 선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조차 자신과 소동파를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동파입극도’는 여러 점이 현존한다.

천재시인 소동파, 요리로 소통하다

소동파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았던 비결은 단지 그가 시를 잘 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편벽한 오지에 던져지더라도 불평불만을 하는 대신 쾌활함을 잃지 않고 살았다. 또한 어떤 환경에서도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소동파가 항저우에서 백성들에게 동파육을 만들어 준 이야기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들으면 소동파가 상당히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느낄 수 있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지만 11세기 송나라 때만 해도 상류층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대신 양고기를 먹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돼지고기 값이 ‘진흙처럼 싸도’ 요리법을 알지 못해 먹지 못했다. 소동파가 백성들이 바친 돼지를 직접 요리해 나눠 먹은 것도 요리법을 알려주고자 한 의도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소동파는 요리를 아주 잘했다. 그는 “직접 크고 작은 요리 칼을 들고, 물고기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손님들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들 배불리 먹고 싶어 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소동파가 직접 요리법을 개발한 이유는 꼭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리사를 쓸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셀프서비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람들과의 소통에 요리만큼 좋은 핑곗거리도 없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긍정이 없었다면 집어들었던 칼도 내던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가 술을 좋아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매개체로 삼기 위해서였다. 술꾼이었을 것 같은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소동파는 그다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술잔만 봐도 취했다’고 할 정도로 주량이 약했다. 그런 그가 술꾼처럼 항상 술을 담갔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몸에 병이 없을 때도 응급환자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항상 많은 약을 상비해놓은 것과 같은 조치였다. ‘적벽부’뿐만 아니라 그가 쓴 여러 편의 시에는 항상 술이 등장한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어찌 항상 술을 갖춰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적벽에 뱃놀이를 하러 갈 때도 술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소동파의 처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소동파의 우렁각시는 가난한 지아비가 불시에 찾을 것을 대비해 술 한 말을 보관하고 있었다. 소동파는 그 술을 들고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 청풍이 불어오는 강물을 따라 적벽 구경을 갈 수 있었다. 그의 우렁각시가 아니었더라면 수많은 선비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전적벽부’와 ‘후적벽부’는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그가 58세에 후이저우로 유배를 갔을 때는, 진흙처럼 싸다는 돼지고기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소동파는 양갈비 요리를 개발했다. 양고기는 원래 부유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 소동파의 살림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귀족 음식이었다. 대신 푸줏간 주인들이 버리는 양고기 등뼈를 얻어왔다. 뼈 사이에 고깃점이 조금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동파는 이 등뼈를 물에 넣고 한참 고다가 뜨거울 때 바로 건졌다. 그리고 등뼈의 물기를 말린 다음 술에 담근 후 하루 종일 씹으며 뼈와 뼈 사이에 붙어 있는 살점을 찾아내 먹었다. 그는 뼈 사이에 붙어 있는 살점을 찾아 먹는 재미가 “마치 게의 집게발 살을 발라먹는 것 같다”고 하면서 영양가가 꽤 높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 세상의 초목은 전부 하늘이 준 요리”라고 노래하면서 귀양생활의 고통을 잊기 위해 요리에 전념했다. 그의 가난함을 증언하고 초월적인 인생관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소동파는 돼지고기 요리뿐만 아니라 생선이나 야채 요리에 대한 레시피도 남겼다. 그가 개발한 요리법은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동파 자신이 거듭되는 유배생활로 빈궁한 생활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배지의 극한 상황을 그 지역의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문학은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는 100여가지에 달하는 요리법을 개발해 ‘동파주경(東坡酒經)’이라는 책을 썼다. 시인이자 탁월한 공직자였고 또한 전문 ‘셰프’였음을 알 수 있다.

소동파에게 배우는 인생의 지혜

소동파는 여러 황제를 모시면서 유배와 등용을 거듭했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지로 유배를 가면 과연 소동파처럼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긍정은커녕 분노와 배신감으로 화병을 얻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높은 관직에 몸담았던 사람일수록 낙향해 양고기 등뼈 사이의 살점을 뜯을 때마다 참담한 심정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 것이다. “내가 이렇게 끝날 사람이 아니다. 컴백하면 두고 봐라. 확 뒤집어놓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가격리를 당한 사람의 심리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소동파는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듯 살았다. 불평하고 분노하는 대신 그곳에 처한 가치를 찾아내면서 충만하게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소동파는 자신이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진리를 알았던 사람이다.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진정한 시인이었다. 도인이 따로 없다. 우리도 소동파처럼 도인이 될 수 있을까.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