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뤼겔의 명화 ‘바벨탑(Towel of Babel)’. ⓒphoto 위키피디아
피터 브뤼겔의 명화 ‘바벨탑(Towel of Babel)’. ⓒphoto 위키피디아

코로나19라는 역병(疫病)을 만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지 벌써 1개월째다. 항공편이 막히고 세계 각국으로의 출입국이 제한되면서 터키에 발이 묶인 상태다. 무리해서 뉴욕의 집에 돌아간다 해도 강제 검역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 코로나19 최고 창궐지로 떠오른 곳이 미국이란 점을 감안하면 아예 터키에 ‘역병 망명’을 하는 것이 차선책일지 모르겠다. 차이나타운은 코로나19 창궐과 관련한 공통점 중 하나다. 유럽 최대 전염병 창궐지로 떠오른 이탈리아 밀라노와 주변의 롬바르디아 지방, 미국의 3대 창궐지인 뉴욕, 시애틀, 로스앤젤레스의 공통분모가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차이나타운과 멀리 떨어진 도시, 나라일수록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터키에는 차이나타운이 없다. 터키와 국경을 맞댄 이란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다. 서방으로부터 경제제재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이란에 대거 밀려든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유독 이란에 많은 이유다. 그러나 3월 중순부터 터키에도 코로나19 바람이 불고 있다. 매일 300명 정도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3월 23일 기준) 차이나타운도 없는 나라에서, 이웃 이란을 주범으로 보고 있다. 이란에 대한 터키 국민의 불편한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다.

글로벌 대축제는 끝났다

바이러스 때문이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어제를 생각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30대 이후 삶은 인류 초유의 축제 기간인 ‘글로벌 시대’와 일치한다. 미국 아칸소 출신 46살 빌 클린턴이 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해가 1992년이다. 역사가들이 글로벌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기다.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수십여 명의 가수들이 부른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글로벌 시대 행진곡으로 유행했다.

1994년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곧바로 아마존닷컴이 등장했다.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유학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필자의 지구촌 여행 출발점도 1994년이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던 비행기 운임비가 한순간 내려간 것도 클린턴 이후의 모습이다. 26년 전 기억이지만, 불과 1000달러로 전 세계 7개 도시를 주유하는 글로벌 티켓이 선보인 적도 있다. 마일리지 서비스가 막 시작된 때여서 지구 7개 도시를 돌아다닌 뒤 도쿄~로스앤젤레스 왕복 무료 티켓도 받았다. 중국은 그 같은 흐름에 재빨리 가세한다. 곧바로 글로벌 시대 최대 수혜자로 떠오른다. 중국의 등에 올라탄 한국과 대만도 글로벌 시대 우등생으로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꿈 같은 시대로 느껴진다.

모든 것은 탄탄대로였고, 중국을 미국에 필적하는 G2라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10년, 20년 뒤 중국이 미국을 누를 것이란 전망이 신문·방송의 고정 레퍼토리로 부상했다. 코로나19는 그 같은 글로벌 시대의 논리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상상 밖 ‘변수’이다. 마치 원자폭탄 섬광 이후의 세상처럼, ‘글로벌 대축제’에 관련한 모든 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 중단되고 추락하고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진행 중인 전염병으로부터의 안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올여름까지 갈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코로나19 진정 이후의 세계가 한층 더 심각하다. 간단히 말해 글로벌 시대에 당연시하던 상식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 반대로 불법화하거나 죄악시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코로나19는 인류를 괴롭히는 2020년 한 해 동안의 ‘변수’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엮인 세상의 변화를 감안하면 앞으로 계속될, 인류 역사의 ‘상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반성과 참회의 시간에 주목받는 바벨탑

아무리 백신이 등장한다고 해도 바이러스도 거기에 맞춰 진화해나갈 것이다. 최신 바이러스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이고, 하나로 엮인 인류는 한층 더 민감하게 ‘글로벌 차원’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다. 지구촌 동반 주식 폭락, 공동체 파괴, 일방적 국익 추구, 금융위기, 국경봉쇄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일상사로 변해갈 수 있다. 이런저런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코로나19 발원지가 중국이란 점은 너무도 의미심장하다. 글로벌 시대 최대 수혜자인 중국이 한 세대 가까이 지속된 지구 대축제의 막을 내리는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전염병 창궐 시기를 맞고 있는 오늘, 어제와 내일의 주된 관심사가 다를 것이다. 당연하지만 지금 당장은 바이러스 박멸과 안전한 일상생활이 최대 관심사다. 내일의 관심사라면 글로벌 대축제 종언과 함께 밀려들, 전혀 다른 얼굴의 세계에 관한 부분이 될 것이다. 어제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일까. 곧 등장할, 세계 석학들 사이에 이뤄질 ‘반성과 고백’이 어제에 관한 얘기의 중심에 설 것이다. 인류 역사와 문화 문명사를 기반으로 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자기 비판이다. ‘모두 평등하게 풍요롭게’라는 글로벌 시대 상식과 논리 속에 드리워진 위선과 모순이 온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의학·과학으로서만이 아니라 성(聖)과 영(靈)이란 정신 차원의 논의가 어제와 관련한 주된 테마로 부상할 것이다.

인류와 지구 문제를 반성적으로 따져볼 때 떠오르는 상징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추측건대 바벨탑이야말로 대부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다 공통분모일 듯하다.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 끝까지 인간의 욕(欲)을 쌓으려다 맞이한 천벌의 상징이 바로 바벨탑이다. ‘역병 망명’의 전조였는지 몰라도, 필자는 최근 두 번에 걸쳐 바벨탑과 만났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이 남긴 명화, ‘바벨탑(Tower of Babel)’이 주인공이다. 브뤼겔은 몰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접했을 그림이 명화 ‘바벨탑’이다. ‘바벨탑’ 그림은 현재 두 점이 존재한다. 빈의 ‘미술사 역사관(Kunsthistorisches Museum)’과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반 베닝겐 뮤지엄(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이 상설 전시무대다. 거의 비슷한 그림이지만 크기가 전혀 다르다. 빈이 가로 155㎝ 세로 114㎝, 로테르담이 가로 74.5㎝ 세로 60㎝다. 미술평론가들은 빈의 그림을 대(大)바벨탑, 로테르담의 그림을 소(小)바벨탑이라 부른다.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 역사관’에 상설 전시돼 있는 브뤼겔의 ‘바벨탑’을 한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왼쪽) 브뤼겔의 ‘바벨탑’에 등장하는 구약성경 속의 니므롯 왕.(오른쪽) ⓒphoto 유민호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 역사관’에 상설 전시돼 있는 브뤼겔의 ‘바벨탑’을 한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왼쪽) 브뤼겔의 ‘바벨탑’에 등장하는 구약성경 속의 니므롯 왕.(오른쪽) ⓒphoto 유민호

대바벨탑과 소바벨탑 그림

좋게 말하면 ‘중년의 지혜’, 나쁘게 말하면 ‘꼰대의 망상’이라고나 할까. 지난해 2월과 8월,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에 들렀을 때 방문목적 영순위로 잡은 것이 ‘바벨탑’ 관람이었다. 브뤼겔은 렘브란트와 더불어 16세기 네덜란드 황금기(Dutch Golden Age)를 대표하는 화가다.

인물화·초상화로 유명해진 렘브란트와 달리, 풍경화·성화로 일관하면서 초상화 한 점 안 그린 화가가 브뤼겔이다. 인생이란 측면에서 보면 말년에 파산한 ‘대박 화가’ 렘브란트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풀뿌리 화가 브뤼겔에 한층 더 눈이 간다. 1525년생 브뤼겔은 1569년 불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지난해가 사후 450주년으로, 유럽 곳곳에서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고맙게도 명화 ‘바벨탑’은 사람들로 붐비는 기념전시관과 무관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필자의 주관적 평가지만 진짜 명화의 기준으로 ‘원래 그 자리’를 강조하고 싶다. 유명하다고 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로벌 아이돌’ 식의 그림이 아니다. 1년 365일 언제 가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그림, 현지인은 물론 한 번이라도 그림을 본 사람들을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림이 진짜 명화의 범주에 들어간다고나 할까. 루브르 ‘모나리자’는 좋은 예다. 한 장소에서 대를 이어 똑같은 메뉴로 장사를 하는, 이른바 노포(老鋪)식당 같은 명화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100명이 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보다는 5~6명의 실내악단, 초대형보다는 손바닥 크기 정물화에 더 끌린다. 크고 넓은 것을 감당할 능력도 시간도 없다. 작고 깊은 곳에서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식이다. 그러나 브뤼겔 ‘바벨탑’의 경우는 다르다. 로테르담 소바벨탑보다, 빈의 대바벨탑이 더 섬세하고 신비하게 느껴진다. 구체적인 부분에서의 묘사와 구도라는 측면으로 봐도, 대바벨탑이 한 수 위다. 초대형 탑 건설을 지시한 구약성경 속의 왕, ‘니므롯(Nimrod)’이 대바벨탑에만 등장한다는 점, 소바벨탑은 평원에, 대바벨탑은 인간들로 메워진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자, 우리가 내려가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인간의 언어를 다르게 만든 신의 저주

구약성경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관련 메시지다. 인간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하자, 신이 인간들의 언어를 전부 다르게 만들어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 바벨탑 천벌의 핵심이다. 인간이 하나로 합쳐질 경우 교만해지는 것이 필연이고, 결국은 신의 영역까지 도전하게 될 것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글로벌 시대의 상식인 ‘우리 모두 함께’는 신의 기준에서 보면 달리 풀이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기구, 대륙 간 협의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아메리카 퍼스트에만 매달리는, 글로벌 상식에 반하는 속 좁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바벨탑 교훈을 믿는 미국 남부 복음주의자들의 세계관으로 보면 정반대 해석이 가능해진다. 유엔과 같은 세계정부나 국제기구는 해석하기에 따라 바벨탑 천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림 속 바벨탑 건립 재료의 대부분은 ‘인공벽돌’이다. 신이 내린 자연 소재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머리를 통해 신에게 도전한다는 의미다. 브뤼겔은 ‘바벨탑’ 그림을 그리기 10여년 전 로마에 머문 적이 있었다.

21세기는 물론 당시 로마 제1 관광코스로 알려진 곳이 콜로세움이다. ‘바벨탑’ 그림의 모델이 된 것은 당연하다. 콜로세움은 부분적으로 대리석일 뿐, 대부분은 인공벽돌과 콘크리트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인공벽돌을 통한 초대형 창작 공간 속에서 벌어진 최대 흥행 이벤트는, 검투사 대결과 기독교 신자 처형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천루(摩天樓) 건설에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로마 당시 사용된 도구와 중장비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바벨탑’ 그림 곳곳에 세심하게 묘사돼 있다. 브뤼겔의 ‘바벨탑’은 완성체가 아닌, 건설 도중 장면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미 구름을 뚫고 세워진 상태지만 아직 얼마나 더 높아질지 모른다. 최종 건립된 바벨탑은 과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까. 그러나 브뤼겔이 지켜봤던 로마 콜로세움이 그러했듯이, 신의 코앞에 들어선 엄청난 건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초라하게 변해간다. 영광과 명예를 위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신의 뜻에 벗어날 경우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바이러스가 지구촌의 균형자?

인간만 불행할 뿐, 인간 외의 영역은 행복하게 변해가는 것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라고 한다. 당장 보면 중국 땅 전체가 청정 하늘로 변한 지 오래다. 인간에게 멀어질수록 자연은 자연스럽게 뻗어간다. 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이러스야말로 지구 전체의 균형을 잡는 무게중심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주목할 부분은 바벨탑과 노아의 홍수와의 관계다. 노아의 홍수는 바벨탑에 앞서 내린 신의 천벌이다. 따라서 바벨탑 건설에 나선 인간은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인 셈이다. 바벨탑 건설을 지시한 니므롯은 노아의 직계 증손자다. 그러나 불과 4대(代)가 지난 시간인데도, 노아의 후손조차 물의 천벌을 잊고 신에게 정면도전한다. 신학적·종교적 관점에서 바이러스를 신의 천벌이라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세계관에 달렸지만, 글로벌 시대에 드러난 인간의 행적을 정상적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뭔가 도(度)를 넘어선 상태라는 느낌이 든다.

글을 쓰는 순간, 멀리 이슬람 모스크에서 ‘에잔(Ezan)’이 시작된다. 하루 6번 들리는, 기도와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육성 메시지가 에잔이다. 이슬람 국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독특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이뤄진 의식이다. 뜻도 모를 아랍어 에잔이지만, 왠지 귀와 가슴속으로 깊게 파고든다. 하늘이 노하고 있다는, 인간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절규와 경고로 들린다. 무신론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 기도·반성과 더불어, 명화 ‘바벨탑’이 그 같은 갈증을 풀어줄 혜안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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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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