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에 입성해 성공적으로 어학연수 생활에 정착하나 싶었는데, 1주일 만에 코로나19로 인한 국가비상사태가 전격적으로 선포됐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3월 15일 저녁 생방송을 통해 페루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은 긴급명령을 발령했다. 대통령의 발표문 내용은 15일간 전 국경 폐쇄와 전 국민의 사회적 격리가 핵심이었다. 즉 비상사태 기간 중 식품과 약품의 공급 그리고 금융 등에 관계되는 시설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을 닫게 하고 국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를 접하고 주페루 한국대사관에서는 긴급공지를 통해 출국을 원하는 한국인의 경우 그다음 날인 16일 자정 전까지 출국을 권고했지만 대부분 여행객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나는 어차피 3개월 체류를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출국 고민은 없었지만 문제는 어학연수였다. 어학원 폐쇄가 불 보듯 뻔한데 큰일이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행히 학원은 발 빠르게 온라인으로 수업 방식을 전환했다. 그러나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인지라 또 걱정이 앞섰다. 필자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초,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전공의 시절이었다. 당시 흉부외과 학회 월례 집담회에 초청된 외부 강사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던 장면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비슷한 시기에 흉부외과 의국에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 들어왔지만 다들 활용법을 몰라 한동안 게임용으로 사용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미션 1. 온라인 강의실 들어가기
아무튼 우리 세대에게 컴퓨터는 편리함보다는 스트레스의 존재다. 온라인 수업에 필요한 프로그램은 어떻게 설치해야 하나 막막해하는 내게 어학원 직원은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만 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설치할 수 있다고 다독였다. 그러나 필자는 과거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전문가에게 간단한 것이지, 비전문가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학원 직원에게 지금 숙소로 가서 노트북을 바로 가지고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 5G 속도로 숙소로 달려가 노트북을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이 달라서 그런지 그 직원도 프로그램을 쉽게 설치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직원들이 긴급 투입돼서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설명만 듣고 숙소로 돌아갔더라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어학원은 그날 오전까지만 근무하고 바로 보름간 폐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설치한 프로그램을 통해 담당 선생님과 직접 화상 테스트까지 마치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됐다.
숙소로 돌아와 이메일을 뒤늦게 체크해 보니 지난 밤중에 어학원 측으로부터 ‘긴급 내용’ 제목의 메일이 와 있었다. 방금 어학원에 가서 들은 내용과 비슷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코로나19 확진자가 71명 정도 되는 상황(3월 15일 기준)에서 이런 전격적인 조치는 생각지 못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메일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우리 어학원 측에서는 우리가 고용하고 있는 교사들이 이번 사태로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신속하게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으니 협조를 부탁합니다.(Sincewe don’t want our employees to lose their salaries as a result of this outbreak, we are working as fast as we can to convert all in-person scheduled lessons to online lessons so that our instructors continue their work with their students online.)’
우리 같으면 ‘학생들이 귀중한 공부 기회를 잃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 등의 표현을 했을 것 같은데 강사들의 월급을 먼저 중요한 사유로 내건 것이 한국과 페루의 문화 차이로 여겨져 흥미로웠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다음 날부터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미리 테스트를 했지만 과연 화면이 제대로 열릴지 조마조마했다. 내게는 페루의 비상사태 선언보다 온라인 강의실 입장이 더 비상사태로 여겨졌다. 어학원에서 배운 대로 준비된 버튼을 클릭하니 에리카 선생님이 ‘짠’ 하고 나타났다. 체면 때문에 차마 말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에리카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온라인 수업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익숙해지니 교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시로 다른 인터넷 화면을 띄워가면서 설명과 토론을 이어가니 효율적이었다. 화면 한쪽 칠판에 필기도 할 수 있어 은퇴 교수에게는 신세계였다.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페루의 확진자는 계속 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인 3월 22일에는 총 환자 수가 363명, 사망자도 5명을 기록하고 있다. 페루 정부는 18일 추가 대책으로 저녁 8시부터 아침 5시까지 전면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곤층이 많은 페루 국민들에게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정작 생계수단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다. 페루 정부는 비상사태 기간 중 취약층에 대해 한 가구당 380솔(약 14만원)씩 지원금 보조를 발표했지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