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 공원 한구석에 쓸쓸하게 놓여 있는 잉카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청동 기마상.
무라야 공원 한구석에 쓸쓸하게 놓여 있는 잉카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청동 기마상.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페루의 국경이 폐쇄되기 전, 슬라이딩하듯 간신히 리마에 입성해 어학연수에 돌입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어학원에 나간 지 1주일 만에 페루 국가비상사태가 선언돼 2주째 2명의 강사로부터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26일, 마루틴 비스카라 페루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4월 12일까지 13일간 더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부분 예상하던 일이라 특별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현지 어학연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4시간 동안 선생님들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노라면 실력이 늘고 있다는 즐거움도 크지만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숙제도 많아 수업이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로는 스페인어 정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5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처음 공부를 시작한 데다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함께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학원 선생님들은 발음도 정확하고 학생의 수준을 고려한 속도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인지 소통이 꽤 원활한 편이다. 현지인들과 잠깐씩 대화를 나눌 때도 웬만큼 자신감이 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으며 처절한 좌절감을 안겨준 순간들이 있었다. “진정한 상대를 만나기 전에는 ‘뭐 좀 한다’고 까불지 말라”는 깨우침이었다.

한때 피사로의 웅장한 청동 기마상이 위풍당당하게 정문 출입구 앞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성당의 전경.
한때 피사로의 웅장한 청동 기마상이 위풍당당하게 정문 출입구 앞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성당의 전경.

스페인어 정복은 아직 멀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며칠 후 집주인으로부터 숙박료를 받으러 가겠다는 이메일 연락이 왔다. 서로 알맞은 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특별한 문제가 없느냐고 묻길래 실내 냉방기 연결 호스에서 물이 조금씩 샌다고 수리를 요청했다. 약속한 날 활달해 보이는 50대의 여주인이 기술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집주인은 필자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 정말 잘됐다면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월세나 그 외 아파트에 관한 설명은 그런대로 알아들을 만했지만, 문제는 냉방기에 관련된 것이었다. 필자가 스페인어를 아주 잘한다고 오해한 기술자는 전문적인 단어들을 구사하며 냉방기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연결 호스를 제거하고는 아래쪽에 물받침통을 놓아둔 채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었나? 당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행히 물이 새는 양이 많지 않아서 그럭저럭 버티면서 집주인에게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필자의 스페인어 실력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걱정이 한몫했다.

두 번째 이야기도 아파트에 관련된 것이다. 집주인이 왔다 간 후 TV 신호가 잡히질 않았다.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다시 방문한 집주인에게 수리를 부탁했다. 집주인도 손을 대보다 결국 기술자를 불렀다. 며칠 후 ‘Claro’라는 통신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기술자 두 명이 나타났다. 집주인에게 필자의 스페인어 실력에 관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들도 오자마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구사하며 스페인어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태연하게 알아들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진땀을 흘렸다. 어쨌든 TV 수리가 끝나는가 했는데 기술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필자에게 대뜸 수화기를 넘기면서 받아보라는 것이 아닌가. 순간 필자의 스페인어 실력을 실토할까 고민했지만, 지켜보고 있는 두 기술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전화 상대방은 기술자들과는 달리 또렷한 목소리로 “서비스에 만족하느냐” “기술자들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설명해 주었느냐”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니 기술자들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아파트 운동 시설인 힘나시오(gimnasio)에서였다. 혼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파트 여자 경비가 문을 열더니 뭐라고 한참 말을 했다. 표정으로 보아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침착하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달라고 했는데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상 더는 물어볼 수 없어서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더니 문을 열어둔 채 웃으면서 떠났다. 지금까지도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곧이어 청소 직원이 쳐다보면서 지나간 것으로 보아 힘나시오 청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다. 스페인어에 있어 진정한 상대는 역시 학원가나 관광지 같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강호의 고수들과 얼마나 부딪혀야 상대가 될지 걱정이 앞섰다.

피사로의 청동 기마상이 두 번째로 위치했던 장소. 동상 철거 후 피사로 광장에서 페루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피사로의 청동 기마상이 두 번째로 위치했던 장소. 동상 철거 후 피사로 광장에서 페루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리마의 창업자 동상이 공원 한 귀퉁이에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며 공부하다 머리도 식힐 겸 구시가지에 있는 역사지구 관광에 나섰다. 국가비상사태 선포 전이었다. 역사지구는 1535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조성된 곳으로 리마시의 첫 태동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역사지구를 둘러보던 중 대광장의 북쪽 외진 곳에서 ‘무라야(Muralla)’라고 불리는 작은 공원을 만나게 되었다. 관광객들도 거의 찾지 않는 곳이다. 무라야는 스페인어로 성벽이란 뜻이다. 17세기경 이 부근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돼 유적 보존을 겸해서 아예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주차장 옆 구석진 곳에는 주위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엄한 청동 기마상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잉카의 정복자이자 리마시의 창립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147?~1541) 동상이었다. 전혀 격이 맞지 않아 보이는 이 장소에 그의 동상이 왜 서 있는 것일까?

이 동상은 미국의 유명 조각가였던 램지(Charles Cary Ramsey ·1879~1922)가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 전시용으로 요청받고 만든 것이다. 전시 후 복제본을 더 만들어 현재 모두 세 작품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작가의 활동 무대였던 미국 뉴욕 버펄로에 있고, 다른 하나는 피사로의 고향인 스페인 트루히요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가 바로 무라야 공원에 있다. 피사로 동상이 이곳에 서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동상은 램지가 죽은 후 미망인이 리마시에 기증한 것이다. 1935년 1월 18일 리마시 창건 400주년을 기념해 리마 대성당 앞의 장엄한 축대 위에 설치됐다. 리마시는 1535년 1월 8일 피사로가 첫 주춧돌을 놓았고, 리마 대성당 안에는 피사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니 안성맞춤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당시에는 피사로를 리마의 창립자이자 미개한 옛 페루, 즉 잉카에 문명을 전파한 사람으로서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리마 교구 측에서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피사로가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가 보이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지적하면서 지속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교구의 문제 제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리마시는 어쩔 수 없이 1952년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르마스 광장 한쪽에 작은 광장을 조성해 피사로의 동상을 옮겼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리마의 한 건축학 교수인 아구르토(Santiago Agurto Calvo)가 “피사로는 영웅이 아니라 원주민 학살의 범죄자이자 잉카 문화의 약탈자”라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아구르토는 피사로의 동상이 리마의 중심 광장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면서 캠페인을 벌이고 여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거기다 아구르토의 오랜 지인(Luis Castaneda Lossio)이 리마 시장에 당선되면서 2003년 4월 28일 새벽 결국 피사로의 동상은 두 번째 철거를 당하는 신세가 됐다. 물론 반대세력도 있었다. 페루의 유명한 소설가 바르가스는 “나치와 같은 극단적인 편 가르기 발상”이라고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철거된 피사로의 동상은 시 창고에 방치돼 있다가 무라야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한구석에 겨우 세워지게 됐다. 과거와는 달리 웅장한 받침대를 없애고 콘크리트 위에 세워놓은 데다 설명문도 붙어 있지 않아 생뚱맞아 보인다. 이런 부침을 겪은 동상의 주인공인 피사로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술자와의 스페인어 소통 문제로 물받침통으로 임시방편을 하게 된 냉방기.
기술자와의 스페인어 소통 문제로 물받침통으로 임시방편을 하게 된 냉방기.

역사를 바꾼 피사로 원정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스페인의 벽지 마을인 트루히요라는 곳에서 군인 출신 아버지와 천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돼지 치는 일을 하며 교육받을 기회도 없이 평생 문맹으로 지냈다. 이탈리아 등에서 용병 생활을 거친 뒤 인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1502년 신대륙 이스파니올라(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로 떠난다. 그곳에서의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피사로는 1509년 오헤다(Alonso de Ojeda) 원정 선단에 합류하여 콜롬비아를 탐험했으나 원정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다 1513년 바스코 발보아가 이끄는 탐험 선단에 합류해 유럽 최초로 태평양까지 진출한 팀의 일원이 됐다.

당시 총독과 발보아의 알력 다툼에서 총독 편에 선 피사로는 총독의 신임을 받고 파나마시티 시장이 된다. 그때 먼 친척 관계인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ándo Cortés·1485~1547)가 1521년 소수 병력만으로 멕시코에서 아스텍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큰 자극이 됐다. 그도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만든다. 1524년 파나마를 떠난 최초의 원정은 정보 부족, 식량 부족, 적대적인 원주민 때문에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1526년에 2차 원정에 나서지만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이 파나마 총독으로부터 귀환을 종용받는다. 돌아갈 생각이 없던 피사로는 칼로 땅에 선을 긋고 “이쪽은 부유한 잉카, 저쪽은 가난한 파나마다. 나와 함께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아라”고 선언한다. 결국 13명이 남게 되는데 이들이 ‘명예로운 13인(Los Trece de la Fama)’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총독은 결국 피사로에게 지원병을 보내주고 피사로는 탐험을 계속해 1527년 4월 마침내 잉카제국의 변방인 현재 페루 북서부의 툼베스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거대 잉카제국과 세계 역사를 바꾼 금은보화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파나마로 일시 귀환한 피사로는 총독에게 새로운 원정대 조직을 요청한다. 그러나 총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사로는 1528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러 나선다. 왕과의 만남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때 피사로는 지원부대뿐만 아니라 점령지에 대한 행정지배권과 원정대의 제 일인자로 공식 인정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이는 동료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불화의 불씨가 된다.

파나마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피사로 원정대는 잉카를 향한 마지막 원정에 나선다. 2차 원정 때 발견한 툼베스를 거쳐 긴 여정 끝에 1532년 11월 페루 북부의 온천마을인 카하마르카(Cajamarca) 근처에 도착한다. 여기서 피사로는 잉카의 새로운 황제 아타우알파가 대군을 이끌고 근처에 머물러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키토(현재 에콰도르의 수도)에 근거를 두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오랜 내전에서 승리한 뒤 쿠스코를 향해 느긋하게 남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피사로 원정대의 병력 규모는 보병 106명에 기병 62기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잉카 병력은 5만명은 족히 되는 대군이었지만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의 기습공격으로 포로가 된다. 168명에 불과한 스페인군에 의해 수만 명의 잉카군이 괴멸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잉카의 운명, 나아가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운명을 한순간에 바꾼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를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 혹은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아타우알파가 피사로에게 “내가 잡혀 있는 방의 부피만큼 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황제 생포 이후 후방 지원을 담당하고 있던 알마그로의 후발대가 도착한다. 이들은 아타우알파의 생포에 직접 공이 없다는 이유로 재산 분배에서 제외된다. 그렇지 않아도 피사로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알마그로의 불만은 더욱 쌓여 간다. 아타우알파는 결국 스페인군에 의해 교살당하고 피사로는 쿠스코까지 점령한다. 쿠스코 침공 때 스페인군은 아타우알파에게 살해당한 쿠스코의 옛 황제 우아스카르의 복수자임을 내세워 당당하게 입성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을 성취한 피사로는 쿠스코를 떠나 새로운 수도가 될 신도시 건설을 시작한다. 1535년 1월,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의 시작이다. 그런 와중에도 몰락한 잉카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피사로와 알마그로 세력의 반목은 계속됐다. 당시 스페인 왕은 잉카의 북부는 피사로가, 남부는 알마그로가 다스리도록 칙령을 내리지만 그 경계를 놓고 또 다투게 됐다. 결국 1537년 알마그로가 무력으로 쿠스코를 점령하면서 피사로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알마그로는 피사로 측에 포로로 잡혀 사형당하지만, 훗날 피사로의 비극으로 연결될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부친의 처형 이후 복수를 다짐한 알마그로의 아들은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541년 6월 26일, 저택에서 손님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피사로를 살해한다. 피사로는 알마그로의 아들 일당과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낭자한 자신의 피에 십자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피사로의 나이는 적어도 62세(많게는 70세)였다. 세계 역사를 바꾼 피사로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안치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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