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에 찬사를 보낸다. 그럼에도 이른바 진보세력은 우리 현대사를 ‘실패한’ 역사로 규정한다. 심지어 ‘적폐’로 폄훼한다. 이로 인해 우리의 이념적 갈등의 중심에는 “대한민국은 ‘성공한’ 국가인가, ‘실패한’ 국가인가”라는 논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무거운 질문에 상당한 단초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국가의 성공 또는 실패 요인을 광범위하게 추적한 고전적 저작이 있다. 바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2012)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들의 결론은 단순명료하다. 어느 나라든 ‘폐쇄적’ 제도를 채택하면 실패하고, ‘포용적’ 제도를 채택하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발전은 지리적 위치나 문화에 의해 좌우된다는 가설이 널리 통용되었다. 그런데 저자들은 ‘무엇이 남북한의 운명을 갈랐을까’라고 묻는다. 남북한은 지리적 위치나 문화 등이 완전히(!) 동일함에도 오늘날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 세계적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비추어 지리적 위치 가설이나 문화적 가설은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무지가설(ignorance hypothesis)도 있다. 한마디로 적절한 발전 전략을 찾지 못해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모든 국민에게 이로운 정책은 한사코 외면하면서도 전쟁과 노예 장사에 필요한 총기는 재빨리 사들인다. 그들은 무지하기는커녕 영악하기 짝이 없다. 다만 그들의 판단 기준이 자신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발전의 격차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그 답은 바로 한반도에 있다. 남북한은 1945년 전혀 다른 경제운용 방식을 채택하면서 운명이 갈렸다. 한국은 사유재산과 인센티브가 인정되는 시장경제를 채택했다. 특히 박정희는 성공적인 기업에 대출과 보조금을 몰아주며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반면 북한은 중앙통제정책과 주체사상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불과 반세기 만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나라는 소득격차가 15배 이상이나 벌어졌다.

이런 격차의 근원은 다름아닌 ‘제도’다. 즉 한국의 발전은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란 경쟁 환경을 제공하여 누구나 기회를 얻도록 하고, 사유재산을 확고히 보장하며, 법 체계를 공정하게 시행하는 제도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고 개인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런 제도 아래에서는 인센티브를 얻기 위해 경제활동이 왕성해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궁극적으로 경제적 번영이 달성된다.

반면 ‘폐쇄적’ 경제제도는 경제가 소수의 손에 의해 조종되고 이득이 소수에 독점되는 제도다. 그런 제도에서는 인센티브가 부재하여 사람들이 의욕을 잃고 또한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보이지 않는 손’은 아예 말살된다. 대개 폐쇄적 경제제도는 폐쇄적 정치제도에 의해 지지된다. 극단적 사례가 공산주의의 중앙계획경제다.

그러나 폐쇄적 정치제도도 어느 정도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지배층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부문에 자원을 몰아주며 발전을 독려한다. 그런 전략이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구소련의 한때 눈부신 발전이었다. 특히 군수산업이나 우주산업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오늘날 북한도 미사일 강국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발전은 경제 전반에 걸쳐 시너지와 혁신을 추동하기 어렵다. 결국 구소련의 경제는 한계에 부딪혀 붕괴했다.

한편 오늘날 중국의 발전도 눈부시다. 중국은 정치제도는 폐쇄적이지만 경제는 어느 정도 개방적으로 운용된다. 이를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폐쇄적 정치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지금의 번영이 얼마나 지속할지 의문이다. 정치가 경제를 통제하는 한 근본적인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중국 경제도 언젠가 경착륙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 역시 어느 정도 폐쇄적 정치제도가 경제 성장을 이끈 경우다. 그러나 적절한 순간에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상당히 포용적 정치제도를 구축하면서 포용적 경제제도를 더욱 강화했다. 한국이야말로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선순환된 모범 사례다. 반대로 이것들이 악순환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똑같이 전제주의 국가였다. 그런데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왕실이 독점하며 폐쇄적 정치제도를 강화했다. 프랑스 역시 대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절대왕정을 고수했다. 반면 영국은 명예혁명 등을 통해 포용적인 정치제도를 구축했다. 왕권이 축소되고 권력이 분산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변방인 섬나라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나라들은 독립 이후에도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폐쇄적 제도를 온존시켰다. 그 결과 일부 엘리트들이 권력과 경제적 이득을 독점한 가운데 민중의 생활은 여전히 비참하다.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을 용인하며 폐쇄적인 제도를 고수했던 남부의 발전이 더뎠다. 하지만 지배층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폐쇄적인 제도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결정적 분기점이 있다. 그런 순간의 선택과 사소한 제도적 특성이 어우러져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는 우발성도 작용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를 채택하느냐이다. 그런 분기점에서 개방적 제도를 채택하면 국가가 흥(興)하고, 폐쇄적 제도를 채택하면 쇠(衰)한다는 것이 역사의 반복적인 교훈이다.

우리에게는 광복이 현대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그때 우리는 포용적 시장경제를 채택했고, 개발연대에는 중앙집권적 전통을 활용해 유무형의 자산을 효과적으로 동원했다. 또한 마침 개막된 동서냉전도 긍정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우리의 번영은 결정적 분기점을 맞아 현명한 선택을 했고, 제도적 장점을 잘 활용했고, 거기에 운까지 따라준 결과다.

우리에게는 최근에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패기가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라는 또 다른 분기점이 다가옴에도 지금 우리는 온통 과거 논쟁에 휘말려 있다. 그 바람에 미래 담론은 아예 씨가 말랐다. 더구나 과거 논쟁도 오로지 이분법적 도덕 논쟁뿐이다. 이처럼 역사를 선악으로 단순하게 재단하는 것은 졸렬한 이상주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줄기차게 “폐쇄적 제도를 채택한 국가는 실패하고 포용적 제도를 채택한 국가는 성공한다”고 역설한다. 대한민국은 고난을 뚫고 포용적 제도를 정착시켜 어렵사리 선진국 대열로 올라선 세계적인 모범 사례다. 개선의 소지는 얼마든지 있지만, 통째로 부정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감상적인 역사 폄훼는 자해요, 자학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새로운’ 결정적 분기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최근에 정치, 경제, 교육 등에서 우리 사회의 제도적 포용성이 도리어 악화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곧 선거다.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누가 더 적합한지도 이번 선거의 중요한 선택 기준이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