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 중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네(含哺鼓腹)’.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 중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네(含哺鼓腹)’.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

태평성대라는 말이 있다. 혼란 따위가 없어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시대를 뜻한다. 태평성세라고도 한다. 반대말은 난세다. 지금은 태평성대일까 난세일까. 어느 누구도 지금을 태평성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고 나면 옆에 있던 사람이 팍팍 쓰러지는 전대미문의 글로벌 쇼크를 당하다 보니 태평성대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한 행동으로 보인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는 ‘샹그릴라’라는 이상향이 나온다. 샹그릴라는 쿤룬산맥의 티베트고원에 숨겨져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계곡으로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다. 그러나 무릉도원이 그러하듯 샹그릴라 또한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장소다. 그렇다면 태평성대는 샹그릴라나 무릉도원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나 가능할까. 사람살이에는 언제나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지만 흥보다는 망함이, 성함보다는 쇠함이 더 길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류 역사에 과연 태평성대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어떤 시대를 태평성대라고 부를까. 이에 대한 물음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주저 없이 ‘요순시대(堯舜時代)’라고 대답했다. 도대체 요순시대가 어떠했기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태평성대라고 대답했을까. 그 해답을 통해 태평성대의 의미를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배 두드리고 발 구르며 노래 부른 두 노인

요(堯)임금 때였다. 요임금은 BC 24세기경에 존재했다는 신화시대의 제왕이다. 그는 제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던 해 백성들의 사는 모습이 궁금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민정시찰을 나갔다. 소위 미복잠행(微服潛行)이었다.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이들이 손잡고 “우리 백성들 살리신 건 모두가 그대의 지극한 덕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임금님 법도를 따르기만 하면 되네”라고 노래를 불렀다. 또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어떤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음식을 먹는데, 임금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그 노인이 불렀다는 노래가 바로 ‘격양가(擊壤歌)’다. ‘격양’은 땅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배를 두드리며 발을 구른다는 ‘고복격양(鼓腹擊壤)’과,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함포고복(含哺鼓腹)’도 같은 말이다. 음식이 입안에 들어 있는 상태를 포(哺)라고 한다. 배고프던 시절에는 배부른 것이 최고다. 실컷 먹어 배가 부르니 흐뭇해진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몸을 뒤로 젖히고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면서 장단에 맞춰 발도 까닥까닥하게 된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고관대작도 전혀 부럽지 않다. 난세에는 이렇게 살 수 없다. 태평성대니까 가능하다. 배가 고파 사는 것이 팍팍하면 백성들은 배를 두드리지 않는다. 대신 임금을 원망하고 하늘을 탓한다. 그런데 격양가를 부르는 이 노인네들은 임금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다는 태도다. 누가 정치를 하든 상관없이 농사짓고 만족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정치가 안정되었다는 표시다. 이 모습을 보고 요임금은 비로소 안심했다. 위정자가 국민을 걱정하는 대신 국민이 위정자를 걱정하는 우리 눈에는 심하게 부러운 모습이다.

격양가의 이야기를 그린 ‘함포고복’은 ‘명현과 제왕의 사적을 그린 그림(名賢帝王事蹟圖)’ 8폭에 들어 있다. 그림은 사선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경계로 둘로 나뉜다. 두 개의 이야기가 결합되었다는 뜻이다. 위쪽에는 두 아이와 아빠가, 아래쪽에는 두 노인과 요임금이 보인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는,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는 두 아이가 이어준다. 그 아이들은 누구일까. 요임금이 첫 번째 마을에 들렀을 때 만난 아이들이다. “우리 백성들 살리신 건 모두가 그대의 지극한 덕이니…”라고 노래한 그 아이들이다. 그림 아래쪽에는 두 노인이 집 앞에 앉아 있다. 요임금이 다른 마을에서 만난 노인들인데 그림에는 첫 번째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과 한 화면에 그렸다. 이런 기법을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라 한다. 한 공간 안에 두 개 이상의 시간이 공존하는 장면 구성법을 말한다.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다른 공간에 그려야 하는 장면을 한곳에 그렸다. 이야기가 있는 옛 그림에서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장치다. 이시동도법을 알고 나면, 그림 속에 허전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 1·2·3을 그려 넣었다고 생각한 사람도 결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중요한 인물일 때가 더 많다.

아래쪽 화면에서 두 노인은 모두 윗옷을 풀어헤치고 ‘고복’을 하며 노래를 부른다. 지팡이를 든 노인의 오른발은 땅바닥 쪽으로 젖혀져 있다. 노랫소리에 맞춰 ‘격양’을 한다는 뜻이다. 그림 맨 하단에는 우물도 보인다. 이 우물은 구색 맞추기용으로 그려넣은 것이 아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신다는 ‘착정이음(鑿井而飮)’의 암시다. 강물 위쪽의 가지런한 밭 역시 밭을 갈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경전이식(耕田而食)’을 드러낸 장치다. 착정이음과 경전이식은 줄여서 착음이식(鑿飮耕食) 혹은 경전착정(耕田鑿井)이라고도 한다. 태평하고 안락한 생활을 상징하는 단어다. 노인들 앞에는 신하를 거느린 요임금이 보인다. 수행원이라고는 달랑 한 명뿐이다. 미복 잠행 중이기 때문이다. 옷차림은 허름하되 표정만큼은 넉넉하다.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측근들의 말이 결코 입발림 소리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여유로움이다.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격양가 외에도 ‘비옥가봉(比屋可封)’이 있다. 요순의 교화가 사해에 두루 미쳐 집집마다 모두 봉(封)을 받을 만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음을 뜻한다. 이밖에도 ‘도불습유(道不拾遺)’라는 말도 있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풍속이 아름다워 아무도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음을 이르는 말이다. 길바닥에 지갑이 떨어져 있어도 그 안에 있는 현금에 손대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 것이 아니면 욕심내지 않는 풍속. 역시 태평성대를 반영한다.

한선국. ‘귀를 씻는 허유(許由洗耳)’. 18세기. 비단에 색. 34.8×24.4㎝. 간송미술관
한선국. ‘귀를 씻는 허유(許由洗耳)’. 18세기. 비단에 색. 34.8×24.4㎝. 간송미술관

요임금은 어떻게 해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을까

요임금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명(明)나라 때 장거정(張居正)은 ‘제감도설(帝鑑圖說)’에서 그 비결을 ‘임현도치(任賢圖治)’와 ‘간고방목(諫鼓謗木)’이라는 두 개의 사자성어로 압축했다. ‘제감도설’은 태사 장거정이 어린 황태자를 가르치기 위해 역대 중국 황제들의 언행을 모은 교재다. 그 황태자는 얼마 후 열 살의 나이에 황제로 등극한 제13대 신종이다. ‘제감도설’의 내용은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철왕들의 꽃다운 모습들(聖哲芳觀)’이란 제목으로 역대 황제들의 선행 사례 81가지를 다루었다. 하편은 ‘미치광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며 앞에 넘어진 수레를 그대로 따라한 임금들 이야기(狂愚覆轍)’란 제목으로 악행을 저질러 경계로 삼을 만한 사례 36가지를 엮었다. 한마디로 성군과 폭군의 얘기다. ‘제감도설’은 글과 함께 그림을 더해 어린 황태자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요임금의 선행을 설명하는 ‘임현도치’와 ‘간고방목’은 상편의 성군 첫 번째 항목에 들어 있다. 그중 ‘임현도치’는 ‘어진 이를 임용하여 다스림을 도모하였다’는 뜻이다. 요임금의 성공비결이 훌륭한 신하를 발탁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요임금은 약관 20살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 1학년생이 황제가 된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모든 것을 혼자 다 할 수는 없다. 요임금은 그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는 모든 사항에 대해 자신이 시시콜콜 나서서 지시하는 대신 덕성이 높고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을 찾아내 각종 관직에 등용했다. 뛰어난 인재야말로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는 최고의 성장동력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개국 후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킹 메이커’들을 발탁하지 않았다. 개국공신들에게 나눠 먹기 식으로 감투를 주었다가는 백성들의 삶이 결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적재적소에 그 분야의 선수들을 투입했다. 그들로 하여금 민생, 건축, 농업, 제사, 목축 등 각 분야를 업무분담을 시켜 질서정연하게 다스려 나갔다. 전문가를 직접 선정했다는 점에서는 ‘톱다운’ 방식이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다는 점에서는 ‘보텀업(Bottom up)’ 방식의 혼합이었다. 그 덕분에 요임금은 ‘팔짱을 끼고 옷깃을 늘어뜨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전해진다. 임현도치의 결과였다.

두 번째 비결은 ‘간고방목’이었다. ‘간언하는 북과 비방하는 나무를 설치하였다’는 뜻이다. 요임금은 제위에 있을 때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 항상 남의 말을 듣고자 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 충신들의 간언에 귀를 닫아버리는 황제들과는 그 결이 달랐다. 그러면서도 행여 사람들이 자신의 면전에서 직언을 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문 밖에 북 하나를 설치해 두었다. 직언과 간언을 할 사람이 있으면 북을 쳐서 면담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태종(太宗)이 1404년에 설치한 신문고(申聞鼓)와 마찬가지의 북이었을 것이다. 요임금은 북만 설치하는 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북 옆에 나무도 하나 세워두었다. 사람들이 그 나무에 요임금의 잘못을 글로 써서 붙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훌륭한 인재의 등용과 민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야말로 요임금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래서 요임금이 세상을 떴을 때 만백성이 친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면서 3년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것을 여상고비(如喪考妣)라고 한다. ‘고비’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뜻한다.

작자미상. ‘‘귀를 씻는 허유’ 이야기 거울’. 고려시대. 동합금. 지름 14.5㎝, 두께 0.8㎝.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귀를 씻는 허유’ 이야기 거울’. 고려시대. 동합금. 지름 14.5㎝, 두께 0.8㎝. 국립중앙박물관

귀를 씻고 소를 끌고 가버린 허유와 소부

요임금은 제위를 넘겨줄 때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세습하는 대신 덕과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는 선양(禪讓)을 택했다. 요임금이 왕좌를 누구에게 물려줄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말했다. “맏아들이신 단주(丹朱)께서 사리에 통달하고 이치에 밝습니다.” 그러자 요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놈은 고집이 세고 말싸움을 좋아하니 기용할 수 없네!” 요임금은 그의 아들 단주가 어리석어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정권을 순에게 넘겨주고자 했다. 순에게 넘겨주면 천하가 이로움을 얻고 단주만 손해를 볼 뿐이지만, 단주에게 넘겨주면 천하가 손해를 보고 단주만 이롭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천하가 손해를 보게 하면서 한 사람만 이롭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천하를 순임금에게 넘겨주었다. 요순시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넘겨주기 전이었다. 후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탄생했다.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이야기다. 소부는 소보라고도 읽는다. 어느 날 허유는 요임금이 자신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을 하자 기산(箕山)의 영수(潁水) 근처로 가서 은둔해버렸다. 요임금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허유를 찾아가 구주(九州)의 장(長)이라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황제 자리도 거절한 사람이 더 낮은 자리를 수락하는 것은 모양새가 빠지는 법이다. 허유는 다시 거절하고는 자신의 귀를 영수에서 씻었다. 그때 마침 소부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수에 도착했다가 귀를 씻고 있는 허유를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허유가 이렇게 대답했다. “요임금이 찾아와서 구주를 맡아 달라고 하기에 내 귀가 더러워지지 않았을까 하고 씻는 중이오.” 그 말을 들은 소부가 한마디 했다. “은둔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심산유곡에 숨지 않은 것은 여전히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오?” 역시 소부가 허유보다 한 수 위였다. 말을 마친 소부는 “더러운 말을 듣고 더러워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자신의 송아지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하면서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버렸다. 이때부터 소부와 허유는 고결한 품격을 지닌 선비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귀를 씻는 허유(許由洗耳)’는 17세기에 활동한 화원 한선국(韓善國)의 작품이다. 그림 왼쪽에서 귀를 씻는 사람이 허유고, 오른쪽에서 소를 끌고 있는 사람이 소부다. 자료에 따라서는 허유와 소부가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선국은 다른 사람으로 봤다. 허유와 소부의 이야기는 매우 인기 있는 소재였는지 조선시대 민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고려시대 때 구리로 만든 거울에도 등장한다. 이 거울에는 윗부분에 사각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허유세이소부음우(許由洗耳巢父飮牛)’라는 제목을 확실하게 써넣은 것이 특징이다. ‘허유가 귀를 씻고 소부가 소에게 물을 먹인다’는 뜻이다. 서민들은 누구나 쓰고 싶은 감투를 미련 없이 던져버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감상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롱런’한 이유다.

요순시대라 한들 어찌 좋은 일만 있었을까

판소리 ‘흥보가’에는 ‘동방이 예의지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어찌 불량한 사람이 있으리요마는 요순의 시절에도 사흉이 났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으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요순시대에도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발생했을 것이고, n번방 사건 같은 엽기적인 범죄도 터졌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는 이름이 다르고 내용이 달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요순시대를 태평성대라고 믿는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위정자와 관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5일은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을 뽑는 선거일이다. 일꾼들을 잘 뽑아야 앞으로의 4년이 편안할 것이다. 일꾼을 뽑을 때는 요임금처럼 ‘한 사람만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불행한 정치가’를 뽑지 않으면 된다. 태평성대는 아니라도 괜찮은 시대는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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