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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04호]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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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짱 의사의 4개국 어학연수 도전기]어학연수와 역사 공부, 두 마리 토끼 잡기

리마= 글·사진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 국가 보조금을 타기 위해 은행 영업시간 이전부터 긴 줄을 이루고 있는 리마 시민들의 모습.
어학연수 5주째, 국가비상사태 체제인 페루의 코로나19 사태 현황은 신규 환자 발생자 수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전환점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한 주(4월 6~12일) 페루 국민들의 관심 뉴스는 부활절 주의 산타 세마나(Santa Semana·Holy Week) 일정에 관한 것이었다. 페루에서는 전통적으로 부활절 전 목요일과 금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4일 연휴를 즐긴다. 이 기간에 거리 퍼레이드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직장인들은 여행 계획을 짜는 등 전 국민이 가장 기대하는 때이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예년과 같은 행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는 아예 목요일, 금요일 전면 통행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페루 국민들로서는 실망스러운 뉴스였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4월 8일에는 의무적 사회격리 기간을 4월 26일까지 2주 더 연장한다는 대통령 발표가 있었다. 제3차 국가비상사태 선언이었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 통행금지, 특히 의무적 사회격리 지침을 잘 지키지 않는 북부 5개 주에 대해서는 통행금지 시작 시간을 오후 4시부터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사를 크게 늘리면서 환자 수가 급증,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4월 20일 전후해 확진자 수가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4월 8일 환자 수는 전일보다 1388명 증가한 4342명이었고 사망자 수는 121명이었다.
   
   4월 9일에는 중환자실 근무자, 환자 이송요원 등 의료 관련 종사자들에게 1인당 월 720솔(약 25만원)씩 특별 상여금을 지불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참고로 페루 정부는 이에 앞서 국가비상사태 기간 중 일자리를 잃고 생계유지가 힘든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가구당 380솔(약 13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국가비상사태 기간이 4월 12일로 연장된 데 이어 다시 4월 26일까지 연장되자 두 번째 380솔 지급 방침을 발표했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페루 빈곤층의 정확한 한 달 생계 유지비가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참 부족해 보였다. 온라인 수업을 통해 만나고 있는 어학원의 강사들도 빈곤층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부족한 조치라고 말했다.
   
   4월 10일, 통금 시간을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에서 4시까지로 1시간 줄였다. 슈퍼나 시장 등에 사람들이 집중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취지였다. 남녀·성별·격일제 통행제는 폐지됐다. 사실 필자도 경험해 보니 남자만 허용된 날도 슈퍼의 인구밀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여자 통행일에는 시장이 거의 전쟁터에 가까웠다. 사람의 통행을 줄여 코로나19 확산을 줄여 보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사람들의 접촉을 더 조장한 결과가 됐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쓸데없는 제도가 폐지된 것은 다행으로 보인다.
   
   지난 4월 11일, 세계적 여론기관인 입소스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코로나19 대처 순위를 발표했다. 대상 국가는 남미 전 국가에다 중미의 멕시코, 쿠바, 파나마가 추가됐다. 순위표에 따르면 우루과이가 최고 모범국으로 선정됐고 그 뒤로 아르헨티나, 페루, 콜롬비아, 칠레, 볼리비아, 쿠바 순이었다. 한편 페루 의사협회는 모두 183명의 의사들이 감염됐다면서 진료 의사들에 대한 충분한 보호장비 공급과 신속한 진단 검사를 요구했다.
   
   4월 12일에는 전국 9000여명의 경찰관을 대상으로 검사를 시행한 결과 217명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발표가 있었다. 또 의무적 사회격리가 시행된 4주 동안 전국에서 5만5000명의 위반자가 단속되었다는 통계도 나왔다. 이날까지 총 확진자는 7510명으로 전날보다 671명이 증가했고 사망자는 193명이었다.
   
   
▲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간격을 두고 서 있다.

   페루의 역사에 잉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페루의 코로나19 상황 보고는 이 정도로 하고 필자가 이곳에 온 목적인 어학연수로 돌아가보자. 현재 진행하고 있는 온라인 수업은 모두 4시간에 걸쳐 이뤄진다. 2시간씩 두 명의 강사를 매일 만나고 있다. 일대일 수업이다 보니 수업 내용이나 방식은 필자의 의견에 따라 조율이 가능하다. 첫 번째 수업은 알고 싶은 지식에 관한 정보 위주, 두 번째 수업은 문법을 기초로 한 순수 회화 시간으로 진행하고 있다. 두 번째 수업은 일반적인 현지 어학원의 고급 레벨 강좌와 크게 차이가 없겠지만 첫 번째 수업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매번 필자가 알고 싶은 주제를 미리 부탁하면, 예습 과제를 던져준 후 수업 시간에는 강사와 질의, 토론을 이어가는 식이다. 처음에는 음식 등 약간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최근에는 필자의 주 관심 분야인 페루의 역사에 대한 수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역사에 관심이 많다. 젊었을 때는 웬만한 세계 역사 연표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런 관심은 두 권의 역사 관련 책과 무려 7편의 역사 관련 전공 논문(흉부외과)을 발표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이곳 리마의 어학연수에서도 어김없이 발동했다.
   
   우선 페루의 옛 문명이 궁금했다. 흔히 페루의 역사라고 하면 잉카를 자동으로 떠올리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외는 ‘차빈’이나 ‘모체’ 같은 생소한 이름의 잉카 이전 문명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다. 그런데 수업을 계기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 시기와 비슷한 때에 형성되었다는 ‘카랄’ 문명을 필두로 잉카 이전의 페루 문명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깊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페루 문명에 대한 수업에 이어 스페인에 대항한 페루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강의를 어학원 강사에게 요청했다. 그중 첫 주인공이 ‘페루의 보호자’로 불린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1778~1850)이다. 강사의 말로는 페루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리마의 역사지구 중심지에 그의 이름을 딴 산 마르틴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 장엄한 청동 기마상이 있는 만큼 리마 시민들의 생활 속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산 마르틴은 페루 사람이 아니다. 국적은 아르헨티나다. 어떻게 아르헨티나의 군사 지도자였던 그가 페루까지 와서 오늘날까지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 것일까?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주둔 스페인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가족을 따라 스페인으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등지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81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원래 스페인이 식민 통치를 위해 정복지에 설치한 4개 부왕령(스페인 왕을 대신하여 왕의 대리자가 통치하는 지역) 중의 하나인 라플라타 부왕령이 있는 곳이었다. 1810년 스페인의 압정에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하는 해방군들이 부왕을 추방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 리마 역사지구에 있는 산 마르틴 광장과 산 마르틴 청동 기마상.

   페루 독립 선언이 있기까지
   
   산 마르틴은 해방군을 훈련시키고 조직화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완전 독립을 위해서는 스페인 최강 부대가 버티고 있는 페루 부왕령을 공략, 아르헨티나에 대한 위협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도부는 북쪽의 알토 페루(지금의 볼리비아)를 통해 육로로 페루를 공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수차례 군사 작전을 시행했으나 번번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 지도부의 마지막 선택은 산 마르틴이었다. 신생 국가의 명운을 건 페루 공략의 중책을 맡은 산 마르틴은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알토 페루(볼리비아)를 통한 육로 진격은 지형이 험난한 데다 스페인군의 세력도 워낙 강해 정면 돌파는 무모하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고심 끝에 나온 그의 전략은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가서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먼저 공격하여 해방시킨 다음, 그곳을 기점으로 바다를 이용해 페루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략한다는 계획에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으나, 산 마르틴은 계획 달성을 위해서 안데스산맥 인근 도시 멘도사를 거점으로 삼았다. 1817년 1월 산 마르틴은 마침내 아르헨티나 혁명군, 오긴스(Bernardo O’Higgins) 등이 중심이 된 칠레 해방군과 노예들까지 포함한 약 5000명의 병력, 1만 마리의 당나귀, 1500마리의 말을 대동하고 안데스를 넘는 대장정에 나선다. 그 후 치열한 전투 끝에 1818년 마이푸전투의 대승을 끝으로 칠레의 독립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자 칠레에서는 산 마르틴을 국가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페루 공략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칠레 출신의 오긴스에게 국정을 맡겼다.
   
   1820년 8월 20일, 산 마르틴은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를 떠나 페루로 향하는 역사적인 출항을 한다. 페루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 규모는 산 마르틴 군의 4배에 가까웠다. 리마에만 6500명의 병력이 있는 데다, 페루와 볼리비아 전역에 걸쳐 약 2만3000명의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력에서 밀리는 산 마르틴은 리마를 직접 공략하기보다 리마 주위를 넓게 돌아가면서 공격해 나가는 우회 전략으로 스페인군을 서서히 압박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노예들에게 자유시민권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을 끌어들였다.
   
   이런 전략하에 산 마르틴은 그해 9월 8일 리마 남쪽 265㎞ 지점에 위치한 파라카스만에 상륙했다. 일단 전력을 재정비한 산 마르틴은 육로 공격을 예상한 스페인군의 허를 찌르면서 해상으로 리마 북쪽 150㎞ 지점에 상륙했다. 산 마르틴과 스페인 측의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두 차례의 평화 회담(미라플로레스 회담과 푼차우카 회담)이 열렸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커서 결렬되고 만다. 산 마르틴의 계속된 압박에 스페인군은 전략적으로 일단 리마를 버리고 외곽으로 철수한다.
   
   리마에 무혈 입성한 산 마르틴은 1821년 7월 28일 마침내 아르마스 광장에서 페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독립 선언문의 마지막에는 ‘조국 만세, 자유 만세, 독립 만세(Viva la Patria, Viva la Libertad, Viva la independencia)’가 적혔다. 이날은 페루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돼 매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산 마르틴은 ‘페루의 보호자(Protector of Peru, Protectorado de Peru)’란 이름을 얻게 됐고, 페루의 모든 행정·정치를 책임졌다.
   
   
▲ 남미 해방의 두 영웅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야킬 회담에서 만나는 장면. 왼쪽이 볼리바르, 오른쪽이 산 마르틴이다.

   사후 30년 만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영웅
   
   산 마르틴의 독립 선언으로 페루의 독립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리마에 입성한 것뿐이지 페루 전역에는 여전히 스페인군들이 전력 손실 없이 건재했다. 막강 전력의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페루의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에콰도르를 거쳐 북쪽으로부터 페루 진격을 노리고 있는 남미 해방의 또 다른 영웅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도움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가 미합중국처럼 통합된 한 나라로 가야 한다는 원칙에는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달랐다. 산 마르틴은 입헌군주제를 원했고, 볼리바르는 강력한 지도자를 가진 공화국 체제를 주장했다. 물론 강력한 지도자는 자신을 뜻했다.
   
   이런 가운데 1822년 7월 26일, 유명한 과야킬 회담이 열렸다. 과야킬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이은 제2 도시이다. 최대 인구의 항구도시로 에콰도르 최대 상업 중심지다. 최근 코로나19로 남미 전역에서 가장 참담한 피해를 겪으면서 ‘에콰도르의 우한’으로 불리는 비운의 도시가 됐다.
   
   회담은 동석자 없이 두 사람 단독으로 진행된 데다 회의록도 남기지 않아 지금까지도 역사의 비밀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회의 후 행적으로 미루어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결론 없이 끝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와의 회담으로 남미의 향후 정세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당시 볼리바르는 명실공히 강력한 ‘대콜롬비아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데 비해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의 군사 지도자에 불과했다. 또 권력에 대한 야망도 크지 않았다.
   
   회담이 끝난 며칠 후, 산 마르틴은 ‘페루의 보호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 중앙집권제 옹호자와 지역분권제 옹호자들 간 내전 상태였던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사망하자 딸과 함께 1831년 유럽으로 떠난다. 산 마르틴은 이후 지역분권제 옹호자들을 돕기 위해 아르헨티나 재입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말년에 각종 병에 시달리던 산 마르틴은 1850년 8월 17일 파리에서 7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유해는 1880년, 사후 30년 만에 아르헨티나의 영웅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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