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라폴리스 플루토 유적지에는 신전이 따로 없다. 사진 왼쪽 쇠창살 다리 아래가 지하 동굴로 이어지는 플루토 문의 위치다.
히에라폴리스 플루토 유적지에는 신전이 따로 없다. 사진 왼쪽 쇠창살 다리 아래가 지하 동굴로 이어지는 플루토 문의 위치다.

‘금권정치’. 지난 4월 15일 치러진 한국의 총선거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다. 이번에 각 정당이나 총선 후보들이 내세운 정책이 뭔지, 공약이 무엇인지는 생각나지도 않는다. 선거판에서는 5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공짜 돈 얘기만 난무했다. 청년수당, 재난지원비, 긴급생활비에 이르기까지 메뉴도 다양했다. “용돈도 안 주는 아들보다 공돈 몇십만원씩 덥석 안겨주는 정부가 훨씬 효자”라는 말도 들린다. 썩은 치아투성이 아이에게 사탕이 얼마나 나쁜지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단맛은 이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빈정, 조롱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다.

사실 금권선거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2020년 한국의 금권정치는 ‘아주’ 예외적이고도 특별하다. ‘합법적으로 국가가 나서 대규모로 장기적으로 뿌리는 돈’이라는 점 때문이다. 전염병을 명분으로 금액도 수직상승했지만, 앞으로는 감기 기운만 보여도 공짜 돈이 콸콸 흘러나올 것이다. 선거 하루 전날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나서 공짜 돈 살포를 재촉할 정도였다. 야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지옥의 신이 왜 부자의 신으로 통할까

영어로 금권정치를 ‘플루토크라시(Plutocracy)’라고 한다. 그리스 신 플루토(Pluto·영어로는 Hades)와 ‘법, 파워’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크라시(Cracy)’로 연결된 조어다. 플루토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지하의 신, 죽음의 신이다. 한자로 풀자면 명왕(明王)이다. 평균 기온 마이너스 223도인, 태양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혹성 명왕성도 플루토라 불린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유럽으로 넘어가면서 ‘지하=지옥’으로 확대 해석된다. 따라서 플루토는 얼떨결에 지옥의 신으로 변신한다. 천국, 지옥 개념이 없던 2500년 전 그리스인이 본다면 깜짝 놀랄 결례다. 그렇다면 왜 지하의 신이 금권정치의 아이콘이 됐을까? 플루토 자신이 재물의 신, 부자의 신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통하는 공식이지만 고대 역사를 통틀어 ‘돈=황금, 보석’이었다. 황금과 보석은 지하광물이다. 지하를 다스리는 신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의 신에 올라선 것이다.

고대 문학·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플루토와 더불어 연상되는 여성이 있을 것이다. 플루토의 아내이자, 지하의 여신인 페르세포네(Persephone)다. 그림이나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페르세포네의 납치(Abduction of Proserpina)’의 주인공이다. 보통 수염투성이 노인이 도망가려는 젊은 여성을 강제로 끌어안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가 다프네(Daphne)에게 달려가는 작품과 비슷한 구도지만, 다프네의 손과 발이 월계수로 변했다는 점에서 페르세포네와 구별된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지하의 신이 벌인 희대의 범죄극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노인이 바로 플루토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신 플루토의 유일한 취미는 마차를 타고 지상의 자연을 즐기는 것이다. 어둠의 땅에서 벗어나, 사방팔방 방향도 없이 마냥 달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어느날 이탈리아 시칠리아 어딘가를 달리다 멀리서 들꽃을 모으는 젊은 처녀를 발견한다. 첫눈에 반하면서 곧바로 부인으로 삼을 생각을 한다. 설렘을 담은 편지나 애절한 고백 같은 과정은 전부 생략된다. 보는 즉시 곧바로 납치해 지하세계로 끌고 간다. 본인의 동의도 없이 이뤄진 결혼을 통해 페르세포네를 지하의 여신으로 임명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황당한 납치범이지만, 그리스인들은 비난하기보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언젠가는 예외 없이 만날 신이기도 하지만, 웃고 즐길 만한 것 하나 없는 ‘지하의 외로운 신’이라는 동정도 작용했을 듯하다. 납치라도 해서 데려가지 않을 경우 그 누구도 원치 않는 황량한 땅이 플루토의 영역이다. ‘플루토=황금의 신’이라 아무리 찬미한들, 정작 플루토의 땅에 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물관에 옮겨놓은 플루토 좌상. 웃음과는 거리가 먼, 쓸쓸하고 어두운 부자(富者) 신의 모습이다.
박물관에 옮겨놓은 플루토 좌상. 웃음과는 거리가 먼, 쓸쓸하고 어두운 부자(富者) 신의 모습이다.

파묵칼레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는 터키에 가면 누구나 들르는 곳이다. 지하 석회석이 지표면에 노출된 뒤 겹층으로 창조된 경이로운 명소다. 태양에 반사된 모습은 파묵칼레 원래 의미인 목화성 그 자체다.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있는 고대 도시다. 그리스·로마·비잔틴에 이어진, 한때 인구 10만을 헤아리던 유서 깊은 유적지가 히에라폴리스다. 코로나19 전염병이 돌기 직전인 지난해 11월에도 들렀지만, 갈 때마다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플루토의 문(Gate of Pluto)’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지하의 신 플루토에 관한 유물·유적이 얼마나 드문지 알 것이다. 태양의 신 아폴로,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곡물의 신 데메테르,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를 찬미하고 숭배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보면, 파리스(Paris)의 화살에 맞아 저세상으로 간 아킬레스가 등장한다. 저승 생활이 어떤지 묻는 오디세이에게 던져진 영웅의 대답은 외롭고도 어둡다. “저승의 왕보다, 이승의 최고 가난뱅이를 위해 일하는 노예가 낫다.”

철학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새로운 영역의 학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가, 삶이 두려워 철학이 창조됐다고 한다. 죽음에 모든 것을 건 것이 이집트라면, 숨 쉬는 삶 자체에 전력투구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와인은 이집트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에 열광하고 와인을 즐긴 곳은 그리스였다. 이집트는 단 한 명의 파라오와 나머지 노예들로 이분되는 나라다. 고대 그리스는 밤하늘의 별처럼 개개의 고유한 영혼으로 구성된 민주공화국이다. 철학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관을 구축한 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였다. 죽은 뒤라도 영혼이 살아 있는 한 삶의 연장이라 믿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접할 수 있는 그리스의 건축, 조각, 드라마는 죽음조차 뛰어넘은 영원한 철학이자 영혼으로서의 증거다. 기독교 포교사를 보면, 그리스보다 전도가 어려웠던 곳도 없었다고 한다. 바울이 그리스 땅에서 예수의 부활을 얘기하자 모두 웃었다. “부활을 안 믿느냐, 내 말이 거짓으로 들리냐?”라고 바울이 소리쳤다. 그리스인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리스인에게 부활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보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영원히 남을 영혼의 부활이 한층 더 중요하다.” 왜 죽음의 신에 관한 유물·유적이 그리스에 드문지 이해할 단서다.

히에라폴리스 플루토 유적은 아폴로 신전 남쪽에 인접해 있다. 2년 전부터 출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보기는 어렵다. 관광객용 파묵칼레 온천 수영장에서 보면 흔적을 발견해낼 수 있다. 높이 5m 정도의 플루토 좌상과 지하세계 호위무사인 삼두견(三頭犬) 케르베로스(Kerberos)가 눈에 들어온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플루토를 모시는 신전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이라면 으레 차지했을 크고 넓은 신전이 없다. 초라하게도, 돌로 된 가로세로 1m 정도의 ‘문’ 하나가 전부다. 왜일까? 철학에 바탕한 영원한 삶에 주목하는 그리스 세계관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듯하다. 신전을 만들어 죽음의 신을 찬미할 경우, 빨리 플루토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해석될 수 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플루토를 두려워하고 기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까이에는 두고 싶지 않다는 이중심리가 ‘작은 문’ 하나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1400년 만에 다시 열린 플루토의 문

원래 플루토의 문은 지하로 이어지는 동굴 입구로 활용됐다고 한다. 문 앞에서 플루토를 위한 각종 의식이 진행됐다는 의미다. 양이나 어린 소를 동굴 안으로 몰아 제물로 삼았다. 그리스 당시 기록을 보면, 동굴 안에 들어간 동물은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지하 온천에서 나오는 유독가스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포교되면서 죽음의 신 플루토도 사라진다. 기독교는 유일신에 기초한 종교다. 히에라폴리스 플루토의 문도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된다. 6세기 대지진과 함께 동굴이 아예 매장되면서 유독가스도 사라진다. 플루토 유물·유적이 재발견된 것은 1965년이다.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고대 기록을 바탕으로 살피던 중 흔적만 남은 문을 찾아낸다. 무려 1400년간 지하에서 잠자던 죽음의 신이 마침내 이승에 부활한 셈이다.

최근 접한 흥미로운 신조어로 ‘동학개미군단’이란 말이 있다. ‘애국+금융+서민+반일+집단’이 접목된 기묘한 말로 느껴지지만, ‘추락한 주식시장에 몰려드는 소규모 투자가’를 지칭한다고 한다. 2020년 4월, 한국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빚을 내서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동학개미군단’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다. 기원전 5세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 관찰기를 남긴 인물이다. 원인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4년 이상 창궐하는 동안 아테네 시민 3분의 1이 사라진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초유의 ‘버블 경제’가 전염병 말기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언제 플루토에게 불려갈지 모르는 판국에, 갖고 있던 돈이나 실컷 쓰자는 심리가 만연했을 듯하다. 추측건대 당시 전염병 공화국의 최고 인기 신이 플루토였을지 모르겠다. 영혼의 부활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철학이 아니라, 전염병 공포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접한 죽음의 신이다. 곧 만날 상황이란 점을 감안하면, 일찌감치 숭배하고 예찬하는 것이 현명했을 듯하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현상 뒤에는 원인과 배경이 존재한다.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원인과 배경을 파악할 경우 앞으로 닥칠 현상까지 예측해낼 수 있다. 금권정치로 얼룩진 선거를 보면 한국 전체가 플루토 신자의 땅으로 변한 듯하다. 플루토의 자산인 금값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고 한다. 플루토가 있기에 신자들이 존재하겠지만, 반대로 신자들이 떼로 몰려들어 플루토 열풍을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리지만, ‘통일=대박’으로 통하던 시기가 있었다. 인권·자유·평화·한겨레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벼락부자로서의 통일이다. 2020년 금권정치와 비교해 보면 오십보백보다. 남의 밑에서 월급 받아본 적 없는 586 꼰대들이 주도하는 남미식 포퓰리즘 축제가 전부는 아니다. 설탕 중독으로 인한 폐해는 치아만이 아니라 잇몸질환, 비만, 당뇨로 악화할 것이다. ‘미국, 일본도 하는데 우리라고 왜 못해?’라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자신감도 폭주한다. 봄볕이 따사롭지만 한국 곳곳이 이미 플루토의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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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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