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별세한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
지난 4월 5일 별세한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

이도형 선배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우선 떠오른 것은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함께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1965년 2월에 조선일보 편집국 공채 7기로 입사한 필자는 수습기자 6개월을 마친 뒤 편집부에서 일하다가 12월부터 외신부에서, 이어 4개월 뒤인 1966년 4월부터 정치부에서 일했는데, 이 짧았던 4개월의 외신부 시절에 이도형 선배로부터 적지 않게 배웠다.

그때 외신부는 훗날 한양대학교 교수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리영희 부장이 이끌고 있었다. 원래 정치부 소속으로 외무부를 출입하던 그는 1964년 11월 하순에 “유엔에서 아랍권 국가들을 비롯한 중립국 국가들이 중심이 되어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외무부에 접수됐다”라는 취지의 기사를 1964년 11월 24일 자에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가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후 12월 16일에 석방된 채 서울지방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고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조선일보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조선일보는 그를 외근 부서인 정치부 일선에서는 손을 떼게 하고 내근 부서인 외신부에서 일하도록 배려하면서 평기자였던 그를 ‘부장’으로 올려주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훗날 서울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라는 훨씬 가벼운 판결을 받는다.

외신부에는 경향신문사에서 조선일보사로 옮겨온 서동구 차장, 그리고 서 기자를 따라온 박신일 기자도 있었다. 이 박신일 기자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을 지은 시인 박인환의 친동생으로 미국인도 경탄할 정도로 영어가 뛰어나 훗날 주미공사와 보스턴총영사를 지낸 그 전설적인 박신일이다. 그는 필자에게는 비록 학과는 달랐지만 서울대 문리대 2년 선배였다. 이 사실을 고려해 데스크는 그와 필자를 같은 야근 팀에 소속시켰다. 텔레타이프와 함께 밤을 새운 뒤 새벽에 야근비를 받아 청진동 해장국 집에 가서 선지국밥을 먹고 북창동의 신신사우나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귀가했던 기억이 새롭다.

서동구 차장은 리영희 부장의 권유에 따라 조선일보사로 옮겨온 데서 알 수 있듯, 국제관계를 보는 눈이 리 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말석에 있었던 필자의 기억으로, 두 분은 모두 박정희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해, 그리고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 전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비판의 강도는 리 부장이 훨씬 강했다.

조선일보 외신부의 사람들

미국의 외교정책 전반을 ‘제국주의적’이라고 파악했던 두 분은, 특히 리 부장은 베트남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을 거세게 비판했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 그리고 일본 모두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주의적인 호찌민의 북베트남과, 반면에 프랑스와 일본 모두에 협력했던 반민족주의적인 남베트남 사이의 내전인데, 이 내전에 왜 제삼자인 미국이 끼어들어 반민족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부패한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있느냐는 논리였다. 게다가 이러한 내전에 박정희 정권은 왜 끼어들어 파병하고 있느냐고 힐난했다.

이러한 시각의 부장과 차장이 함께 이끌고 있어서, 외신부는 자연히 남베트남 안에서의 반전운동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의 반전운동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한 북베트남의 ‘협상제의’ 또는 ‘평화제의’와 같은 외신을 크게 보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편집부에서 국제기사를 다루는 기자가 바로 5공화국 때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과 국토통일원 장관을 맡은 허문도였다. 우익 성향이 매우 강했던 6기 출신의 허 기자는 특히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리 부장과 자주 충돌했다. 지금 필자의 기억에도 생생한 것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남베트남 정권과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반대해 분신자살하는 외신이 들어왔을 때 리 부장과 허 기자가 보인 반응이었다. 리 부장이 이 기사를 크게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허 기자는 “이 사람들 제 나라 망치려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며 반대한 것이었다.

판정은 늘 김경환 편집국장이 내렸다. 그는 대체로 리 부장 손을 들어주었다. 충돌의 한쪽은 부장이고 다른 쪽은 기자여서가 아니었다. 김 국장 스스로 리 부장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언론계 일각에서는, 그리고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반미’와 ‘반베트남전쟁’이 진보주의자가 취할 자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국내 기사건 국제 기사건 가리지 않고 주요 신문들의 보도 경향을 늘 감시하면서 자기네 입에 맞지 않으면 즉각 압박을 가하던 중앙정보부가 이러한 동향을 놓칠 리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김 국장에게 자주 압박을 가했다. 김 국장은 우리 7기생이 입사하기 직전에 편집국장으로 임명됐고 우리 7기생을 직접 뽑아주어 농담으로는 우리를 자신의 1기생이라고 부르면서 각별한 정을 표시했다. 우리들을 때때로 불러 점심이나 저녁을 사주었다.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취지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가 신문사에 그물을 씌어놓고 당겼다 풀어주었다 하는데, 요새는 너무 세게 당겨 그물코와 그물코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져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표현을 썼을까,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미 1964년에 조선일보 외신부로 입사해 1966년에 3년 차 기자였던 이도형 선배는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북베트남을 지지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비록 남베트남 정권에 대해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베트남전쟁이 북베트남 그리고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해 북베트남과 보조를 함께하는 베트콩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

리영희 부장과 의견을 달리하다

자연히 리 부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었다. 나이는 리 부장이 1929년생이고 이 선배가 1933년생이니 4년 차이가 있었고 또 출생지도 리 부장이 평안북도이고 이 선배가 서울이니 북과 남이라는 차이가 있었으나, 두 분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서울공업고등학교 졸업생이고, 6·25전쟁을 계기로 국군에 입대해 모두 통역장교로 복무했으며, 미국에서 연수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일본어도 그러했지만, 영어가 탁월했다는 것도 공통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를 대하는 시각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나타냈다. 공산주의에 대해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반미에 대해 리 부장이 ‘호의적’이었던 데비해 이 선배는 부정적이었다.

여기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리 부장이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다시 상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민주공화당은 창당 당시에 반미적이며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였고, 그래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민주공화당에 상대적 의미에서 호의적이었다. 당시 합동통신사에서 근무하던 리 부장도 그 분위기에 공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친미’ 성향을 나타내자 그는 곧바로 탈당했으며, 그 이후 일관되게 박정희 개인과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시 이도형 선배에게로 돌아가 보자. 이 선배는 1967년에 베트남 특파원으로 현지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뉴스를 전할 수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영어가 탁월했다. 그러했기에 그는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지휘관들과 쉽게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1977년 8월에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도끼로 살해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을 때 김일성이 유감을 표시함으로써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됐는데, 그 사실을 특종보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유자재의 영어 구사력이 있었다.

이 선배가 기자로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78년에 주일 특파원으로 부임한 이후였다. 약 7년 동안 도쿄에서 활동하며 일본 사회와 국민을 꿰뚫어 보는 기사들을 많이 쓸 수 있었다. 1982년에 일본 우익이 중심이 되어 ‘조선=한국’의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들을 만들고자 했을 때, 이 사실을 국내에 처음 보도하고 여론을 크게 일으킨 이가 바로 이 선배였다.

필자는 1984년 봄 학기(일본에서는 3~9월)에 도쿄대학 교양학부 국제관계학과에 객원교수로 가 있었다. 이 6개월의 기간에 이 선배와 자주 만나 여러 귀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관심은 “왜 우리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던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은 어떤 배경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했다가 패망했고 그러나 어떤 배경에서 패전국으로부터 다시 강대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필자도 정치학 전공자로 ‘국가흥망론’에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던 터에 이 선배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상표와 다름없었던 ‘뚝심’

이 선배의 이러한 관심은 그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 출판한 일련의 저서들에 그대로 반영됐다. 그 대표적 저서가 1986년에 출간한 ‘일본 다시 보고 생각한다’와 2012년에 출간한 ‘망국과 흥국: 19세기 말 한국과 일본’ 등이다. 그는 ‘망국’을 가져온 책임은 무엇보다 조선왕조의 썩은 정치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망국’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특히 지도층이 올바른 시국관을 가져야 하고 자기희생의 자세를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덧붙이곤 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선배가 쓴 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인 ‘흑막: 한일교섭 비화’(조선일보사·1987)는 다시 읽어볼 만하다. 이 책에서 이 선배는 한국 측이 일본 측에 자신의 속을 미리 드러내 일본 측이 한국 측을 쉽게 다루도록 만들었다고 질타한 것이다. 굴절이 심한 격동 속의 국제정치에서 살아남으려면 외교를 잘해야 하는 것이 생명인 한국에 좋은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사에서 정년퇴임한 뒤 이 선배는 월간지 ‘한국논단’의 책임을 맡아 경영난이나 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힘겹게 끌고 나갔다. 이때 그의 상표나 다름이 없는 ‘뚝심’ 또는 ‘흔들리지 않는 주견’이 발휘됐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극우’라고 불릴 수 있는 논조를 그대로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건드렸다가는 손해를 볼 수 있는 ‘성역’에도 과감히 도전했던 것이다.

리영희 부장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언론인으로서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차원은 다르다고 해도, 이도형 선배 역시 자신의 주견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권력이나 돈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 소신에 따라 공부하고 글을 쓴 사람이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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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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