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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호]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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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육의 그림 속 사람여행]석가와 예수와 공자가 만났을 때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 필자미상. ‘만법통일’. 한국. 종이에 색. 74×46㎝. 가회민화박물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여당은 압승했고 야당은 참패였다. 더 강해진 지역주의는 험난한 미래를 예고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세계 경제가 추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날마다 뉴스에서는 수출이 급감했느니 실업자가 늘었느니 우울한 소식만 들린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슨 애국지사라서 거창한 질문을 하려는 게 아니다. 동네 골목마다 ‘임대 문의’라고 적힌 빈 가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집은 폐업한 후 정리도 하지 못한 채 떠난 듯 식기와 테이블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저 영세한 가게에 딸린 식구들은 어떻게 됐을까. 분식집이 문을 닫은 것을 보고 온 날은 기분이 우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봐야 한다면 국민들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국민의 염려를 잘 헤아려서 흩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모아 잘 이끌어줘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 종교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그림이 생각났다.
   
   
   부처님과 공자님과 예수님이 마음을 합하다
   
   2016년 1월이었다. 서울 인사동에 민화 전시회를 보러 갔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발견했다. ‘만법통일(萬法統一)’이었다. 석가와 공자와 예수 등 3대 종교의 창시자를 한 화면에 그린 그림이었다. 각 인물 위에는 그들의 이름과 대표적인 종교 교리를 한 단어씩 적어 넣었다. 불교를 대표하는 석가는 ‘자비(慈悲)’를,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는 ‘인의(仁義)’를, 기독교를 대표하는 예수는 ‘박애(博愛)’라고 적었다. 자비와 인의와 박애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파악한 세 종교의 교리였을 것이다. 세 인물은 한눈에 봐도 ‘삼교(三敎)’의 대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외면적인 특징을 잘 드러나게 했다. 석가는 한쪽 어깨가 드러난 가사를 걸치고 팔을 가슴 앞에서 구부렸다. 머리는 위로 솟은 육계와 구불구불한 나발의 특징을 잘 살렸다. 공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홀을 들고 있고 아랫부분에 수가 놓아진 의복을 걸치고 있다. 이는 공자의 초상화로 가장 많이 알려진 선성유상(先聖遺像)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예수는 의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두 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모습이다. 예수가 손을 들어 설교하는 모습은 산상수훈이나 예수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세 사람의 머리에는 모두 둥그런 형태의 두광(頭光)을 그려 넣었다. 머리에서 광채가 난다는 의미다. 두광은 불교 그림에서 불보살을 그릴 때 쓰는 양식인데 삼교도에 활용했다.
   
   그림 안에는 ‘만법통일’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전시기획자가 붙인 것 같았다. 만법통일은 만법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를 만법으로 해석했다. 만법통일은 당나라 때 조주(趙州) 선사가 말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응용한 제목일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참선할 때 가장 많이 드는 화두 가운데 하나다.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와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일화로 유명한 선승이다. 만법통일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뜻이니 삼교의 대표자를 하나로 그린 삼교도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다. 과연 세 종교에서 추구하는 법이나 교리는 하나로 통일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필자가 ‘만법통일’을 보고 놀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국에서는 삼교도가 자주 그려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근대 이후에도 삼교도를 그린 작품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조선 성리학을 최고로 여겼던 조선시대에 불교나 도교는 이단일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에서 그 귀한 주제를 그렸음을 확인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반가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의 삼교가 유교, 불교, 도교를 지칭한다면 ‘만법통일’에서는 도교 대신 기독교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우리나라의 종교계가 도교보다는 기독교가 더 우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조선 말기에 등장한 동학과 증산교 등의 신흥 종교에서는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주장했다. 여기에 외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까지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추가되었다. ‘만법통일’의 제작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즈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다.
   
   
▲ 정운붕. ‘삼교도(三敎圖)’. 중국. 종이에 색. 115.6×55.7㎝. 베이징고궁박물원

   불교로 수양하고, 도교로 양생하고, 유교로 세상을 다스린다
   
   그렇다면 ‘만법통일’과 비교될 수 있는 중국의 삼교도는 어떤 작품이 있을까. 삼교도는 중국에서 당대(唐代) 이후 그림의 주제로 자주 등장한 화제(晝題)였다. 특히 송대(宋代)의 효종(孝宗)이 ‘삼교론(三教論)’에서 삼교의 의미를 밝힌 후로는 삼교합일이 종교를 대하는 보편적인 추세로 자리 잡았다. ‘삼교론’의 핵심은 ‘불교로 마음을 수양하고, 도교로 양생하고, 유교로 세상을 다스린다(以佛修心, 以道養身, 以儒治世)’는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유·불·도 삼교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교과서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종교가 더 우월하거나 낮다고 평가할 수 없고 제각기 쓰임새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의 종교만이 옳고 너의 종교는 틀리다는 독단적인 사고방식은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삼교 사이의 모순과 부딪치는 부분을 조화시키자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래서 중국의 사원에서는 도교사원이든 불교사원이든 삼교의 신상(神像)이 함께 모셔져 있는 경우가 많다.
   
   명대(明代) 화가 정운붕(丁雲鵬)이 그린 ‘삼교도’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교도’에서 세 명의 지도자는 각 종교의 특색에 맞는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세 인물의 특징이 분명하게 구별된다.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사람은 석가이고, 오른쪽이 노자, 왼쪽이 공자다. 공자는 ‘만법통일’에서 홀을 들고 있던 모습과는 달리 머리에 관을 쓰고 두 손을 맞잡고 있다. 이 관은 공자의 긴 인생에서 짧지만 높은 벼슬을 했던 대사구(大司寇) 시절을 상징한다. 대사구는 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운붕이 밑그림을 그린 또 다른 삼교도가 존재한다. 그가 ‘정씨묵원(程氏墨苑)’에 밑그림을 그린 ‘함삼위일(函三爲一)’이 그것이다. ‘함삼위일’의 왼쪽 그림은 먹의 앞부분에 새겨진 그림이고, 글자가 새겨진 오른쪽 그림은 먹의 뒷부분에 새겨진 그림이다. 왼쪽 그림의 둥근 원 안에 역시 삼교의 대표 인물이 등장한다. 채색으로 그린 ‘삼교도’와 차이가 있다면 좌상과 입상이라는 정도다. 정운붕은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화가로 백묘법(白描法)으로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잘 그렸다. 백묘법은 색채의 굵기에 변화를 주지 않고 윤곽선만으로 대상을 그리는 기법이다. ‘삼교도’와 ‘함삼위일’ 모두 정운붕이 백묘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도석인물화는 도교와 불교의 인물화를 총칭하는 단어다.
   
   ‘함삼위일’은 ‘셋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진서(晉書)’의 ‘율력지(律曆志)’에는 “태극 원기는 셋을 함유하고 있으면서 하나가 된다(太極元氣 函三爲一)”라고 되어 있다. 태극의 원기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음양 두 개의 기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天)·지(地)·인(人) 세 가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함삼위일’에 대해 ‘이어령의 가위바위보 문명론’에서 ‘세 종교가 서로 융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태고의 시대부터 있었던 어느 공통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함삼위일’에서는 삼교의 합일을 강조하는 의미로 썼다. 이 그림 외에도 명대에는 여러 작가에 의해 삼교도가 제작되었다. 세 종교의 창시자들이 길을 가다 어쩌다 마주친 것이 아니라 ‘정모’를 하듯 자주 회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운붕이 밑그림을 그린 ‘정씨묵원’은 1606년에 정대약(程大約)이 편찬한 묵보(墨譜)다. 묵보는 먹 표면의 장식도안집이다. 먹을 만든 공방에서 먹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홍보전단지 같은 책자다. 묵보는 송대에 처음 제작되었는데 16~17세기에는 휘주(徽州) 상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출판되었다. 묵보에는 인물, 누각, 별자리, 시문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함삼위일’처럼 유불도의 인물을 포함해 ‘성모 마리아’ 같은 서양 종교 동판화까지 수록했다. 이렇게 시각화된 이미지 텍스트는 문자 텍스트보다 훨씬 큰 호응을 얻었다. 흑백TV에서 컬러TV로 전환하던 때를 생각하면 된다. ‘정씨묵원’은 방우로(方于魯)의 ‘방씨묵보(方氏墨譜)’, 방서생(方瑞生)의 ‘묵해(墨海)’와 함께 명대를 대표하는 3대 묵보로 평가받는다. 특히 ‘정씨묵원’은 최초의 다색인쇄판으로 찍었다.
   
   휘주가 있는 안휘성은 예로부터 품질 좋은 먹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했다. 먹 장인으로 이름을 떨친 묵장(墨匠)만 12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행했다. 지금도 휘주에 가면 도시 곳곳에서 ‘원조 휘묵(徽墨)’ 집임을 자랑하는 가게를 볼 수 있다. 휘묵은 품질도 뛰어나고 디자인도 우수해 중국 전역은 물론 해외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휘묵이 유명하게 된 데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당대 최고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이 큰 역할을 했다. 정운붕 같은 유명화가가 먹의 문양 설계와 밑그림을 담당했고, 판각은 최고 각공 집안인 신안(新安) 황씨(黃氏) 집안에서 도맡았다. 여기에 스스로 유상(儒商)이라 자처한 상인들의 아낌없는 투자가 더해졌다. 유상들은 자신이 축적한 부를 당대의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문인사회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기업 메세나 활동의 선구적 사례였다. 그 결과 명대 사람들은 인쇄출판물을 통해 그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고급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삼교합일 운동이 보편성을 얻는 데 묵보 같은 시각이미지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 정운붕. ‘함삼위일(函三爲一)’. 중국. 1606년

   불가마로 공자의 조카사위가 된 남용
   
   그런데 ‘함삼위일’이라고 적힌 글자 왼쪽에는 불가마(不可磨)라는 작은 글씨가 있다. 이 불가마는 땀을 내기 위해 찾아가는 한증막이나 찜질방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무엇을 갈 수 없다는 뜻인가. 불가마의 출처는 ‘시경’ 중 ‘대아(大雅)-탕지습(蕩之什)’의 ‘억(抑)’에 나온다. “하얀 옥의 티는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지만, 이런 말의 흠은 갈 수도 없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불가마는 이 ‘백규지점 상가마야 사언지점 불가위야’에서 따온 말이다. 하얀 옥을 뜻하는 백규(白圭)는 제후의 신표(信標)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들고 다닐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이런 귀한 물건에 흠집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흠집 있는 부분을 갈아내면 된다. 그런데 한번 쏟아낸 말은 백규처럼 갈아낼 수가 없다.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형체도 없는 말이 형체가 있는 백옥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은 말 때문에 상처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이 담긴 단어는 정운붕 같은 지식인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왕 불가마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공자의 제자 중에 남용(南容)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남용은 평소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또는 자신이 실언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용은 ‘시경’의 ‘대아’에 나오는 백규 부분의 시를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외웠다. 여기서 유래한 단어가 ‘삼복백규(三復白圭)’ 또는 ‘규복재삼(圭復再三)’이다. 규복은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뜻이다. 남용이 삼복백규하는 모습을 본 공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래서 형의 딸을 남용에게 시집보냈다. 조카사위로 삼은 것이다. 그만한 인품이면 한집안 식구로 받아들여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특별한 재주나 높은 벼슬에 두지 않고 인격에 두었으니 역시 공자답다.
   
   ‘삼교합일’이든 ‘이교합일’이든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가 필요하다. 합일의 원칙을 상대방에게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이 먼저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가졌거나 세력이 큰 쪽일수록 더욱더 귀를 기울이고 말을 줄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야 삼교합일도 되고 함삼위일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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