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당은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무엇을 추구할지 고민은 하지 않고 끈덕지게 내부적 쟁투에 매달렸다. 비전은 없고 쟁투만 있는 정당은 정치적 패거리에 불과하다. 그런 실망스러운 모습에 국민들이 아예 등을 돌린 것이 이번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 코로나19 변수는 부차적이다.

보수당이 당장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난망하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수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물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물음에 대해 명료한 답을 제공해주는 지침서가 있다. 바로 전성철의 ‘보수의 영혼’(2019)이다. 이 책은 특히 정치 영역에서 보수의 핵심가치(즉 영혼)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13세기 마그나카르타를 시작으로 17세기에 이르러 많은 시민들이 기본적인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유럽의 변방인 이 섬나라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처럼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엄청난 번영을 선사했다. 그것은 17~18세기에 미국의 독립, 프랑스 혁명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자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얻어질까. 공중화장실 사용방식을 예로 들어보자. 그냥 내버려두면 혼란(정글)이 야기된다. 어느 개인에게 관리를 맡겨도 부작용(독재)이 일어난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선착순’이다. 여기서는 순서(규칙)만 지키면 나머지는 마음대로다. 즉 ‘자유’다. 볼일을 빨리 보려면 일찍 도착하면 된다. 즉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선택도 ‘자유’다. 이처럼 ‘자유와 선택의 원칙’이 준수될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금융위기 해법도 마찬가지다. “파산한 기업의 주식을 사고 싶은 사람은 사라. 다만 매입 비용의 7분의 1만 내면, 나머지 7분의 6은 주식을 담보로 정부가 대출해 주겠다.” 정부는 아무 명령도 하지 않았다. 시민의 자유와 선택에 맡겼다. 주식의 가치평가도 정부가 아니라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년여 만에 금융위기가 해소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뛰게 하는 것, 그럼에도 그것이 저절로 공적인 선을 이루게 하는 것이 ‘자유와 선택의 원리’다. 바로 이 원리가 ‘보수의 영혼’이다. 특히 시장은 자유가 제도화된 곳이다. 공중화장실의 예에서 보았듯이 정글(자유방임의 원리)이나 독재(명령의 원리)는 시장에 반하는 제도다. 행복은 ‘자유와 선택의 원리’가 작동하는 곳에서 나온다.

자유는 ‘배고픈’ 자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반면 ‘배 아픈’ 자를 양산했다. 그래서 ‘진보’가 등장했다. 진보란 자유가 주어졌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평등을 교정하자는 이념이다. 하지만 그것을 교정하려면 자유를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수가 추구하는 것이 ‘자유와 선택’이라면, 진보가 추구하는 것은 ‘공평과 평등’이다.

이처럼 진보는 약자의 보호에 주력한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감성적이다. 반면 보수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시한다. 그것은 추론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래서 이론적 무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보는 불평등을 무조건 나쁘게 보지만, 보수는 적당한 불평등이 도리어 사회에 활력을 가져온다고 본다. 그래서 “부분만 보면 진보가 되고, 전체를 보면 보수가 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보수와 진보는 모두 필요하다. 그래서 역사의 ‘두 수레바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유와 선택’의 부재로 인해 불행한 나라다. 교육만 보아도 그렇다. 중·고등학교는 평준화를 해놓고 대학은 서열화를 해놓으니 모두가 사교육 지옥에 빠진다. 도무지 ‘자유와 선택’이 없다. 따라서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도 평준화하든지, 또는 지금처럼 대입제도를 존치하려면 중·고등학교를 다양화하든지 택일해야 한다.

이는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라기보다 교육 서비스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문제다. 교육을 공공재로 본다면 전자를 택해야 하고, 특별한 개인적 서비스로 본다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 결정은 국민의 몫이다. 워낙 중대한 사안인 만큼 국민투표도 고려해 볼 만하다. 적어도 국민에게 그런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보수의 사명이다.

우리 교육이 유럽식과 미국식의 짬뽕으로 인해 엉망이 된 것처럼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제는 개인이 집권하는 제도다. 의원들도 ‘독립적으로’ 지지와 견제를 보내면 된다. 반면 의원내각제는 정당이 집권한다. 따라서 ‘당론’이 정해지면 그것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제임에도 의원들에게 당론이 강요된다. 그것은 개발독재 시대의 어두운 유산이다.

이런 기형적 정치환경 속에서 의원들은 ‘거수기’로 전락한다. 당이 강요한 탓에 자신의 결정에 책임질 일도 없고, 국회는 극한적 대결장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우리 국회에는 ‘자유와 선택의 원리’ 대신에 ‘명령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재정치의 원리다. 국회에서 ‘자유와 선택의 원리’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 역시 보수의 사명이다.

우리의 노사 협력 수준은 세계 최악이다. 그것도 노사 관계에서 ‘자유와 선택의 원리’가 실종된 탓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파업 시 대체고용권이 불허된다. 이런 나라는 아프리카 최빈국 말라위와 한국뿐이다. 이 불공정한 제도로 인해 10% 노조 근로자가 90% 비노조 근로자의 진입 기회를 아예 봉쇄한 채 자신들만의 특권을 만끽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리해고가 거의 불가능하다. 정리해고가 상대적으로 어려우면 고용은 어느 정도 보호되지만, 경제 전체의 활력은 떨어진다. 반면 정리해고가 비교적 용이하면 경제가 활력을 갖게 되어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더 많이 늘어난다. 요즘은 정리해고가 까다로운 유럽이 그것을 좀 더 용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만큼은 보수와 진보가 상당히 수렴되고 있다. 즉 떡을 나눠주기 위해서는 ‘선택과 자유의 원리’를 통해 우선은 떡을 키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다. 실제로 대처와 블레어, 레이건과 클린턴, 슈뢰더와 메르켈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다. 정권이 좌우로 바뀌어도 정책은 대부분 계승되고 있다. 오늘날 진보는 보수의 가치를 받아들인 ‘깨어 있는’ 진보와 여전히 진보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아둔한’ 진보로 분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정치·경제는 공통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한결같이 ‘명령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보수의 사명은 우리 사회에서 ‘자유와 선택의 원리’가 ‘명령의 원리’를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국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일이다. 그것이 이뤄지는 순간,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은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은 이런 사명을 망각한 채 퇴행적 행태를 되풀이하다가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막스 베버는 절망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쳐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설파했다. 보수야말로 각고의 노력으로 절망을 뚫고 ‘영혼 있는’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한편 세계는 순식간에 기본소득이 가시화할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자유와 선택의 원리’에 입각하되, 어느 때보다도 기민하고 유연한 현실 대응이 절실한 시대다. 그만큼 보수의 책무가 더욱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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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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