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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헌의 영지 순례]  도망자 임꺽정의 발길 잡은 절경, 철원 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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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06호]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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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도망자 임꺽정의 발길 잡은 절경, 철원 고석정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강원도 철원 한탄강 중류에 우뚝 솟은 ‘고석정’.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나는 쫓기는 자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할 때, 이 고해는 뭔가 모르게 쫓기는 심정에서 연유하지 않나 싶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종업원 월급 날짜가 다가오면 월급 줄 돈 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쫓기고, 서민들은 생활비와 각종 납부금 낼 생각에 쫓긴다. 50대의 월급쟁이는 언제 내가 조직에서 쫓겨나는가 하는 초조함에 쫓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원고 마감에 쫓긴다. 문필가는 원고 마감 기한에 쫓기는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팔자이다. 땅덩어리가 큰 나라인 미국과 중국이 좋은 점이 있다면 쫓길 때 도망갈 구멍이 많다는 점이다. 서부영화에서도 총잡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멕시코 국경을 넘어 도망갈 수 있다. 주인공이 탈주에 성공해서 붙잡히지 않고 살아 있어야만 스토리가 형성된다. 빨리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다.
   
   중국도 마오쩌둥이 부하들을 이끌고 1만5000㎞의 대장정을 할 수 있는 넓은 대륙이 있었기에 홍군(紅軍)이 장제스 군대에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땅 넓은 효과를 본 셈이다. 만약 한국처럼 땅덩어리가 좁았더라면 장정(長征)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얼마 못 가서 다 결딴났을 것이다. 당시 변변한 신발이 없어서 거지발싸개를 하고 중국 대륙을 도망 다녔던 홍군의 자식, 손자들은 오늘날 태자당이 되어서 온갖 특혜를 누리는 상류층으로 살고 있다. 쫓기면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승자가 되었으니까, 그 대장정이 오만 가지 스토리로 각색되어 후세인들을 끌어들이는 콘텐츠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은 땅이 좁아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금방 잡혀 버리는 치명적인 단점 탓에 대하소설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고석정(孤石亭). 한탄강 중류의 바위 협곡 중간에 불쑥 솟아 있는 바위 꼭대기에 있었던 정자이다. 지금은 사라진 정자 바로 밑의 바위 동굴에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이 숨어 있었다는 구전이 현지에서 전해진다. 임꺽정이 활동했던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본다. 1559~1562년까지이다. 적어도 10년 이상 도망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더라면 그의 무용담과 이야깃거리는 훨씬 풍부해졌을 것이다. 한반도의 땅이 좁으니까 3년밖에 활동을 못 했다.
   
   
   벽초 홍명희는 몰랐던 구전의 장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 이야기를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에 12년 동안이나 연재하였다. 12년이면 엄청난 장기 연재에 해당한다. 벽초는 소설 ‘임꺽정’을 쓴 덕택에 이북으로 가서 김일성에게 대접도 받고 부수상도 지낸 것 아니겠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임꺽정이 도망 다녔던 3년도 비교적 오래갔다고 보아야 한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주로 황해도 봉산과 재령 일대에서 의적 활동을 했다. 구월산을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주된 활동무대였던 황해도권과는 떨어져 있지만 그가 피신했다고 전해지는 고석정은 강원도에 속하는 철원이다. 물론 그가 한양 정부의 정규 토벌대를 상대했던 일급 현상수배범이었으니 피신했던 아지트도 수십 군데 있었다고 추측해야 한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수운 최제우가 죽은 뒤로 쫓아오는 추적대를 피해 영월, 제천, 단양 사이의 산골과 오지 마을에 숨었던 아지트가 대략 150군데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원광대 박맹수 교수가 해월 피신처를 연구한 결과이다.) 이걸로 미루어 보아서 임꺽정도 여러 군데 숨을 수 있는 아지트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오늘날 가장 비주얼을 갖춘 은신처가 바로 한탄강 중류의 고석정이 아닌가 싶다.
   
   처음 고석정을 보았을 때 너무나 절경이었다. 양쪽으로 20~30m의 바위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중간에 사람 팔뚝 모양으로 솟은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있다. 이 암봉의 높이는 대략 10m쯤 될까. 암봉 정상과 주변에는 소나무도 몇 그루 있다. 멀리서 보면 그대로 산수화의 한 폭 그림이 된다. 더군다나 한탄강의 강물이 이 암봉 주변으로 흐르고 있다. 가히 신선이 놀 만한 경치이다. 어찌 임꺽정은 도망 다니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경에서 피신할 수 있었단 말인가. 피신 생활이 아니라 신선이 놀 만한 풍광을 즐겼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쫓기는 자의 불안감이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주변 풍광을 최대한 즐기자고 작심한 측면도 엿보인다. 주관적으로는 불안이지만 객관적으로는 풍류이다.
   
   그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신선이 놀 만한 풍광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첫째가 바위가 있어야 한다. 바위 절벽이나 또는 바위 암반이다. 넓적한 바위 암반이 있고, 그 옆에는 물이 흘러가야 한다. 아니면 호수가 있든지. 그러한 강물이나 냇물가의 바위 암반에 옆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한다. 수백 년 된 소나무가 휘어져서 그 암반을 향해 우산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다음에는 하늘에 달이 떠야 한다. 음력 14, 15, 16일이 좋다. 달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받아야 채음보양(採陰補陽)이 된다. 달의 에너지가 음기이니까 이 음기를 받아서 양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양기만 성하고 음기가 부족하면 균형이 깨진다. 성질 급하고 저돌적인 스타일은 달의 기운을 받는 것이 좋다. 문탠(Moon-tan)도 필요한 것이다. 선탠만 있는 게 아니라 문탠도 있다. 문탠이 바로 달맞이에 해당한다. 바위 암반에서 지구 자력 에너지인 불 기운을 받고, 이를 식혀 주는 수 기운을 강물에서 받고, 소나무를 보며 인문학적인 풍류를 느끼고, 달을 보면서 감정을 순화한다. 고석정은 이러한 4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포인트로 보인다. 전국 명산의 계곡을 다니다 보면 이런 4가지 조건을 갖춘 곳은 거의 옛날 신선이나 도인, 학자들이 놀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지(靈地)가 지닌 미학이다.
   
   어떻게 보면 도적의 괴수였던 임꺽정이 이러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그 어떤 바탕, 또는 안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분야에 극단으로까지 가 본 사람은 다른 분야, 즉 예술적 미학에도 눈을 떴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가 터지면 다른 것도 터진다. 따지고 보면 이 고석정은 옛날부터 알려진 곳이었다.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바위 정상에 있었던 정자에서 노닐었다는 기록이 있다. 왕들이 와서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석정은 그 풍광이 소문났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임꺽정이 숨었다는 이 고석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왜 안 나왔을까.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소유자였던 홍명희가 왜 고석정에 대해 묘사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몰랐던 것 같다. 임꺽정 관련 문헌자료에는 고석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임꺽정 관련 문헌은 대부분 참고하였을 홍명희가 자료를 통해서는 이 고석정을 알 수 없었다. 고석정은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현지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장소였던 것이다. 철원에 가야만 알 수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문필가나 소설가는 현장 답사가 필요하다. 현장 답사도 정보가 또 필요하다. 알아야 가 볼 것 아닌가. 만약 벽초가 고석정을 알았더라면 소설 ‘임꺽정’의 한 챕터는 고석정 관련 스토리로 채웠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절경을 보고 어찌 묘사를 하지 않았겠는가. 엄청난 상상력이 가동되는 풍광이다. 풍광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이다.
   
   
▲ 철원 고석정 광장에 임꺽정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라와 고려의 왕들도 노닐었던 곳
   
   고석정이 있는 바위 봉우리를 한참 바라다보면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었다. ‘임꺽정이 숨었다는 동굴이 있다는데 왜 안 보이는가?’ 하는 점이었다. 10m 높이의 바위 꼭대기 부근에 굴이 있다는데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정상 부근 왼쪽에 홈이 파인 부분을 동굴이라고 지칭했던 것일까. 이럴 때는 현지 토박이를 만나서 물어보는 게 가장 필요하다. 주변에는 관광객뿐이라 토박이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유람선이 두세 척 보인다. 한 척당 5~6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조그만 배이다. 평지에서 강물을 보는 것과 배를 타고 수면 위에서 강 양쪽의 풍경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배를 타고 보아야만 강안(江岸)의 진면목을 본다. 뱃삯 5000원을 내고 배를 타니 배를 모는 50대 중반의 뱃사공이 토박이였다. “임꺽정이 숨었던 굴은 뒤쪽에 있어요. 바로 저쪽이에요.”
   
   배를 타고 강물 위에서 고석정 뒤쪽을 올려다보니까 잠깐 그 굴 입구가 보일 듯 말 듯하다. “몇 사람이나 들어갈 수 있어요?” “입구는 좁아서 기어 들어가다시피 해야 해요. 들어가면 성인 남자 네댓 명이 고스톱 칠 정도의 공간이 되죠.” 바위에 올라가서 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요즘은 통제구역이 돼서 올라갈 수가 없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고석정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기어서 들어가면 마치 집과 같아 10여명이 앉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임꺽정이 숨었다는 굴은 이것이다. 그 굴은 거의 꼭대기 부근에 위치한다. 입구도 반대편에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반대편이라는 이야기이다. 뱃사공 말로는 이 근처에 바위 동굴이 많다고 한다. 한탄강의 지질구조가 특이해서다. 강 바닥에는 1억년 전의 화강암이 깔려 있고, 그 위에 30만년 전의 화산폭발로 현무암이 덮여 있다. 화강암과 현무암은 서로 암질이 다르고 따로 놀기 때문에 두 개의 암반층 사이에 자연 동굴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고석정에서 100여m 정도 배를 타고 더 내려가니까 강의 바위 절벽 중간쯤에도 굴의 입구가 살짝 보인다. 여기도 입구는 기어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데, 들어가면 수십 명이 피신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 동굴 안에서 깨진 그릇 같은 게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난리통에 사람들이 숨어 있었던 공간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동굴들은 현지인이 아니면 도저히 알기 힘든 위치이다. 서너 시간 정도 고석정 주변에서 머물다 보니 강한 에너지가 몸으로 들어온다.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암기(岩氣)이다. 온통 화강암과 현무암의 협곡이니까 입체적으로 기가 들어오는 위치이다. 거기에다가 강물까지 있으니 음양이 버무려져 있는 셈이다.
   
   궁예의 한이 서린 철원 한탄강. 그 철원의 고석정에서 임꺽정이 숨어 있었으니 그나마 3년이라도 관군의 추적을 피해서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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