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화(美人畵)’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동양화 속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부터 생각날 듯하다. 매끄러운 이마, 가지런하고도 풍성한 속눈썹, 맑고 깊은 눈동자, 붉고 도톰한 입술과 뺨…. 이웃 일본은 어떨까? 미인화의 어원이 원래 일본에 있듯이, 양적으로 전 세계 미인화의 수위에 올라선 나라가 일본이다. 400여년 전 에도(江戸)시대부터 미술계의 중요한 장르이자, 대중적 히트 상품에 올라선 것이 미인화였기 때문이다. 나무 판화로 찍어 판매한 ‘우키요에(浮世絵)’ 간판 그림이 바로 미인화였다. 기모노 정장 차림에서부터 목욕하는 반라(半裸) 입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미인화가 팔려나갔다. 당시 그림 한 장당 가격은 밥 한 끼 정도의 가격.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소유할 수 있는 평등한 그림이 미인화였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보듯, 미인화의 주인공은 여성 미인이지만 일본은 ‘전부’는 아니다. 여성 미인만이 아니라 ‘여성미’를 갖춘 인물이 화폭에 담기는 대상이란 점에서 조금 다르다. 여성 미인이 주인공인 미인화는 이미 아름답게 창조된 상태의 그림, 다시 말해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예술이다. 보는 사람이 아니라, 화가가 만들어 선보이는 상명하달식 일방적 차원의 그림이다. 여성미가 담긴 미인화는 어떨까? 남성들이 알지 못하는, 여성 고유의 아름다움과 여성만의 신비와 표정, 자세가 여성미의 핵심이다. 화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직접 발굴해야만 하는 그림이다. 여성미를 가진 여성은 반드시 미인일 필요가 없다. 일본 미인화의 주된 소재 중 하나지만, 찢어진 편지를 입에 물고 있는 여성이나 보름달 창문 사이로 얼굴을 반쯤 드러낸 그림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읽은 뒤 나타난 애절한 모습, 부끄러움과 설레는 마음이 표류하는 미인화다. 따라서 여성 미인이 눈과 가슴이라고 할 때, 여성미는 머리와 영혼에 주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 미인화의 영역은 여성 미인만이 아니라, 딸이나 일하는 여성, 나아가 사무라이 여성도 포함된다.

단카이세대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아버지의 초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신작 뉴스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상이다. 무라카미 작품의 공통점이자 핵심은 ‘나 자신’에 있다. 연구 대상은 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나 자신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평생 과제로 삼는다는, 이른바 ‘지분 사가시(自分探し·자아의 발견)’가 무라카미 작품의 중심 테마다. 집단이나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사소하지만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에 관한 문제에 주목한다. 그런 무라카미가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를 소재와 주제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私)소설을 발표했다. 지난 4월 23일 발간된 ‘고양이를 버린다.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시간(猫を棄てる. 父親について語るとき)’이라는 긴 제목이다.

무라카미에 따르면 성인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는 거의 연(緣)을 끊은 상태로 이어져왔다고 한다. 18살에 와세다대학 입학과 함께 도쿄로 오면서 부모와의 접촉 자체가 사라진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뇨병에 지친 90세 아버지에 대한 병문안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고양이…’는 12년 전 기억 이후 다시 재현된 아버지와의 재회라 볼 수 있다. 소재나 주제 면에서, 아버지에 관한 부분만큼 무겁고도 깊은 얘기도 드물 것이다.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테마는 한층 더 크고도 넓다. 굳이 부모를 다룬다고 할 때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우선시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보듯, 남성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둘러싼 경쟁 대상이기도 하다. 자아 발견에 방점을 둔 작가 무라카미는 과연 아버지의 초상화를 어떤 식으로 그려냈을까? 여성 미인이 아니라 여성미의 미인화 같은 아버지 초상화일 것이란 추측은 할 수 있다. 무라카미라는 자식 눈에 비친 아버지만이 아니라 무라카미 세대와 동시대 일본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라는 의미다.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가진 사람 모두가 공감할 스토리텔링이 담긴 초상화다.

아버지와 해변에 유기한 고양이

이 작품은 무라카미가 어릴 때 경험했던 고양이에 얽힌 에피소드에서부터 시작한다.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초등학교 시절 여름 오후, 아버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해변가에 간 적이 있다. 집에서 기르던 늙은 고양이를 버리기 위해서다. 고양이 한 마리 버리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시대다. 평소에도 수영을 하러 자주 갔던, 집에서 2㎞ 정도 떨어진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갔다. 고양이를 담은 박스를 바닷가에 버려두고, 자전거를 타고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데 ‘냐옹’이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해수욕장에 버린 고양이가 나타났다. 아버지와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고양이를 응시했다.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온 우리보다도 더 빨리 도착했는지, 2㎞나 떨어진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당시 아버지의 넋이 나간 모습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은 곧바로 뭔가에 감사하는 듯한, 나아가 안도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아버지와 나는 이렇게까지 멀리서 다시 찾아온 고양이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라카미 아버지에 대한 초상화는 조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찰은 아버지 유년생활의 터전이었다. 놀러간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다. 20세기 초 일본 내 인구는 폭증한다. 식량이 모자라면서 어린이들이 곳곳에 버려진다. 당시 고아원 역할을 한 곳이 절이다. 무라카미의 조부도 가난을 피해, 식구(食口)를 줄이기 위해 무라카미의 아버지를 절에다 맡긴다. 버려진 고양이는 절에 맡겨진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비견될 수 있다. 감사하면서도 안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집에 돌아온 고양이를 자신의 처지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라카미는 1949년생이다. 이른바 단카이(団塊)세대로 불리는, 1947년부터 2년간 이어진 베이비붐세대의 핵심이다. 매년 260만명씩, 3년에 걸쳐 무려 800만명이 늘어났다. 전쟁이 몰고 온 정신적·육체적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동안 참았던 동물적 본능이 일시에 터져나온다. 종족 유지는 동물적 본능의 핵심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밖에 머물던 일본인은, 군인 군속 360만명과 민간인 300만명을 포함해 전부 660만명이다. 당시 일본 인구는 7000만명 정도였다. 대략 열도 인구의 10% 정도가 한반도를 비롯한 태평양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석권한 원(元) 제국 최절정기 당시의 몽골 인구는 280만명이었다. 몽골 군인은 인구의 4분의 1 정도인 70만명이었다. 일본을 제국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태평양을 포함해 중국, 인도, 아시아 전체를 지배한 무력은 일본 인구의 5% 정도인 300만명이다. 660만명 해외 주둔 일본인은 1945년 패전과 함께 열도로 몰려든다. 본격적으로 송환이 이뤄진 것은 1946년부터다. 무라카미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양이…’의 원점은 패전 군인으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 있다. 중국과의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아버지의 전쟁 체험이 키워드다. “초등학교 때 기억이지만, 중국인 처형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중국인은 자기가 처형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다가 참수됐다고 한다. 전혀 비굴하지 않고 존경할 만한 모습이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생으로 올해 71살이다. ⓒphoto 뉴시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생으로 올해 71살이다. ⓒphoto 뉴시스

중국에서 돌아온 패잔병 아버지

10살 전후 어린이가 들은 일본도에 의한 참수 얘기는 평생 정신적 상처로 남을 만한 사건일 듯하다. 자식에게 들려준 몇 안 되는 전쟁 체험 스토리 중 하나가 중국인 참수였다는 점에서, 아버지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무라카미 팬이라면 알겠지만, ‘이지 라이더(Easy Rider)’는 대학 재학 당시 무라카미가 몰입했던 영화다. 피터 폰다(Peter Fonda) 주연의 1969년 제작 로드무비로, 무려 세 번에 걸쳐 봤다고 한다. 히피 마약 문제를 둘러싼 196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이른바 할리우드 신세대 영화다. 무라카미는 와세다대학 졸업 논문에 영화를 본 뒤의 단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 나에게 어울리는 유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란 생각도 일어났지만, 결국은 ‘고장난 배의 방향타(舵の曲ったボ一ト)’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무라카미가 말한 제자리는 앞서 말한 ‘지분 사가시’, 즉 자아 발견에 관한 것이다. 진영 논리에 기초한 편 가르기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의 이념이 아닌 우주의 출발점으로서의 ‘나 자신’이 제자리의 원점이다. 2020년 71세에 접어든 작가가 아버지 초상화를 그리게 된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연장선에 선 나 자신’에 대한 자각에 있을지 모르겠다. 초등학생 무라카미는 그렇게 좋아했던 고양이를 버리려 한 아버지를 미워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를 따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고양이 유기’에 동참했다. 일본도로 참수된 중국인을 지켜보면서도 구제는커녕 눈물도 보일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고양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동정과 무관하다. 고장난 배의 방향타처럼 결국에는 자아 발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무라카미 자신의 운명과 세계관을 아버지 초상화와 더불어 풀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대만 출신 가오얀(高妍)이 그린 13장의 잔잔한 삽화와 함께, 유화나 수묵화가 아닌 담담한 수채화로 그려진 아버지 초상화다.

약하고 초라했던 인간 실격의 세대

필자는 1962년생이다. 요즘 한국 사회 주류로 떠오른 586 꼰대 세대에 해당한다. 중학교 의무교육의 결과가 나타나면서 1981년 대입 응시생만도 100만명에 달했던 세대다. 무라카미가 속한 단카이에 해당하는 인구폭발 세대다. 586은 대학 재학 당시 대중적 차원의 이념운동을 펼친 연령대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념론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이라도 한 번쯤은 정치운동에 참가했다. 군사독재 타도가 당시의 핵심과제였다. 반미(反美) 주장도 있었지만, 당장은 민주 대통령 뽑기가 현안이었다. 반미와 평화헌법은 무라카미가 속한 단카이 정치운동의 핵심이다. 대략 1960년대 상황이다. 아버지를 패잔병으로 만든 미국과 제국 군대에 대한 혐오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차원에서 본 단카이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무라카미가 그러하듯, 미국 재즈와 할리우드 히피영화, 캘리포니아식 열대 칵테일도 즐긴다. 부자 관계는 어땠을까? 미국에 패한 아버지를 감싸고 위로할 듯하지만, 전혀 반대다. 무라카미가 그러했듯이 아버지와 연을 끊을 듯한, 서먹서먹한 관계가 대부분이다. 패잔병 남자가 보여준, 약하고 초라한 아버지가 주된 원인일 것이다. 자식에게 큰소리칠 용기조차 없는, 정신적으로 거세당한 인간이 단카이 아버지들의 원래 초상화다. 뭐 하나라도 자식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흑백필름 시대 패잔병에 불과하다.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장본인은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다. 일본은 이미 1960년대 초부터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나라다. 단카이는 뻗어가는 국력과 더불어 전도양양 성공신화에 올라탄, 일본 역사상 최고의 행운아다. 반대로 패잔병 아버지는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평생을 보낸 인간 실격의 상징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단카이가 수직 상승할수록 아버지는 움츠러들었다. ‘고양이…’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단카이의 이해와 사랑 그리고 화합의 메시지이다.

지금 한국 신문·방송 뉴스의 주역은 정치에 경도된 586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을 대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것은 586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다. 좁게는 필자 개인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로 그치겠지만, 586이 그려내는 ‘대한민국 아버지의 초상화’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연령대로 치자면 8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식민지 나라에서 태어나 전쟁과 반공 속에서 청장년기를 보낸 586 아버지에 대한 평가다. 여러 가지 단상이 떠오르지만, 이해·사랑·화합과는 무관한, 아니 정반대에 선 평가가 지배적일 듯하다. 일본 단카이와 아버지의 관계처럼 소원하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원인이란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단죄하는 자식이 부자 관계를 무너뜨리는 근본적 이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 운동권 586은 인생의 무게중심을 내가 아닌 남과 외부에 두면서 살아온 세대다. ‘타도’가 생의 목적이다. 자아 발견 차원의 조그마한 반성도 있을 수 없다. 내면을 향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패자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무너뜨릴지 여부, 다시 말해 먹느냐 먹히느냐만이 인생의 가치이자 최종 목적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시대정신이란 말이 있다.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586으로서 동세대 간에 흐르는 공기가 있다. 100만 수험생 시대가 증명하듯, 유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먹고 먹히는 관계로 살아온 세대가 586이다.

우리의 586은 아버지를 어떻게 보나?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부정하고 싶겠지만, 어느 틈엔가 586은 ‘그토록 저주하던’ 군사독재 체제하의 상식을 답습한다. 승자독식, 약육강식 논리다. 유년기·청년기의 논리라도 장년기에 들어서면 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보다 성숙하고 자기 반성으로 나아간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세상이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86은 다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이념과 타도로 일관한다. 떼로 몰려다닌 버릇으로 인해, 우물 안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 주자학적 골목대장이 갖는 의리라고나 할까? 내 편에는 한없이 자상하지만, 네 편에는 국물도 없다. 한국에서 탄생한 사자성어, ‘내로남불’은 586의 보편적 진리다. ‘민족, 국가, 통일, 우리’로 점철된 대의명분으로서의 이념은 먹고 먹힐지를 가늠하는 액세서리로 적극 활용된다. 내 자식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언론, 법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과 내 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특정지역 비하나 인격모독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재에 맞서면서 길들여진 떼 문화는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판이다. 물론 통기타 시대에나 어울리던 노동운동가도 잊지 않고 등장한다. 필자의 아버지와 주변 어른들에 관한 얘기지만, 굳이 ‘민족, 국가, 우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 같은 거대 담론에 앞서, 일단 굶지 않고 인간의 품격을 지키며 생존해나가는 것이 아버지 세대의 상식이자 원칙이었다. 그러나 2020년 586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패잔병 아버지의 초상화를 다시 세우고 장식하려는 무라카미 단카이세대와 달리, 시련을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 아버지의 초상화조차 불태우는 것이 586의 신념이다.

고양이와 중국인 참수 얘기는 무라카미와 아버지를 하나로 이어주는, 자아 발견의 접점이자 출발점이다. 부끄럽고 원망스럽고 숨기고 싶은, 고통스러운 체험이자 역사다. 부수고 비난하고 몰아세우는 데 익숙한, 불쌍한 영혼의 586에게도 필요한 메타포로서의 스토리다. 훌륭한 아버지가 아버지 초상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패든 성공이든 자식이 어떻게 해석하면서 현실에 잘 활용해나갈지가 관건이다. 따라서 아버지 초상화는 아버지가 아닌, 자식이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없는 자식은 존재할 가치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일본인 아버지의 초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아버지, 태평양전쟁을 체험한 인류 모두의 어른들에게 바치는 역사의 초상화 같은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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