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디서나 애완동물과 마주한다. 설사 기르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애완동물은 보호자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안락한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육식이나 동물실험 등을 둘러싸고는 종종 윤리 논쟁이 벌어져도 애완동물에 대한 윤리적 시비는 거의 없다. 아예 그런 논란 자체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거북한’ 주제에 대해 서슴없이 예리한 윤리의 칼을 들이댄 도발적 철학서가 있다. 바로 강원대 최훈 교수의 ‘동물윤리 대논쟁’(2019)이다. 이 책은 육식, 동물실험, 이종(異種) 이식, 동물원 동물, 애완동물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동물윤리를 두루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호기심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것은 역시 애완동물의 윤리 문제다.

동물윤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만약 동물이 도덕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에 관한 윤리를 논할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해서는 대충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동물에게는 간접적인 도덕적 지위밖에 없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가 있다는 입장이 있다.

우선 간접적 지위 담론은 동물이 고유의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위가 부여될 뿐이라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것이 동물을 해치면 그 주인의 권리를 해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주인 없는 동물이 더 많다. 또한 동물을 해치는 사람은 타인을 해치기 쉽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확증되기 어렵고, 더구나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경우든 간접적인 도덕적 지위 담론은 불완전하다.

반면 직접적 지위 담론은 동물이 고유의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보다 수준이 낮을지언정 ‘본래적 가치’라는 특별한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즉 동물도 가급적 고통을 피하고 어미와 떨어져 지내지 않고, 동료와 무리를 이루며 지내는 등 기본적인 욕구를 충분히 보장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인간이든 동물이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고유의 도덕적 지위를 갖기 위한 필요충분한 조건이다. 비록 인간보다 지능이 월등히 낮더라도 동물 역시 고통을 받으면 괴롭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만으로도 동물이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결론이 동물윤리를 다루는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농장 동물은 터무니없이 좁고 불결한 공장식 축사에서 길러지다가 인간의 먹이로 제공된다. 실험 동물은 각종 병균에 노출되어 비참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동물원 동물이나 서커스 동물도 좁은 우리에 감금되거나 행동을 강요당한다. 이런 관행들이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반면 동물을 애완동물로 이용하는 것은 동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과도한 보살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물론 학대, 인위적 교배, 방치, 유기, 중성화 수술, 안락사 등에 관한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애완동물의 구체적인 탄생 또는 존재 양상을 둘러싼 실천적인 윤리 논쟁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동물을 애완동물로 이용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옳은가.”

애완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는 대충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장난감 모형이다. 애완동물이라는 말 자체가 여기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애완동물은 주인이 희롱하는 한낱 소유물일 뿐이다. 이 모형은 동물의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를 부인하는 바, 윤리적으로 타당한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도 오늘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둘째로, 피보호자 모형이다. 이는 애완동물을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하지 않고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다. 부모-자식 관계가 이 모형의 전형이다. 인간은 어려서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낳지도 않은 애완동물이 왜 인간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 연원을 따져 보면 이 모형의 성패가 드러날 것이다.

애완동물은 인간의 목적과 이익에 따라 선택적 교배, 도태 등을 통해 신체와 성격이 변형된다. 특히 어릴 때의 신체적·행동적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도록 길러진다. 이런 특성을 유형성숙(幼形成熟·neoteny)이라고 한다. 인간은 귀엽고 작은 존재를 향해 타고난 호감을 갖고 있다. 유형성숙이야말로 애완동물의 대표 격인 애완견이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 무기다.

그런데 작고 귀여운 개를 만들기 위해 동종번식이 반복된다. 이를 통해 원하는 형질이 고착되지만, 동시에 숨겨진 결함도 고착된다. 예를 들어 불도그나 시추 따위의 단두종(短頭種)에게는 기도가 막히는 증세가 흔히 나타난다. 실제로 상당수 애완견들은 심장, 관절, 피부, 신경계 등에 잠재적 결함이나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처럼 애완동물은 태생적으로 ‘취약한’ 존재다. 또한 보호자의 귀여움을 받지만 집에 갇혀 지내야 한다. 이로 인해 그 생사가 오롯이 보호자의 손에 내맡겨진다. 즉 태생적으로 ‘의존적’ 존재이기도 하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피보호자 모형은 부모-자식 관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자식은 성장하면 보호를 벗어난다. 반면 애완동물은 평생 의존성과 취약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더구나 그런 속성을 선호하여 애완동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결국 피보호자 모형도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제기되는 것이 세 번째 태도인 반려 모형이다. 이 모형은 애완동물이 한낱 소유물이나 피보호 대상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하는 가족의 구성원이라고 상정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의존적이고 취약한 줄 알면서도 태어나게 하는 존재가 반려일 수 없다. 또한 돈을 주고 거래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애완동물이 죽을 때까지 함께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학대나 유기도 종종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진정한 반려와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애완동물은 장난감도 아니고 피보호자도 아니고 반려도 아니다. 그것은 평생 의존성과 취약성을 그 본질로 가지고 있다. 그런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그런 특징이 강한 애완동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소형견이다.

그래서 개보다 결함적 특징이 상대적으로 덜한 고양이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희귀동물 매니아도 있다. 그렇더라도 취약성과 의존성이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어느 경우든 애완동물을 새로 생겨나게 하지 않되, 이미 존재하는 애완동물은 그 본성과 역량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양한 방면에서 애완동물 예찬론도 무성하다. 따라서 윤리라는 잣대만으로 ‘동물을 애완동물로 이용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동물이 본래의 습성과 신체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선언(동물보호법 제3조)은 곱씹어 볼 만하다. 애완동물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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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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