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크로아티아 살아보기]  새벽 6시, 굉음에 눈을 떴다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문화/생활
[2607호] 2020.05.11
관련 연재물

[크로아티아 살아보기]새벽 6시, 굉음에 눈을 떴다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마스크를 쓴 한 시민이 코로나19와 지진의 여파로 운행이 중단된 트램 노선을 가로질러 건너고 있다. photo 이경민
3월 22일(현지시간) 오전 3시. 넷플릭스로 한국의 좀비드라마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크로아티아 정부가 3월 19일 코로나로 인한 셧다운을 선포한 지 사흘 째다. 이곳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맞는 세번째 3월이기도 하다.
   
   잠든 지 얼마나 됐을까.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굉음과 진동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황급히 일어나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전 6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일어나 방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중심을 잡기 힘들만큼 땅이 흔들렸다. ‘이게 뭐지? 꿈인가?’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두려움은 커졌다. 순간, 눈앞에서 텔레비전, 액자, 꽃병 등 물건들이 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지진을 낯선 땅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겪는 순간이었다.
   
   
▲ 날이 밝자 지진의 피해를 입은 흔적이 자그레브 곳곳에 보였다. photo 이경민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터로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덩치가 큰 개들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불안한 와중에 지진이라니.
   
   날이 밝자 간밤의 지진이 할퀴고 간 상흔들이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번 지진은 자그레브에서 불과 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진도 5.4의 강진이었다. 진원 깊이도 10킬로미터라고 하니, 2017년 한국 포항을 강타했던 지진과 비슷한 규모인 셈이다. 1880년 자그레브 지진 이후 자그레브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라고 했다.
   
   자그레브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의 첨탑 2개 중 하나가 일부 붕괴됐다. 108미터 높이의 자그레브 대성당의 내부 천장도 무너져 내렸다. 성당은 자그레브의 상징이자, 관광업을 주 수입으로 삼는 이 작은 도시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관광자원이었기에, 현지 주민들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 이번 지진으로 자그레브의 자랑인 대성당의 남측 첨탑이 붕괴됐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안전진단 후 붕괴 우려가 큰 북측첨탑도 철거했다. photo 이경민

   크로아티아 의회 건물 천장 일부분도 붕괴되었으며 자그레브 중심의 반 옐라치치 광장에 있는 랜드마크 빌딩 하나도 무너졌다. 일부 지역에선 정전 피해도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외출금지와 종교집회금지로 인해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단 점이다. 서울시보다 조금 큰 면적의 땅에 68만명의 인구가 비교적 넓게 분포해 산 것도 도움이 됐으리라.
   
   “경,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지진이 일어난 날 아침, 내가 사는 아파트 집주인 류비챠(Ljubica) 아주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류비챠는 타국에 혼자 있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이후에도 이틀에 한번 꼴로 안부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틈틈이 꽃 사진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동영상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 자그레브에서 내가 머무는 숙소의 주인 류비챠가 보내온 예쁜 사진.

   한국에서 크로아티아로 온 지 이제 4년차. 내가 경험한 크로아티아인들은 정이 많고 따뜻했다. 자주 마주치는 동네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자신들보다 몸집이 작은 동양 여성이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는 게 안쓰러운지 가족처럼 챙겨주곤 했다. 나는 이런 크로아티아 사람들로부터 ‘한국의 정’을 종종 느끼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서유럽 사람들에 비해 공동체 의식이 강한 편이고, 무엇보다 위기 앞에 똘똘 뭉쳐 의기투합하는 정신이 그렇다.
   
   
▲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와 일광욕을 하는 크로아티아 시민. photo 이경민

▲ 지진으로 무너진 도로 보수공사가 시작됐다. 자그레브의 5월은 원래 관광지로서 성수기가 시작되는 달이지만, 이번엔 코로나19의 여파로 거리가 텅 비어 있다. photo 이경민

   지난 3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유럽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자 식품점과 약국, 주유소를 제외한 모든 상점과 술집, 식당의 운영 및 대중교통의 운행을 중단했다. 각급 학교에도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닐 것을 권고했다. 여타 유럽 지역과는 달리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거리는 텅 비었고, 어쩌다 외출하는 시민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시민들의 적극적 협조 덕에 크로아티아에선 4월 중순부터 신규 확진자가 감소세로 돌아섰다.
   
   코로나19와 지진이라는 불행이 이중으로 찾아왔을 때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이번 지진으로 발생한 이재민은 180여명. 페이스북의 자그레브 커뮤니티 페이지엔 지진으로 머물 곳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흔쾌히 집을 내어주겠다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지진피해로 과일과 신선한 채소들을 파는 재래시장 또한 문을 닫게 되었는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판매망이 열렸다.
   
   
▲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진 자그레브 대성당 앞의 벽에 새겨진 글귀. “걱정하지마. 넌 여전히 아름다워.” photo 이경민

   지진이 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된 4월 17일. 이날은 자그레브 성당의 북측 첨탑을 폭파하는 날이었다. 성당에 있는 두 개의 첨탑 중 남측 첨탑은 지진으로 무너졌고, 하나 남은 북측 첨탑 역시 지진 이후 안전성 문제로 철거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첨탑 철거 소식은 자그레브 시민들 사이에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건물로, 마치 우리나라 남대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성당의 첨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주민들도 보였다.
   
   5월이 되자 그동안 코로나19 확산의 우려로 연기되었던 지진 보수공사가 도시 곳곳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문을 닫았던 식당도 조금씩 운영을 시작하고, 거리에도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도, 사람들의 생활도, 코로나19와 지진 이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오랜만에 자그레브 대성당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성당 앞의 벽에 누군가 그려놓은 낙서가 눈길을 끌었다. 그곳엔 대성당 그림과 함께 “Ne brini i dalje si lijepa”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걱정하지마. 넌 여전히 아름다워’라는 뜻이다. 훼손된 성당에 던지는 위로의 말이, 공포감으로 굳어 있던 내게도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크로아티아의 봄은 평소보다 느리게 찾아오고 있었다.
   

   저자 소개
   
   조선일보 영상미디어그룹 사진기자로 다년간 활동했다. 2017년부터 사진스튜디오 '블루모먼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