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의 부촌 미라플로레스(miraflores)구에 있는 클리니카 민영병원의 현대적이고 깔끔한 모습.
리마의 부촌 미라플로레스(miraflores)구에 있는 클리니카 민영병원의 현대적이고 깔끔한 모습.

지난 5월 8일 결국 페루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은 네 번째 국가비상사태 연장을 발표했다. 5월 10일 끝날 예정이었던 강제 사회격리와 야간 통행금지를 5월 24일까지 이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착잡하다. 매일 3000명 이상 새로운 감염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많지만, 바이러스가 아니라 굶어 죽겠다는 불만도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다. 상당수 빈민층은 정부의 조처에 관계없이 생계를 위해 거리에 나서고 있어 사회격리 조치를 무색게 하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의 비협조를 탓하고, 국민은 정부와 전문가들의 무능력에 절망하는 혼돈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현재의 위기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부류도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그 피해를 오롯이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무원과 일부 직장의 정규직들이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식품업, 금융업, 약국 등은 오히려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온라인 업종도 상대적으로 행복한 편이다. 일례로 필자의 어학원 선생님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일정한 수입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반면 8만명에 이르는 관광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게다가 페루 국가 경제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하루살이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입원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행상이라도 하기 위해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길거리로 나오고 있다.

페루의 엽기 요리 ‘쿠이’ 비상

이런 상황과 관련해서 최근 현지 TV 에서 흥미로운 두 가지 뉴스가 나왔다. 하나는 페루의 유명한 요리로 대표적 관광상품 중 하나인 ‘쿠이(cuy)’에 관한 것이다. 쿠이는 우리가 애완동물로 알고 있는 기니피그의 페루식 명칭이다. 페루에서는 잉카시대부터 단백질 보충원으로 쿠이를 먹었다고 한다. 외국인에게는 애완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통째로 요리해 내놓는 모양 때문에 페루의 엽기 음식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유명세를 얻으면서 관광객들이 한 번쯤 체험해 보아야 할 요리가 돼 그 소비량이 상당했다. 그런데 최근 국가비상사태로 국경이 폐쇄되고 외국인 관광객 입국이 전면 금지된 데다 식당 영업까지 불가능해지자 쿠이 소비량이 급감했다. 이 때문에 쿠이 양식업자들이 사료를 대지 못해 쿠이를 대량 안락사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이었다.

두 번째 뉴스는 거리공연가들에 대한 것이었다. 거리에서 곡예나 연주를 선보이고 관중들의 푼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이 수입원이 없어지자 단체로 거리에 나와 도움을 요청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TV에서 들려주는 각각의 상황은 측은했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한 페루 정부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의 상황은 이번 여행의 근본 목적인 어학연수의 측면에서 오히려 장점이 많아 보인다. 우선 주변의 잡다한 유혹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또 재미있는 것은 이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두 군데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VVIP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임대아파트 주인이다. 두 달간 외국인 입국이 전면 중지된 상황에서 만일 필자가 나가면 공실이 100% 확실하다 보니 집주인은 혹시 필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생길까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수시로 아파트 경비원을 통해 과일이나 생필품 등을 보낸다. 어느 날은 믹서기를 일주일 정도 빌려줄 수 없느냐고 이야기했더니 바로 다음 날 포장도 뜯지 않은 신상품이 배달됐다.

두 번째는 어학원이다. 역시 학생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어학원 입장에서, 필자같이 하루 4시간씩 묵묵히 온라인 수업을 이어가고 있는 학생은 가뭄 중의 단비 같은 존재다. 매달 필자가 수업을 연장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마다 담당 선생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필자까지 덩달아 즐거워진다.

리마의 빈촌 수르키요(urquillo)구에 있는 공영병원.
리마의 빈촌 수르키요(urquillo)구에 있는 공영병원.

TV도 없어 라디오로 온라인 수업

페루의 환자 증가 추세가 완만했던 지난 3~4월경 선뜻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올해는 학교 현장 수업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과는 달리 환자 수가 많지 않은 상황이어서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하고 의아했다.

그런 중에 우연히 한 현지인과 이 의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19의 발상지인 중국도 단계적으로 학교 문을 여는데 페루 정부는 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성급한 결정을 하는가?”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 사람의 답변은 간단하고 놀라웠다. “학교에 물이 없는데 어떡해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일부 부유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수도 리마를 포함, 대다수 페루의 공립학교에는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문을 열면 먹는 물은 말할 것도 없고, 비누나 소독제는커녕 손 씻을 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페루에서는 물과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특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밀 정보처럼 속삭이듯 덧붙인 말은 더 충격이었다. 일부 공립병원도 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문제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하겠다고 페루 정부가 용감하게 나섰으나, 컴퓨터가 없는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빈곤가정에 힘 닿는 대로 컴퓨터를 사주겠다는 대책을 세웠으나 재정 때문에 한계가 뚜렷했다. 어쩔 수 없이 TV 강의로 보완하겠다는 방침을 부랴부랴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방송 녹화에 서툰 교사들은 배우가 강의를 대신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됐다. TV마저 없는 가정이 상당수였다. 그러자 정부는 TV가 없을 경우 라디오 방송으로 대신하게 했다. 당연히 강의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페루에 오기 전부터 오랜 정치 부패와 열악한 국가 기반시설로 가난한 나라라는 것은 알고 왔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페루의 병원 역시 빈부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페루의 의료보험제도는 가입한 의료보험의 종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 달라진다는 점과 강제성 여부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단일기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제가입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반면 페루에서는 직장보험 가입자 이외에는 임의가입 형식을 취하고 있고 보험 주관 기관도 하나가 아니다.

페루의 의료보험은 크게 공영보험과 민간보험으로 나뉜다. 이 중 공영보험은 주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통합건강보험과 직장건강보험의 양대 보험이 있고, 군인과 경찰관을 대상으로 한 보험이 일부 존재한다. 국민의 약 40%를 차지하는 통합건강보험 가입자들은 흔히 민사(MINSA)라고 불리는 페루 보건부 운영의 국영병원만 이용할 수 있다. 30% 정도에 해당하는 직장건강보험 가입자들은 노동부 산하 사회건강보험사에서 운영하는 직영병원인 에살루드(EsSalud)만 이용할 수 있다. 10%도 채 되지 않는 민간보험 가입자들은 클리니카(Clínica)로 불리는 민영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민간보험 비가입자들도 클리니카를 이용할 수 있지만 그 비용이 일반인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용이 어렵다.

문제는 공영병원, 직영병원(에살루드), 민영병원(클리니카)의 시설 및 의료진 구성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클리니카는 우선 외관부터 우리나라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의료설비와 의료진의 역량도 당연히 높다. 반면 공영병원은 규모에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모든 상황이 열악하다. 최근 필자가 호기심으로 찾아간 한 공영병원은 차마 병원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에살루드 직영병원의 경우 그나마 공영병원에 비해서는 훨씬 나았다.

페루의 극명한 빈부 차이는 시장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동네 구멍가게를 제외하고 큰 규모의 시장으로는 우리의 슈퍼마켓에 해당하는 수페르메르카도(supermercado)와 전통시장에 해당하는 메르카도(mercado)로 양분된다. 수페르메르카도에는 5대 대형 업체가 있는데 특히 이 중 고급 체인인 웡(wong)과 비반다(vivanda)는 수도 리마에서도 부촌 지역에만 밀집해 있다. 수페르메르카도의 내부 모습은 서울의 슈퍼마켓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양대 부촌인 미라플로레스구와 산이시드로구에서는 재래시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가난한 구들에 분포되어 있는 재래시장은 시설, 위생 모두 열악하다. 필자가 방문했던 두 재래시장은 그나마 리마에서는 상태가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부촌의 수페르메르카도와는 비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페루의 빈부격차 문제는 끝이 없어 보인다.

한국의 고급 슈퍼에 뒤지지않는 대형 수페르메르카도 체인(위)과 열악한 시설의 재래시장 모습.
한국의 고급 슈퍼에 뒤지지않는 대형 수페르메르카도 체인(위)과 열악한 시설의 재래시장 모습.

페루 인종 중 메스티소가 많은 이유

아메리카 대륙은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랜 식민 역사 때문에 혼혈의 존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2018년에 나온 한 통계에 의하면 페루 전체인구는 원주민 34%, 백인 23%, 메스티소 38%, 물라토 2%, 기타 3%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메스티소는 백인과 원주민과의 혼혈을,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 혼혈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리마에 와 보니 거리에는 압도적으로 메스티소가 많아 보였다. 현지인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주로 산악 지역이나 밀림 지역에 거주하고 백인들은 사무·행정직 근무자가 많다고 하는데 필자의 눈에는 메스티소의 비율이 공식 통계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물론 남미 국가 중에도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처럼 주로 이민자로 이뤄진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옛 잉카제국의 영토였던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에서는 공통적으로 메스티소가 많다. 이는 유럽인에 의해 비슷한 정복 과정을 거쳤던 북미와는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1492년 콜럼버스의 역사적인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을 필두로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는 스페인어권(중남미), 영어권(미국·캐나다), 포르투갈어권(브라질), 프랑스어권(캐나다의 퀘벡주 및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 등이 존재하게 됐다. 사실상 스페인어권과 영어권이 아메리카 대륙을 양분하고 있다. 의문은 스페인 점령 지역에서는 원주민과의 혼혈이 많은데, 영국의 지배령은 혼혈이 적은 것이다. 일부는 반농담조로 과거 스페인인의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 약간은 무절제한 특성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다음 4가지 차이점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목표의 차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목표를 ‘식민지의 스페인화’에 두었다. 당시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신대륙이 이미 유럽인이 경험했던 아프리카 대륙에 비해 말라리아와 같은 토착 질병도 없고 자연환경도 훌륭한 최적의 땅으로 판단했다. 이런 식민적 바탕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지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미로 진출한 영국의 경우는 사업적 측면에서 식민지 경영에 접근했다. 즉 우선 목표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주민에 대해서는 분리정책이 주를 이루었고 남녀 간 접촉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점령 지역의 차이다. 당시 스페인이 점령한 곳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즉 잉카, 마야, 아즈텍 등과 같이 인구가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복자와 원주민과의 접촉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영국 점령 지역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소규모 그룹의 수렵·채집인(hunter·gatherer)이었다. 숫자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정착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정복자들과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셋째, 진출 시점상의 차이다. 스페인 정복자가 처음 신대륙에 진출했을 때는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의 여정이 위험하고 불확실한 요소가 많을 때였다. 따라서 정복 원정대는 대부분 남성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남녀 성비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현지에서 원주민과의 접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국의 경우 상황은 달랐다. 영국인이 스페인보다 약 1세기 정도 늦게 신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는 유럽에서 신대륙으로의 항행 기술이 상당히 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영국으로부터의 이주자들은 상당수의 본국 여자들을 아메리카 대륙에 동반할 수 있었다.

넷째, 문화적 측면의 차이다. 스페인은 로마의 영향을 오롯이 받은 라틴 국가다. 이 때문에 과거 로마제국의 점령 지역에 대한 관용정책이 정신세계에 많이 녹아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왕을 섬기는 한, 현지 여자를 취하고 아이를 낳는 데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원주민에 대해 끊임없이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스페인 왕에 대한 복종을 강요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사회·역사·문화적으로 남미 신대륙 원주민과 같은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점령지에서 혼혈아를 양산하는 것에 대해 비윤리적·반종교적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고 있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오늘날 페루에서 유난히 많은 메스티소를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다양한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