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 ‘지성선사공자상(至聖先師孔子像)’. 1913년. 비단에 색. 110.2×65㎝. 경상대도서관
채용신. ‘지성선사공자상(至聖先師孔子像)’. 1913년. 비단에 색. 110.2×65㎝. 경상대도서관

개들의 수난시대다. 진중권씨와 홍준표 의원이 설전을 벌이면서 애먼 개들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양새다. 얌전한 개들을 투전판에 먼저 끌고 나온 사람은 진중권씨다. 그가 홍준표 의원을 향해 “집 나간 X개”라고 화살을 날리자 홍준표 의원 역시 “X개 눈에는 사람이 모두 X개로 보이는 법”이라고 반격했다. 영문도 모른 채 호출당한 X개 입장에서 보면 쌈박질을 할 때마다 자신들을 들먹이는 사람들이야말로 X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죄 없는 축생을 불러낸 것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서로 뇌가 있네 없네 하며 골빈당을 만들어버리니 사람이야말로 납득하기 힘든 종족일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개 같다고 욕을 먹은 사례는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원조였다. 공자가 유랑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노(魯)나라에서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으나 5년여 만에 사표를 쓰고 정처 없는 유랑길에 올랐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길을 나서 무려 14년 동안이나 거리를 헤매었으니 그 긴 세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을 것이다. 개 취급을 당한 것도 그중 하나다. 공자가 송(宋)나라를 떠나 정(鄭)나라로 가는 도중이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 홀로 성문 아래에 서 있었다. 늙은 스승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난리가 났다. 사방팔방 쫓아다니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스승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그때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상수제자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문 근처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이마는 높고 넓어서 요(堯)임금 같고, 목덜미는 고요(皐陶)처럼 생겼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고, 허리 아래는 우(禹)임금에 비해 겨우 세 치가 짧을 뿐이었소. 그런데 이 사람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처럼 보였소.” 나중에 자공이 공자를 만나 정나라 사람이 한 말을 전했다. 그러자 공자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 형상이 옛날의 성현들과 닮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갓집 개와 같다는 말은 참으로 그럴듯하구나.”

요임금, 고요, 자산, 우임금 등은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이나 황희 정승처럼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상갓집 개’는 주인이 경황이 없어 보살핌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찬밥신세가 되기 마련이다. ‘집 나간 X개’나 집에서 내보낸 유기견이나 다를 바 없는 처량한 신세다. 이 에피소드는 공자가 그의 이상을 받아줄 군주를 찾지 못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듣고서도 대범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공자의 그릇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공적은 요순보다 뛰어나다

채용신(蔡龍臣·1848~1941)이 1913년에 그린 ‘지성선사공자상(至聖先師孔子像)’은 ‘상갓집 개’라고 놀림 받던 공자를 그린 초상화다. 공자는 심의(深衣)를 입고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두 손은 맞잡아 공수(拱手)자세를 취했다. 심의는 유학자의 법복이라고 알려진 평상복으로 ‘유교적 예를 알고 지키는 자의 예복’으로 인식되었다. 공자는 머리에 사구관(司寇冠)을 썼는데 관에는 녹색의 비녀가 꽂혔고 황색의 갓끈을 늘어뜨려 턱 밑에서 고정시켰다. 이 사구관은 공자가 사구 벼슬을 할 때 쓰던 관이다. 사구는 사법대신(司法大臣)으로 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한다. 상당히 높은 벼슬이다. 공자가 52세부터 55세까지 사구직에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간이자 마지막으로 관직생활을 했던 자리다.

채용신은 공자를 그리면서 피부결인 육리문(肉理紋)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도록 가느다란 세필(細筆)을 무수히 반복했다. 공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입은 살짝 벌려 이가 드러난 상태다. 공자가 앉은 바닥의 돗자리는 문양의 앞쪽이 크고 뒤쪽이 작으며 방향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돗자리의 표현이 평면적이고 정면을 향한 것은 1920년대 이전 채용신의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돗자리에 원근법이 적용되면서 문양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배치된다. 공자 초상화 오른쪽 상단에는 ‘지성선사공자상(至聖先師孔子像)’이라고 적혀 있다. ‘至聖’은 사마천이 ‘사기’의 ‘공자세가’에서 ‘최고의 성인’이라고 한 말에서 채택한 용어다. ‘先師’는 ‘돌아가신 스승’이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옛사람’을 뜻한다.

‘지성선사공자상’은 원래 경남 진주에 있는 도통사(道統祠)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2018년에 경상대도서관에 영구기증했다. 기증하게 된 배경에는 보관상의 어려움과 도난에 대한 우려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같은 지역 내에 믿고 맡길 수 있는 공신력 있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상대도서관이 그런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도통사는 191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공교지회(孔敎支會)를 설립해 유교 부흥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 침략으로 유교가 피폐해져 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다.

그렇다면 채용신이 ‘지성선사공자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공자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공자의 생애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하급 무사였던 늙은 아버지와 무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빈곤하게 자랐다. 처음에는 말단관리였으나 자수성가하여 50세가 넘어서야 겨우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마저도 당시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삼환씨(三桓氏)의 방해로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14년 동안 각국을 돌아다녔지만 그를 불러주는 나라는 없었고, 68세에 다시 노나라로 귀국해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정리했고,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집필하였으며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담이지만 ‘춘추’는 의리의 화신 관우(關羽)가 청룡언월도와 함께 죽을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던 책이다. 알고 보면 관우는 단순히 칼만 휘두른 무식한 칼잡이가 아니라 나름 독서도 열심히 하는 ‘호모 부커스’였던 것이다.

아무튼 공자의 생애를 보면 그다지 다른 사람의 삶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공자를 두고 성리학자 주희(朱熹·1130~1200)는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 더 뛰어나다”고 극찬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대(唐代)의 천재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공자행교상(孔子行敎像)’에는 더 심한 용비어천가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덕은 천지와 짝을 이루고(德侔天地), 도는 세상에서 으뜸이셨네(道冠古今). 육경을 산정하여 기술하시고(刪述六經), 만세에 큰 법을 남기셨다네(垂憲萬世).”

한때는 ‘상갓집 개’라고까지 놀림을 받던 공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해냈기에 그토록 엄청난 숭배와 찬탄을 받은 것일까. 채용신이 그린 ‘지성선사공자상’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정선. ‘행단고슬(杏壇敲瑟)’. 비단에 색. 29.8×23.2㎝. 왜관수도원
정선. ‘행단고슬(杏壇敲瑟)’. 비단에 색. 29.8×23.2㎝. 왜관수도원

육경 정리하고 시서예악 가르친 만세사표

‘지성선사공자상’은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에게 강학하는 만세사표(萬世師表)의 이미지다.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행단고슬(杏壇敲瑟)’을 보면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행단고슬’은 행단에서 거문고를 탄다는 뜻이다. 그림 속에서 공자와 네 명의 제자들이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 앉아 있고 두 명의 시동이 양쪽에 서 있는데 그중 한 제자가 거문고를 타고 있다. 시동을 제외한 공자와 제자들은 모두 공수 자세다. 특히 공자의 모습은 ‘지성선사공자상’과 똑같다. 정선의 작품에서 공자만 독립해서 그리면 채용신의 ‘지성선사공자상’이 될 것이다.

행단이란 단어는 ‘논어’에는 보이지 않고 ‘장자(莊子)’에만 나온다. ‘장자’에는 “공자는 우거진 숲속을 지나다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행단고슬’을 보면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장소 아랫부분을 정교하게 석축을 쌓아 주변보다 높게 함으로써 이곳이 강학 공간임을 암시했다. 그런데 ‘장자’에서는 공자가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하는데 ‘행단고슬’에서는 제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증점고슬(曾點敲瑟)’에 대한 내용이 짬뽕이 된 경우다. 공자에 대한 스토리가 여러 점의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때로는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뒤섞이기도 한다.

행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행단(杏壇)’의 杏(행)이 은행나무인지 살구나무인지에 대해 의견도 분분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杏(행)을 ‘은행(銀杏)이라는 것으로 압각수(鴨脚樹)’라고 주장한 학자가 있는 반면 ‘살구꽃이라는 행화(杏花)’로 부른 학자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행단은 공자가 평지보다는 높은 단상에서 제자들에게 시서예악을 가르치는 교육장소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행단고슬’이든 ‘증점고슬’이든 이 이야기가 발생한 시기는 공자가 유랑을 끝내고 68세에 노나라로 귀국한 이후였다. 물론 그는 40대에 이미 고전을 강의하는 유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모든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교육에 전념한 때는 귀국 이후였다. 귀국 후 공자는 쓸데없이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대신 하루 종일 행단에서 거문고를 타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육경을 기술했다. 이때부터 행단은 공자가 만세에 길이 전할 가르침을 펼친 교육의 장소를 넘어 학교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친 것만 가지고 어떻게 ‘덕은 천지와 짝을 이루고, 도는 세상에서 으뜸이셨네’라는 찬탄을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주희는 공자가 옛 성인을 계승하여 학문을 개척한 ‘계왕성(繼往聖) 개래학(開來學)’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공자가 당시까지 내려오던 옛 성인들의 가르침인 육경을 정리하고 시서예악을 교육했기 때문에 그 공이 요순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이다. 여기서 고전을 정리해 후세에 전해주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가르침이 있어도 그것을 후세에 전달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공자는 그 역할을 자처했고 훌륭하게 해냈다. 그는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간단한 속수례(束脩禮)만 행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속수는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 드리는 간단한 예물이다. 그래서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이라고 부른다. ‘문(학문)을 베푼 왕’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행단에서 교육을 할 때는 아무런 직위가 없는 자연인 신분이었다. 그렇다면 ‘지성선사공자상’과 ‘행단고슬’에서 공자가 사구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구는 공자가 50대에 짧게 맡았던 벼슬이 아닌가. 행단은 공자의 위대함이 발현된 역사적 장소다. 그런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좀 더 권위 있고 화려한 외양이 필요했고 그가 가장 잘나가던 사구 시절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공자를 그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공자 생애에서 최고로 화려했던 사구라는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물(持物)이 바로 사구관이었다. 그래서 스승 공자의 신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구관을 쓴 모습으로 그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자가 심의를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즐겨 입는 평상복이었다. 그런데 복식의 형태는 가슴 부분의 옷깃을 직령(直領)으로 하느냐 방령(方領)으로 하느냐에 따라 당색과 학맥이 달랐다. ‘지성선사공자상’과 같은 직령심의는 노론의 복장이었고, 가슴 부위가 네모진 형태는 남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만큼 심의는 정치색이 강하고 철학적 의미가 뚜렷하게 반영된 옷이었다.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예학 논쟁이 가속화하면서 당파 간에 복제(服制)를 해석하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션은 곧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나의 철학과 학통과 노선의 표현이었다. 특히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중심이 된 노론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정권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성현들의 초상화와 자신들의 초상화를 적극적으로 제작했는데 채용신은 그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채용신은 ‘지성선사공자상’을 그리던 1910년대 무렵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후 당시의 의병장이나 우국지사들을 주로 그렸는데 그들 중에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항일 유림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특히 채용신이 여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한 최익현(崔益鉉·1833~1906)과 전우(田愚·1841~1922)는 구한말 위정척사 사상가의 대표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로부터 이어져 온 학맥을 계승한 사람들이었고 채용신도 그들의 사상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처럼 채용신의 ‘지성선사공자상’은 공자의 단독초상화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작자미상. ‘공자사구상(孔子司寇像)’. 명. 비단에 색. 120×63㎝. 중국 취푸 공자박물관
작자미상. ‘공자사구상(孔子司寇像)’. 명. 비단에 색. 120×63㎝. 중국 취푸 공자박물관

입술 튀어나오고 눈은 움푹 들어간 공자

그렇다면 위대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왜 하필이면 입을 벌리게 그렸을까. 그나마 ‘지성선사공자상’은 점잖기라도 하다. 명대(明代)에 제작된 ‘공자사구상’은 기괴함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저렇게 이상한 형상을 그려놓고 제시에는 “위대한 선성이여! 사문이 여기에 있으니, 제왕의 규식이고 고금의 스승이도다(大哉宣聖 斯文在茲 帝王之式 古今之師)”로 시작하는 송(宋) 고종(高宗)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공자의 사구상을 소개한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記)’에는 공자가 49가지의 신체적 특징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 특징을 굳이 49가지로 열거한 이유는 부처의 32길상(吉相)을 의식한 처사라 할 수 있다. 즉 공자가 불교와 도교의 신들처럼 보통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졌으며, 부처의 32길상보다 더 많은 49가지의 특징을 가짐으로써 부처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었다.

이것은 복희씨와 신농에서 살펴보았듯 보통 사람과 다른 신체적 특징을 ‘성인(聖人)의 증거’로 여겼고, 고귀함의 반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후한(後漢)의 학자 왕충(王充)은 ‘논형(論衡)’ 골상(骨相)에서 “사람의 명(命)은 알기 어렵지만 골격에 근거하면 쉽게 알 수 있다”고 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명은 신체적 특징으로 드러난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공자가 제자들과 헤어져 상갓집 개처럼 헤매고 있을 때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인상착의를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덜미는 고요처럼…” 등등의 얘기를 하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정나라 사람의 발언은 공자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이런 내용을 알고 나서 진중권씨와 홍준표 의원의 설전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대화가 상당히 수준 높고 역사적인 맥락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집 나간 X개”라는 표현이나 “X개 눈에는 사람이 모두 X개로 보이는 법”이라는 표현 역시 서로가 공자나 석가처럼 위대한 인물이라는 내용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의료강국인 줄만 알았더니 문화강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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