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나 재난지원금(일명 재난기본소득)이 화제다. 실제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떠밀려 보편적 기본소득을 앞당겨 맛보고 있다. 아마 머지않아 기본소득 논쟁이 봇물을 이루며, 다른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다음 대선은 기본소득을 둘러싼 전쟁이 될지 모른다. 기본소득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찬성한다면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 반대한다면 대안이 무엇이냐. 이런 물음에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선거의 향방,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판가름 난다.

이미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 당위보다 현실에 기반한 실용적인 안내서가 눈에 띈다. 바로 이원재의 ‘소득의 미래’(2019)다. 미래에는 임금소득만으로 살기 어려우니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더구나 ‘미래’는 결코 먼 훗날이 아니다. 당장 코앞이다. 그래서 부제도 ‘앞으로 10년, 일과 소득의 질서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아무 조건 없이 (특히 재산 정도나 소득 유무에 관계없이) 국가가 모든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똑같이 지급하는 현금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국가가 주는 일률적인 월급인 셈이다. 특히 ‘선별적’이거나 ‘차별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기본’ 안에 이미 그 의미가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아직도 복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이 등장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세상이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동안 인류가 공들여 구축한 것이 산업사회 복지국가다. 그것은 완전고용을 통해 두꺼운 중산층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실제로 가장 1명이 벌어 4인가족을 그럭저럭 부양했다. 그래도 부족하면 국가가 가족 단위로 복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델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국가 간 평준화가 진행되어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체 부는 늘어나고 있다. 반면 어느 나라든 내부적인 부의 편중은 점점 더 악화하고 있다. 이처럼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의 성벽이 높아질수록 성 밖의 불안정성도 높아진다. 소득 격차는 삶의 안정성의 격차로, 문화의 격차로 확대되고, 결국 신분의 격차로 굳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아울러 정보화·자동화 등으로 ‘괜찮은’ 일자리는 도리어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정부, 공공기관, 대기업 등 불과 10%도 안 되는 ‘좋은’ 일자리를 둘러싸고 사생결단이 벌어진다. 여기에 진입하지 못하는 90% 이상은 가정조차 꾸리기 어렵다. 더구나 로봇과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인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사업장의 ‘고정적’ 일자리는 축소된다. 반면 플랫폼에 기반한 노동을 비롯해 ‘유동적’ 일자리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기술이 늘 더 많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더 풍요롭게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수백 년, 정보화 혁명은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났다. 반면 앞으로 닥칠 AI 혁명은 그 주기가 놀랄 정도로 짧아진다. 설사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도 곧바로 적응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 자리마저 AI가 대신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소득률이 성장률을 앞지른다. 여기에 세계화, 정보화, 자동화에 이어 AI까지 등장하면 자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거의 ‘노동 없이’도 부를 창출할 정도다. 부의 불균등은 가속적으로 극단화, 세습화로 치닫는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는 전체 부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의 편중화와 일자리 축소라는 미증유의 구조적인 균열에 빠져 있다.

한편 AI 시대(즉 4차 산업혁명)의 가치 창출에는 원천적으로 국가와 국민의 기여가 지대하다. 국가는 기초적인 연구 개발과 방대한 인프라 구축을 담당한다. 국민들은 일상적으로 데이터 공급원이 된다. 특히 데이터는 미래 기업 활동의 핵심 요소다. 이를 기반으로 얻어지는 기업의 이익을 주주와 임직원에게만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되도록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지금처럼 임금소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다. 즉 산업사회의 이상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현행 정책은 대부분 이런 인식의 틀에 기초하고 있다. ‘완전고용’ ‘일자리가 최대의 복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이 대표적인 산업사회 구호다.

다른 하나는 아예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즉 국가가 직접 분배에 나서서 최소한의 소득(즉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고, 그 위에 다양한 일자리 기회를 만들어 임금소득을 얻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이미 보편적 복지로 돌진하고 있다. 액수는 적지만 아동수당이나 노인수당은 이미 ‘보편적’이다. 이번 재난지원금이나 전 국민 고용보험도 마찬가지다. 그밖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누더기’ 복지나 지원이 상당 규모로 행해지고 있다.

특히 인구가 적고 노령층 비중이 높은 지방의 군(郡)에서는 군청의 ‘지원’ 없이는 지역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연간 예산을 주민들에게 1000만원씩 그냥 나누어 주어도 남는 지역이 수두룩하다. 도 예산, 국가 예산까지 합치면 실질적으로 국가지원 규모는 엄청나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 많은 지역으로 늘어나고 그만큼 국가의 역할은 더욱 방만해진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재정 개혁, 조세 혁신, 복지 및 지원의 일부 통폐합 등으로 재원 확보도 문제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아무리 늘려나가더라도 최소 생계비 수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추가적인 임금소득을 올려 더 윤택하게 살려고 할 것이다. 설사 실직을 해도 여유 있게 전직을 준비할 수 있다. 또한 임금은 없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 부자에게도 주느냐’는 저항이 예상된다. 하지만 부자는 본래 세금을 많이 낸다. 만약 기본소득을 개인소득에 합산하여 과세한다면 부분적인 회수도 가능하다. 더구나 기본소득은 기준이 명료하여, 국가의 무질서한 방만화와 공무원의 직권남용을 방지할 수도 있다. 반면 선별 복지나 선별 지원은 엄청난 행정비용이 소요되고, 대상자에게 모멸감을 준다. 더구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소득의 미래’는 기본소득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이번 팬데믹 사태를 계기로 실제로 부분적으로나마 가시화했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의 빗장을 열었다. 여당은 다음 대통령 선거 전에 전 국민 고용보험을 추진하고, 기본소득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할 태세다. 야당도 산업사회 논리에 갇혀 퍼주기니 포퓰리즘이니 하며 반대만 할 일이 아니다. 시대적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은 산업사회 담론을 뛰어넘어 AI 시대에 걸맞게 국가의 틀을 다시 짜야 할 때다. 무엇보다 ‘나누는’ 이야기 못지않게 ‘만드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만약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성공적으로 넘지 못하면 어떠한 묘책도 소용이 없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 정략적인 블랙홀이 되어서는 곤란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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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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