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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10호]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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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지리산 영랑대 가는 길… 산 속에 신라시대 인공도로가?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 신라시대 영랑신선의 자취가 느껴지는 지리산 영랑대. photo 조용헌
‘신선처럼 산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다’ ‘무릉도원 같다’ 등등의 표현이 있다. 한국인의 의식 저 깊은 지점에는 신선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살고 싶고 닮고 싶은 모델이 바로 신선인 것이다. 신선을 욕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신선으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영랑선인(永郞仙人)이다. 신라 때의 신선이다. 생몰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신라 32대 효소왕(692~702) 때의 인물이라고 한다. 흔히 영랑은 다른 3명의 신선과 함께 사선(四仙)으로 불린다.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이 신라 사선이다.
   
   영랑 또는 이들 사선이 남긴 자취는 여기저기에 있다. 전북 임실 쪽에도 경치 좋은 냇가에 사선대(四仙臺)가 있다. 사선이 여기 와서 놀았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강릉에도 영랑을 비롯한 사선의 자취가 있으며, 경상도 울주의 천전리 바위 암벽에도 영랑이 화랑들과 함께 수련을 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석각이 남아 있다. 금강산에도 고갯길의 이름 가운데 영랑현(永郞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속초에 가면 영랑호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영랑의 흔적이 전해지는 곳은 일반적으로 바닷가나 호수가 있는 장소였다는 점이 발견된다. 바다나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에서 옛날 신선들이 즐겨 놀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선들은 물만 좋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산에서는 놀지 않았단 말인가?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다. 신선은 ‘지자’이면서도 ‘인자’이다. 서양 사람들은 휴식처를 연상할 때 물이 파랗게 비치는 바닷가 해변을 생각한다. 반대로 한국 사람들은 녹음이 우거지고 바위 옆에 계곡물이 흘러가는 심산유곡을 연상한다. 서양은 지자적(智者的)인 측면이 있고, 동양은 인자적(仁者的)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선은 산에서 도를 닦고, 도를 성취한 이후로는 바다, 호수에서 유유자적할 것 같다. 어느 산에 영랑의 자취가 남아 있을까 하는 게 필자의 평소 관심사였다. 이 문제의식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 대전에서 고교 한문 교사로 근무하는 이영규(62) 선생이다.
   
   
   화랑들의 훈련터?
   
   “지리산에 있는 영랑대(永郞臺)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영랑대라니요?” “영랑대에 올라가면 기가 막힌 풍경과 함께 산의 기운을 느낄 겁니다.” “기운이라뇨? 어떤 기운이란 말입니까?” “우리나라 신선이 좋아했을 법한 기운입니다. 21세기의 속세에 사는 저도 이 영랑대에만 올라가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을 모릅니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저에게는 황홀한 공간입니다.” “아! 그래요. 명산대천 유람가인 내가 영랑대를 아직까지 가 보지 못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네요. 조만간에 무조건 한번 가봅시다.”
   
   지리산 영랑대는 1740m의 해발이다. 낮은 봉우리는 아니다. 지금은 영랑대 올라가는 코스가 입산금지 구역으로 정해져 있다. 국립공원공단으로부터 사전에 입산 허가를 받고 등산을 해야만 한다. 영랑대에 올라가는 코스는 서너 군데 있지만 가장 정통 코스는 아마도 함양군 휴천면 엄천리 동강마을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양군 쪽의 들판에서 멀리 지리산을 바라보면 이 영랑대가 가장 높은 봉우리로 보인다는 것이다. 천왕봉은 이 영랑대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으니까, 지리산 최고봉은 천왕봉이 아니라 이 영랑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지리산에 올랐던 선비들이 남긴 ‘유산록’의 길을 추적하고 있는 이영규 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영랑선인 시대는 동강마을 쪽에서 등산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양쪽 돌문 사이에 나 있는 방장문(方丈門)을 통과해 계곡물이 풍부한 청이당을 거치고 마암(馬巖)을 지나서 영랑대로 올라갔을 것으로 본다. 필자 일행은 각자 15㎏짜리 배낭을 메고 해발 1200m 높이의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부슬비 내리는 날에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메고 산길을 오르려니까 다리가 후들거렸다. 뒷덜미와 얼굴의 땀이 빗물에 섞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업료를 내야만 ‘강호동양학’이 깊어진다. 강호를 두 발로 밟아보지 않고는 글발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물이 풍부하면서도 깊지 않고 얕은 계곡물이 흘러가는 청이당 일대는 수백 명에서 1000명이 넘는 인원들이 야영을 할 수 있는 넓은 지대였다. 우선 식수가 풍부하니까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었다. 과거에 이곳을 찾았던 화랑들이 충분히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여겨졌다. 특히나 주목되는 커다란 바윗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70~80t은 나갈 법한 고인돌 같은 형태였다. 이는 제사 돌이었다고 추측된다. 제사를 드리려면 기운의 초점 역할을 하는 커다란 돌이 하나 놓여 있어야 법도에 맞다. 화랑들이 이 돌 앞에 모여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나 싶다. ‘천례탕(天禮碭)’ 터이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돌이었던 것이다. 천례탕이 세월이 흘러 구전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현재의 ‘청이당’이라는 명칭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1472년, 점필재 김종직이 남긴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보면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선인이 산수를 유람하면서 화랑 3000명을 데리고 영랑대에 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랑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 청이당 터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중간 베이스 캠프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신라 화랑들이 여기에서 머물며 밥도 해먹고 야영도 했던 장소로 추측된다.
   
   이날 같이 동행했던 경상대 수의학과 조규완(55) 교수에 의하면 우마, 즉 소와 말도 화랑들과 같이 이 지점까지 올라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축의 발굽에 대해서도 섬세한 지식이 있는 수의학과 교수가 보는 관점은 우리 같은 인문학자와는 다르다. 그 근거로는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이 그냥 자연 상태의 길이 아니라 인공으로 다듬어진 산길이라는 물증이 보이기 때문이다. 길 중간중간에 자그마한 돌들을 큰 돌 사이에 끼워 넣었다. 길을 섬세하게 다듬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은 물론 소와 말도 이동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고대의 포장도로였다는 주장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청이당 근처에서 주변의 산길을 보면 사람이 돌을 중간중간에 끼워 넣어 다듬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화랑 3000여명이 와서 풍류도를 닦고, 한편으로는 군사훈련도 겸하는 행사였다면 소와 말이 필요하다. 식량을 비롯한 야영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반 용도로도 필요하고, 장기 주둔할 경우에는 화랑들이 섭취할 고기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마가 산길을 다니려면 바위 너덜 길은 매우 불편하다. 딱딱한 발톱을 지닌 소와 말은 거친 돌길은 미끄러지기 쉽다. 중간중간에 작은 돌을 끼워 넣고 흙으로 틈새를 채워 넣은 길이어야만 소와 말이 다닐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영랑대 올라가는 산길은 이미 신라시대에 인력을 동원하여 닦아놓은 산길이다. 지리산 산속에 영랑대로(永郞大路)가 닦여 있었던 것이다. 이 영랑대로를 조선시대 선비들도 지리산을 유람할 때 유람길로 이용한 셈이다. 흔히 지리산은 인적이 매우 드문 원시림의 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람과 물자, 가축이 오갔던 산길의 대로(大路)가 깔려 있던 산이 지리산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역시 전공이 다르면 사물을 보는 관점이 풍요로워진다.
   
   
   지리산이 한눈에
   
   청이당 터에서 다시 2시간쯤 더 올라가니 마암이라는 터가 나타난다. 7~8m 높이의 바위절벽이다. 절벽 중간에 ‘馬巖(마암)’이라는 글자가 써 있다. 영랑과 함께 왔던 화랑들이 여기에다 말을 매어놓고 물을 먹였던 장소가 아닌가 싶다. 바위 밑에서는 샘물이 나온다. 해발은 1600m쯤 될까 싶다. 과거에는 이 마암의 한쪽 바위 끝이 지붕의 처마처럼 튀어나와서 ‘행랑굴’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그 처마 부위가 세월의 풍화로 떨어져 나갔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이 마암 밑에는 사람이 쉬어갈 수 있는 집과 움막이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에 나무하러 왔거나 산을 유람하던 유람객들이 임시로 쉬어갈 수 있는 시설이었던 것이다.
   
   마암에서 다시 40분 정도 더 올라가니 영랑대가 나온다. 영랑대는 봉우리의 정상 부분을 일컫는다. 멀리서 보면 시루봉같이 생겼다. 주변을 바위절벽이 빙 둘러싸고 있다. 둘러친 바위절벽이 대략 30~40m는 될 것 같다.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인 정상 부분은 흙으로 덮여 있고 약간 평평하다.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이다. 지리산 동북쪽에 솟아 있는 이 영랑대는 전망이 일품이다. 지리산 일대가 다 보인다. 지리산 서쪽의 노고단, 반야봉을 비롯해서 마천 쪽의 금대산, 백운산, 삼봉산, 법화산도 보인다. 동쪽으로 더 멀리 보면 가야산도 보이고 덕유산도 보인다. 다시 뒤를 돌아보면 진주 쪽이 보인다. 운해 위로 섬처럼 솟은 웅석산도 보이고, 그 뒤로는 황매산도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주변 360도로 200리(약 80㎞) 거리는 다 보이는 전망대이다.
   
   
   시간이 멈춘 듯 청량한 기운
   
   금관가야 최후의 저항 세력인 구형왕 추종자들이 산청 일대로 피신을 했고, 신라가 계속 치고 들어와 이 영랑대 일대를 점령한 것이다. 신라 입장에서는 경주 남산과 토함산만 보다가 처음으로 1740m의 고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니 여기에다가 가야의 저항 세력도 감시하고, 노고단 쪽의 백제를 견제하는 군사방어 시설도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랑이 대규모의 화랑을 데리고 여기에 온 것은 이러한 군사적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영랑대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청량하면서도 강한 기운이다. 기운이 강하면 탁하기 쉬운데, 영랑대의 기운은 소쇄(瀟灑)한 맛이 있다. 청량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서 있으면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인간사를 밑으로 내려다보는 호연지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화랑들이 이 기운을 받고 풍류도를 닦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영랑대 바로 앞에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보인다. 천왕봉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는 바로 영랑대이다. 천왕봉에 올라가면 천왕봉을 볼 수 없다. 천왕봉 줄기가 중봉을 거쳐 하봉을 지나고, 하봉에서 영랑대로 지맥이 내려온다. 석회질로 굳어진 중년 남자의 가슴을 망치로 부숴 버리는 게 영랑대의 풍광이다. 저녁노을의 장엄한 풍광을 보노라면 대한민국 곳곳이 명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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