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작자미상. ‘순제대효(舜帝大孝)’.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br/></div>(우) 작자미상. ‘남훈전탄금(南薰殿彈琴)’. 비단에 색. 106.7×43㎝. 국립중앙박물관
(좌) 작자미상. ‘순제대효(舜帝大孝)’. 비단에 색. 107.3×41.8㎝. 국립중앙박물관
(우) 작자미상. ‘남훈전탄금(南薰殿彈琴)’. 비단에 색. 106.7×43㎝. 국립중앙박물관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을 대변한다. 태어날 때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평범하게 지어졌겠지만 사는 동안에는 온전히 그 사람의 발자취가 된다. 죽은 후 한 사람의 행적은 오로지 이름 석 자로만 기억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대왕과 연산군은 똑같은 군왕의 신분이었으나 성군과 패륜군주로 불린다. 안중근과 이완용은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의사와 매국노라는 상반된 칭호를 받았다. 40대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결국 어떤 이름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뜻이다.

순(舜)임금의 성은 요(姚)이며 이름은 중화(重華)다. ‘중용(中庸)’ 17장에는 ‘큰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는다(大德 必得其名)’고 적혀 있다. 그에 따라 역대 황제와 왕들은 그들의 행적에 맞는 이름을 얻었다. 순임금의 이름 ‘중화’는 ‘거듭 광화(光華)를 발하였다’는 뜻이다. 순임금이 요(堯)임금의 유지를 잘 받들어 정치를 잘했기 때문에 거듭 빛났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임금의 이름은 무엇일까. 방훈(放勳)이다. 방훈은 ‘지극한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 중 ‘오제본기’에는 ‘요임금의 인자함이 하늘과 같았고 지혜는 신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훈과 중화는 줄여서 ‘훈화(勳華)’ 또는 ‘화훈(華勳)’이라고 부른다. 훈화는 역사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한 성군(聖君)의 대명사가 되었다. 순은 시호(諡號)다. 순의 의미는 ‘인자하고 성스러우면서 성대하고도 빛나는 것’이라고 했다. 순의 치적을 요약한 시호다. 이름이나 시호나 순임금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는 용어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살았기에 중화가 되고 순이 되었을까.

코끼리가 밭을 갈아주고 새들이 김을 매줘

요임금이 재위한 지 70년이 되었을 때였다. 황제의 자리를 사악(四岳)에게 물려주려 하자 “저는 덕이 없어 제위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양했다. 대신 순이라는 총각을 추천했다. 사악은 추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경의 아들로서 아버지는 완강하고 어머니는 어리석으며 동생 상(象)은 오만한데도, 효도를 다해 잘 화합하여 차츰 어질어졌으므로 간악(姦惡)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임금이 말했다. “내가 좀 시험해 보겠다. 그에게 딸을 주어 두 딸에게 모범이 되는지 관찰하겠다.” 그러면서 두 딸을 순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순의 아버지는 이름이 고수(瞽瞍)였다. 고수는 순의 어머니가 죽자 다시 아내를 얻어 상을 낳았다. 그는 사람됨이 미련했고, 후처는 순을 미워했으며, 상은 오만했다. 그는 후처에게 현혹되어, 오로지 상만을 편애하였고 항상 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도 순은 효를 다해 부모를 모셨고 동생을 살뜰히 챙겼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서 사악이 순을 요임금에게 추천했고 두 딸을 시집 보낸 것이었다. 물론 제위를 물려줄 사람에 대한 감시와 검토도 겸한 혼사였다.

순이 혼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수와 상은 순을 죽이려는 음모를 멈추지 않았다. 곳간 위에 올라가 수리를 하게 시키고는 사다리를 치워버린 채 곳간에 불을 질러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우물에 들어가게 하고는 우물 입구를 흙으로 덮어버린 적도 있었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해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들이 순을 죽이려는 계략이 계속되자 순은 결국 역산(歷山)이라는 곳에 가서 농사를 짓고 뇌택에서 고기를 잡았다. 순이 역산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밭으로 달려가서 날마다 하늘과 부모를 부르며 울었다. 부모와 동생을 원망하는 대신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기를 원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그런 순의 정성에 아버지와 동생이 결국 감동했다. 순은 그만큼 어진 사람이었다.

그의 덕성이 소문이 나자 역산 사람들은 모두 순에게 밭고랑의 경계를 양보했고,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는 뇌택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양보했다. 황하가에서 질그릇을 구울 때는 그곳 그릇들은 조악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되자 촌락이 형성되었고, 2년이 되자 읍이 형성되었으며 3년이 되자 도읍이 형성되었다. 이것을 본 요임금이 순에게 갈포 옷과 거문고를 내리고, 곡식 창고를 지어주었으며 소와 양을 주었다. ‘순제대효(舜帝大孝)’는 순이 역산에서 농사를 짓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순이 역산에서 밭을 갈고 있을 때 그의 효성에 감동한 코끼리가 와서 밭을 갈아주고 새들이 날아와 김을 매주었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모두 그의 효심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순제대효’에서 순은 곡괭이에 기대 서 있고, 두 마리 코끼리가 밭을 갈고 있다. 코끼리 양옆으로는 두 마리 새가 보인다.

코끼리가 밭을 갈고 새들이 김을 매는 이 이야기는 ‘순경역산(舜耕歷山)’ 혹은 ‘역산질우(歷山叱牛)’라는 화제(畵題)로 무수히 많은 작가들의 손을 통해 그림으로 탄생했다. 특히 민화에서는 단골메뉴로 등장했으며 ‘孝(효)’라는 문자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순임금의 효는 단순히 효라고 하지 않고 큰 효라는 의미로 ‘대효’라고 한다. 효는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실천덕목이다. 맹자는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이라 여겼고, ‘요·순의 도리도 효제(孝悌)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내게 생명을 준 부모에게 효를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일을 잘할 수가 없다는 것이 유가의 논리다. 공자는 효의 실천방법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오늘날의 효는 물질적으로 잘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다. 개나 말도 그런 정도는 챙길 줄 안다. 봉양하는 데만 힘쓰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개나 말과 구별하겠는가?”

훈훈한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화를 풀어주는구나

순은 효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정치도 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요순시대를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말한 것만 봐도 순임금의 정치가 요임금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순임금은 즉위한 다음에 정치를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대신 항상 신하들과 논의했다. 사방의 문을 열어 천하의 뛰어난 인재가 오도록 했고, 묻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의 좋은 점을 취해 선행하기를 좋아했다. 순임금은 30세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었고, 60세까지 30년 동안 섭정을 하였으며, 60세에서 110세까지 50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승하하였다. ‘서경’의 ‘우서’ 순전(舜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남훈전탄금(南薰殿彈琴)’은 순임금이 황제의 처소인 남훈전에서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로 백성의 고단함을 달랜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오현금은 다섯 줄짜리 거문고다. 그림 중앙에는 소박한 초옥이 있고, 초옥 안에서 순임금이 오현금을 타면서 노래를 부른다.

“훈훈한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불만을 풀어주도다. 때 맞은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곡식을 풍성하게 해주도다.”

방 안과 섬돌 아래에서는 신하들이 서서 순임금이 연주하는 오현금 소리를 듣고 있다. 초옥 뒤에 있는 수목 사이에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는데 남풍이 부는 듯 가지와 잎사귀가 심하게 흔들린다. 순임금은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작곡도 잘했다. 순임금이 지은 곡조를 소(韶) 또는 소소(簫韶)라고 한다. 소는 선율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하기가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공자가 제(齊)나라에서 소를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했을까. 그림 속 남훈전에서 순임금은 소를 연주하여 그 진선진미한 선율로 백성들을 위로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림 상단에 이런 제시가 적혀 있다.

“남훈전 초옥은 요임금이 지붕을 일 때 가장자리를 자르지 않았던 뜻을 본받았다. 오현금에 맞추어 노래하여 백성들의 불만을 풀어주었으니 높고 두터운 공덕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에게 30년 동안이나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제왕학을 배웠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 제대로 배웠으니 임금 노릇을 잘하는 것이다. 요임금은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고귀하면서도 태만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모습이 순임금에게서도 엿보인다. ‘사기’의 열전 중 ‘태사공자서’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살던 집은 높이가 겨우 석 자였고, 흙으로 만든 섬돌 계단이 삼 단이며, 지붕을 띠풀로 엮었고, 처마끝은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았고, 서까래도 매끈하게 다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순임금이 오현금을 타고 있는 남훈전은 황제가 사는 궁궐이다. 궁궐 계단이 겨우 흙으로 만든 세 계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순시대가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에는 제왕들의 근검절약이 있었다.

순임금은 50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다 100살이 되었을 때 우(禹)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이 말은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 부른다. 유가(儒家)에서 금과옥조로 삼는 문구다. 네 구로 된 ‘십육자심전’은 주희(朱熹)가 쓴 ‘중용장구서’에 나오는데 유가의 핵심사상일 뿐만 아니라 도통의 연원으로 삼는 문장이다.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의발을 전하는 것과 같은 문장이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쓴 책이다. 여기에 주희가 서문을 붙였는데 자사의 집필동기가 도학(道學)의 전(傳)함을 잃을까 걱정하여서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도학이란 무엇일까. 유학자들은 왜 그다지도 도를 중요시했을까. 북송의 철학자 정이(程頣)는 도학을 “성인(聖人)의 심법을 궁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이라고 불렀다. 도(道)는 ‘길’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 도리(道理)다. 사람의 길은 우주의 길과 다르지 않다. 우주의 길은 우주의 질서다. 우주의 질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를 어겨 운행된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틀림없는 우주의 도리를 본받아 내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 수신(修身)이다. 수신을 한다는 것은 곧 우주의 운행 질서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내 삶이 우주가 된다는 것, 엄청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수신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제가(齊家)가 가능하고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니 수신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수 있다.

수신의 기본은 마음 다스리기다. 그런데 말이 쉽지 시도 때도 없이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제위를 넘기면서 십육자심법을 얘기한 것이다. 제왕이라고 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세하니 항상 긴장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라.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주희는 ‘대학장구서’에서 ‘통투(通透)’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투는 훤하게 꿰뚫는 것이다. 통투하기 위해서는 “항시 암송하고 묵묵히 생각하여 반복해서 연구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기를 거듭하여 익숙해지면 비로소 ‘득력(得力)’하게 된다는 것이다. 맷집이 생긴다.

작자미상. ‘상군과 상부인(湘君 湘夫人)’. 청(淸). 비단에 색. 27.1×15.7㎝.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상군과 상부인(湘君 湘夫人)’. 청(淸). 비단에 색. 27.1×15.7㎝. 국립중앙박물관

순임금 찾아가다 소상강에 빠져 죽은 아황과 여영

‘서경’의 ‘우서’ 순전에는 순임금의 죽음에 대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수는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뜻한다. 임금은 5년 만에 한 번씩 순수를 하고 제후는 네 번을 조회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한국의 도가(道家) 쪽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우임금이 순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했다고 전한다. 무엇이 진실일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권력을 이양했는지, 우임금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를 찬탈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기’를 비롯한 유학의 경전들에서는 모두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순조롭게 선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임금이 통치한 하(夏)나라는 요순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와는 그 색깔이 조금 다르다. ‘맹자’의 ‘이루’에는 순임금이 ‘동이사람(東夷之人)’이라고 적혀 있다. 즉 요순임금이 동이족 중심의 문화였다면 우임금의 하나라는 서부 중심의 종족이 이끄는 문화였다. 고대 중국을 화하(華夏)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부족이 중심이 된 하나라가 이후 독자적인 중국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하나라 때부터 동이족인 우리나라와는 다른 중국이 된 것이다. 순임금이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창오의 들판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상군과 상부인(湘君 湘夫人)’도 순임금 살해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림 속의 두 여인은 상군과 상부인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두 여인은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 같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에는 순임금의 왕비가 된 요임금의 두 딸 이름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여인은 순임금이 창오산에서 죽자 소상강(蕭湘江)을 건너지 못해 남편의 시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소상강은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 일대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주제가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에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깃든 법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황과 여영이 소상강에서 죽기 전에 통곡하며 흘린 눈물방울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전한다. 대나무에 얼룩진 점들이 그녀들의 피눈물의 흔적이라는 얘기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지은 ‘구가(九歌)’에는 아황과 여영이 죽어 상수(湘水)의 여신인 상령(湘靈)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여신이 상군과 상부인이다. 상군과 상부인은 좋게 말하면 상수의 여신이고 통속적으로 말하면 물귀신이다. 지금도 상수에 가면 그녀들이 물귀신이 되어 비파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상군과 상부인은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송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차례 그림으로 환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대(淸代)의 ‘상군과 상부인’도 그 인기의 증거물이다.

생전에 훌륭하게 살아도 결말이 불행한 경우가 있다. 평생 악행을 저질러도 무탈하게 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 사람이 지나간 생애의 자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자취에 의해 그 사람의 생애가 평가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 후세까지 영향을 받기도 한다. 부모 잘못 때문에 자식들까지 손가락질받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선정을 베풀다 살해되었다는 순임금 얘기는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사지만 욕을 먹지는 않는다. 사람은 살 때보다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하다. 죽은 후에는 이름 석 자만 남는다. 우리 이름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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