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9일 이스탄불 페이스 모스크에서 마스크를 쓴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9일 이스탄불 페이스 모스크에서 마스크를 쓴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요즘 관심사 중 하나가 귀(耳)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 신문·방송에 오르내리는 낯뜨거운 ‘아첨’을 보면서 용비어천가에 목을 매는 간신보다 오히려 달콤한 말 한마디에 넘어가는 인간의 귀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주부전’ 속 토끼 귀라고나 할까? “잘생기고 똑똑해 보인다”는 거북의 아첨 한마디에 용궁 속 죽음의 향연도 불사하는 토끼가 자꾸 생각난다. 난세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귀를 씻고 또 씻어야 한다.

3개월째 터키에 머물고 있지만 오감 가운데 유독 귀가 발달한 느낌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리는 ‘절규’가 원인이다. 새벽, 낮, 저녁 시간에 걸쳐 무려 다섯 번씩 들리는 절규가 하루 종일 귓속에 살아 있다. 이슬람 사원(모스크)에서 행하는, 터키어로 ‘에잔(Ezan)’이라 불리는 찬양기도다. 알라 신에게 올리는 기도와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육성 메시지가 에잔이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이슬람은 소리의 종교다. 눈, 코, 머리보다 귀에 호소하는 신앙이다. 기도를 할 때도 양손으로 귀를 모으면서 신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이슬람은 귀에 호소하는 신앙

에잔의 기원은 ‘듣고(hear) 새기고(listen) 전해받는다(Informed)’는 의미의 ‘아단(Adhan)’이란 아랍어에 있다. 이슬람권 어디에 가도 접할 수 있는 독특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구성된 찬양기도다. 항상 느끼지만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건 절규’ 같은 기도다. 24시간 365일, 땀이 범벅이 된 채 신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식의 기도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과 더불어 신에게 의지하려는 인간들의 불안과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요즘에는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알라를 찬양하고 이슬람 신자로서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것이 에잔의 주된 내용이다. 아랍어로 된 정형화된 문구만 활용한다. 개인이 임의로 창작해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다. ‘알라와의 소통언어=아랍어’라 믿는 종교가 이슬람이다. 따라서 진짜 이슬람 신자라면 아랍어 공부가 꼭 필요하다.

유대교 신자가 히브리어를 필수적으로 배우는 것과 똑같다. 언어가 종교이고, 종교가 언어다. 에잔은 이슬람 모스크 바로 옆에 들어선 뾰족한 첨탑, 즉 미나레트(Minaret)를 통해 사방팔방으로 울려퍼진다. 수많은 모스크에서 동시에 터져나오는 에잔의 메아리로 인해 도시 전체가 ‘쩡쩡’ 울린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무르익는 ‘때’가 있다. 이슬람권 어디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의식이기에 대충 흘려들어 왔다. 에잔을 ‘절규’로 이해한 것은 5년 전 여름 터키 보드룸(Bodrum)에 갔을 때다. 에게해에 인접한 고대 그리스 유적지로, 지금도 2000여년 전의 기억이 밴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뜨거운 바닷가 햇볕을 피해 걷던 중 작은 모스크 주변에 이르렀다. 갑자기 초대형 스피커를 통해 에잔이 흘러나왔다.

에잔을 외치는 무아딘과의 만남

‘알라후 아크바르(Allhu Akbar·신은 위대하다), 하야 알라스 살라(Hayya alas salah·여기 와서 기도를 하라), 라 일라 일 알라(La ilah ill Allah·알라만이 유일신이다)….’ 겸손하지만 강력한 의지가 밴 아랍어 찬양기도가 쏟아져나왔다. 돌주먹으로 한 방 맞은 기분이라고 할까? 듣는 순간 압도됐다. 가슴속 깊이 숨어 있던 뜨거운 뭔가가 터져나오는 듯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듣던 신에 대한 찬미와는 격이 다른, 전부를 바치는 기도다. 멀리서 우러러보면서 행하는, 하늘에 떠 있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다. 숨소리까지 들리는 코앞의 신을 상대로 한 찬양기도라는 느낌이었다. 불과 3분 정도에 그친 에잔이었지만, 끝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미나레트 스피커 소리에 빠져들었다. 과장하자면 허리조차 똑바로 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당시 모스크 밖까지 꽉 차 있던 신자들이 돌아가는 즉시, 에잔의 주인공을 찾아나섰다. 신에게 영혼을 바치는 절규의 전도사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이슬람에서 ‘무아딘(Muaddin)’은 에잔 담당자를 지칭한다. 하루 5번씩 일주일에 35번 에잔을 전한다. 새벽이나 저녁에는 무아딘이 아니라 녹음된 에잔을 틀어주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접했던 보드룸 모스크 에잔은 무아딘의 육성 메시지였다. 터키에는 에잔을 얼마나 잘 전달하는지를 평가하는 무아딘 경연대회도 있다. 알라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이다.

기도를 끝낸 터키인의 도움으로 외출하려던 무아딘을 만날 수 있었다. 이슬람 특유의 긴 수염을 기르지 않은 30대 남성이다. “이슬람에서 에잔은 어떤 의미인가? 에잔을 전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 아랍어로 에잔을 전할 때 어떤 점에 주의하는가?” 연이은 질문에 대한 무아딘의 반응은 ‘엷은 미소’ 하나뿐이었다.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표정일까? 침묵을 깨고 무아딘이 필자의 팔을 끌었다. “모스크 안으로 함께 들어가자.”

모스크 내부로 들어갔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필자를 혼자 세워둔 채 무아딘 혼자 꿇어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분이 흘러도 일어나지 않는다. 별수 없이 기다리는 동안 혼자서 텅 빈 모스크를 둘러봤다. 신기하게도 관광객의 눈으로만 대하던 호기심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스크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안 보이던 부분이 한순간 밀려왔다고나 할까? 모스크 내부에는 중심이라 내세울 만한 제단이 따로 없다. 메카로 향하는 작은 석조물 하나가 전부인 너무도 단순한 구도다. 가구나 전자제품 하나 없는 텅 빈 아파트처럼 느껴진다. 굳이 장식물이라고 한다면 벽에 새겨진 쿠란(Quran)을 인용한 아랍어 구절이 전부다. 오해하기 쉬운데, 모스크 내 문양은 전부 쿠란 속 구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림이나 장식이 아니다. 유럽 가톨릭 교회의 기준으로 본다면, 신을 찬미하는 장식이 단 하나도 없는 너무도 ‘초라한’ 사원이다. 보드룸 모스크만이 아니라 이슬람 모스크 전부가 숭배 장식과는 무관한 공간이다.

터키 중부 아피온 울루 모스크의 첨탑과 내부. 몽골 지배하에 건설된 울루 모스크 내부는 나무로 돼 있다. ⓒphoto 유민호
터키 중부 아피온 울루 모스크의 첨탑과 내부. 몽골 지배하에 건설된 울루 모스크 내부는 나무로 돼 있다. ⓒphoto 유민호

숭배와 장식이 금지된 기하학적 빈 공간

이슬람을 창조해낸 마호메트는 모스크 내 장식을 전면 금지했다. 그 어떤 우상도 허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얼굴은 물론, 신의 얼굴과 모습까지 표현한 기독교와는 180도 다르다. 바티칸의 미켈란젤로 벽화를 보면, 손가락으로 인간과 연결된 신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죽음에 처해질 만한 무례(無禮)다. 모스크는 알라와 만나는 공간일 뿐, 신을 매개로 한 사제나 사원에 대한 숭배와 장식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그림 조각으로 채워진 찬미의 공간이 아니라 신과 만나 인간의 믿음을 증명하는 무대란 의미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기도용 도구에 불과할 뿐, 찬양·찬미하는 장식물과는 무관하다. 무아딘이 왜 모스크 안으로 데려왔을까? 에잔이 그러하듯, 중간 매개체가 전부 생략된, 신에게 곧바로 다가설 수 있는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듯하다.

보드룸에서의 기억 덕분이지만, 이후 모스크 순례는 필자의 연구테마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작은 모스크라도 눈에 띄는 즉시 안에 들어가 살펴봤다. 터키 이스탄불의 초대형 대리석 돔형 모스크가 고전적 이슬람 모스크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수많은 순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1453년 비잔틴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다.

마이크 앞에서 찬양기도 ‘에잔’을 쏟아내는 무아딘. 에잔 담당자 무아딘은 하루 5번씩 에잔을 전한다. ⓒphoto chandrikadaily.com
마이크 앞에서 찬양기도 ‘에잔’을 쏟아내는 무아딘. 에잔 담당자 무아딘은 하루 5번씩 에잔을 전한다. ⓒphoto chandrikadaily.com

몽골 점령하에 만들어진 울루 모스크

이후 비잔틴 초대형 건물 대부분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된다. 전통적 의미의 모스크는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비바람을 피할 지붕을 가진 건물이면 충분하다. 따라서 몽골 스타일 임시천막도 모스크 사원으로 활용됐다. 멋과 지성이 넘치는 소수 지향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라, 엄청난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 배를 불릴 수 있는 ‘밥집’이 모스크의 기본 정신이다.

특히 이슬람의 기반이 된 지역은 나무나 대리석과는 상관없는 사막이나 초원을 배경으로 한 곳이다. 초대형 건물을 만들 만한 자원이나 재료가 애초부터 없었다.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즉 가톨릭, 불교, 이슬람 가운데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것이 이슬람이다. 이미 만들어진 기존의 시설을 재활용하는 것이 이슬람식 사원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7세기 이슬람 탄생 후, 교세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점령지 대형 건물을 모스크로 재활용한다. 기독교 교회가 주된 재활용 공간이다. 스페인 방문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수만 명 수용능력을 자랑하는 ‘코르도바 모스크 예배당(Mosque-Cathedral of Crdoba)’은 대표적인 본보기다. 원래 교회로 사용하다가 8세기 초 이슬람에 점령된 뒤 13세기까지 모스크로 사용된 곳이다. 15세기 이후 가톨릭이 행한 개조 때문이기도 하기만, 내부 시설을 보면 모스크만의 특별한 건축기법이나 장식이 없다. ‘우상’을 없애고, 기둥이나 문을 쿠란에 기초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바꾼 것이 전부다.

고전적 의미의 모스크 원형은 나라별, 지역별로 전부 다르다. 사람을 모을 만한 실내 공간이라면 그 어디라도 모스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와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만이 갖고 있는 절제된 ‘미(美)’에 기초한 모스크도 존재한다.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소박하고도 간단한 ‘건축물’로서의 모스크다. 터키 중부 도시 아피온(Afyon) 한가운데 들어선 울루(Ulu) 모스크는 그 같은 범주 속의 공간이다. 아피온 중심의 대형 암반 카레시(Kalesi) 바로 옆에 들어선, 7세기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사원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슬람의 미(美)가 무엇인지 느껴지는 중후한 모스크다.

현재의 울루 모스크는 1272년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 때 증축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13세기 셀주크튀르크는 몽골 지배하에 있었다. 몽골의 명령하에 현지 터키인들이 만든 모스크가 울루다. 몽골은 점령지의 종교를 120% 인정, 장려한 나라다. 울루는 몽골어로 ‘위대한’이란 의미다. 14세기 이후 부분적인 증개축이 이뤄지지만, 이슬람의 미적 가치와 기준에 근거한 사원이란 평가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요즘 전염병으로 인해 터키의 모스크 대부분이 문을 닫았지만, 의외로 아피온의 울루는 열려 있었다. 금요일 집단기도는 금지하지만 개별기도는 허용된다고 한다. 몽골 천막을 연상케 하는 두꺼운 가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색 카펫과 어둠을 밝히는 작은 전등이 눈이 들어왔다. 40개 나무 기둥이 받쳐주는, 대리석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목조 건축물이다. 터키 건축 재료의 근간은 나무다. 천장도 돔형이 아닌 평평한 목조 구조로 이뤄져 있다. 가로 30m 세로 50m 정도로, 13세기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큰 사원이다.

13세기 목조 모스크가 의미하는 것

주관적 판단이지만 돔형 비잔틴 건물 안의 모스크는 이슬람 정기와 무관한 공간으로 느껴진다. 초원과 사막에서 자란 이슬람 유목민에게 대리석 돔형 모스크가 어울릴 수 있을까? 비잔틴제국을 정복한 전리품이란 의미야 있겠지만, 선지자 마호메트의 뜻에 어울릴지는 의문이다. 이슬람의 원형, 모스크의 정수를 알고 싶다면 아피온 울루와 같은 목조 사원이 적격이다. 눈에 확 띄는 특별한 것은 없지만, 이슬람이 지향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기척과 함께 텅 빈 공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50대 남성으로, 잠시 기도를 한 뒤 곧바로 모스크 모서리에 들어선 한 평(3.3㎡)짜리 작은 방으로 향했다. 기계음과 함께 마이크를 테스트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에잔 담당 무아딘이다. 스피커를 켜자마자 곧바로 신을 향한 찬양·찬미가 시작됐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세상 모든 것을 건 절규’로서의 기도가 다시 귀를 때렸다. 양손과 함께 귀를 모아 들어야 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겸손한 인간의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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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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