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주에 거주하는 34살 박한주씨는 조만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2011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평생 미국에서 살 생각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3월에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한동안 앓았던 적이 있었어요.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싶었는데 증상이 경미하다는 이유로 일주일 넘게 기다리면서 진통제와 감기약으로 버티다가 그냥 넘어갔어요. 그 무렵에 제 친언니는 한국에서 장염에 걸려 열이 나는 바람에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미국에 살면서 ‘삶의 질’이 더 떨어졌다고 말한다.

“한국의 집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뉴욕만큼은 아니에요. 직업 안정성은 떨어져요. 복지 서비스를 잘 받기도 힘들어요. 저는 한국에 살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화상채팅 프로그램 줌(zoom)을 이용해 박한주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34살 이혜은씨도 “한국이 더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이씨는 2015년부터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저는 좀 ‘일빠’(일본 빠돌이의 줄임말, 일본을 찬양하는 사람) 기질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사귄 일본 남자친구는 너무 가부장적이어서 충격을 받을 정도였어요. 차별도 심했어요. 혐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은근히 저를 이지메(왕따)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는 두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니다. 최근 들어 기존에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던 나라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700만명을 훌쩍 넘어선 요즘 들어 이런 인식이 더 강해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에서 지난 4월 둘째 주에 실시한 ‘코로나19와 국가 자부심’ 기획조사 결과를 보자.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가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교해 부정적으로 변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78%나 됐다. 그중에서도 30대의 부정적 변화가 눈에 띄는데 84%의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응답했다.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주요 국가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응답한 20~30대는 더욱 많다. 20대의 82%, 30대의 80%가 이들 국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반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은 크게 늘었다. 지난해 8월과 올해 4월에 같은 질문을 던져본 결과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사람은 지난해 68%에서 올해 80%로 크게 늘었다.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는 사람도 58%에서 71%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는 사람도 58%에서 76%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 결과만 두고 보면 코로나19 사태가 국가 자부심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현상은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하루이틀 만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몇 년간의 흐름이 지속되어 온 결과다.

K팝과 한류의 성공은 비하적인 의미로 쓰이던 ‘국뽕’이라는 단어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국뽕은 ‘국가’와 마약의 일종인 ‘히로뽕(필로폰)’을 합친 말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도취되어 있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국뽕에 취했다”거나 “국뽕은 이제 그만” 같은 표현에서 주로 쓰이던 단어로, 실제보다 과장된 애국적 자긍심을 비꼬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국뽕에 취할 만하다”는 표현으로도 자주 쓰인다.

K팝으로 국뽕 코인 탑승하기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을 휩쓸면서 ‘한국 문화는 국뽕에 취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한국 각 분야의 국가적 역량을 따져보면 문화 분야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매우 후하다.

한국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치 및 민주주의 수준이 국제적으로 상위권이라는 응답은 33%인데 대중문화의 매력도가 상위권이라는 응답은 67%나 됐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젊은 세대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한국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국가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사람은 전체의 74%인데, 20대 중에서는 84%나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런 인식은 미디어를 통해 강화되고 있다. 이설희 용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케이블TV 예능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와 같이 외국인 패널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민족주의를 어떻게 강화하는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한국 거주 외국인은 철저하게 한국에 동화돼 있다. 적극적으로 한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발언을 한다. 한국으로 여행와 출연하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단기 관광객인 그들은 ‘솔직함’을 무기로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정서 같은 것을 찬양한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문화와 비교해 한국의 우월함을 강조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거나 관광 자원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식이다.

이 교수는 이런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한국인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국이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지를 외부의 시선으로 감탄하게 하면서 이른바 ‘국뽕’을 부른다. 국뽕은 단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나 자신도 고취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는 외부의 시선으로 본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한 것이다. K팝 아이돌의 무대 영상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외국 팬들의 리액션, 외국인의 눈으로 본 안정적인 한국 치안,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한국 음식 같은 콘텐츠는 늘 인기가 있어 수백만 조회수를 자랑하는 영상도 많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콘텐츠들을 두고 ‘국뽕 코인에 탑승했다’고 비꼬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국뽕은 단지 단편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K팝 아이돌, 드라마, 음식, 스포츠같이 조각조각 국뽕을 고취하던 것이 서서히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조짐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늘어난 반(反)다문화 인식은 외국과 외국인, 외국 문화에 대해 배타적 인식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보통 ‘반다문화’는 신흥국 출신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일컫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 중 2015년과 2018년 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2015년에 비해 2018년에 오히려 국민들의 다문화수용성 점수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수가 낮아진 이유는 의식과 실제의 괴리 때문이다.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시민으로서 ‘다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막상 우리의 문제가 되면 소극적인 태도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민과의 교류 의지도 적어지고, 이주민이 일방적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돼야 한다는 생각은 커지고 있다.

이런 인식의 저변에는 외국의 다문화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비판적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진국으로 불리는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난민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다문화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헬조선’에서 벗어나 ‘국뽕주의자’ 되기

거기다 반다문화 정책을 중심으로 시작된 선진국에 대한 ‘의심’은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보건 시스템이 미국보다 우수하다는 인식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퍼지기 시작했다. 유럽 주요 국가에 여행을 다녀온 여행객들은 치안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 사회의 안전함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꺾이지 않는 반일(反日)·반중(反中) 정서는 거꾸로 ‘한국의 좋은 점’을 비교해 찾아내게 만들었다.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노 재팬’ 운동은 일본 공산품의 우수한 품질에 대한 믿음도 꺾이게 만들었다. 중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보면서 중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키웠다.

하나하나 쌓여가는 인식들은 결국 한동안 한국의 주된 여론처럼 보이던 화두 ‘헬조선’에 대한 인식도 옅어지게 했다.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은 희망이 없는 헬조선 사회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어지고 있다. 2019년 4월만 하더라도 57% 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동의했지만 12월에는 46.4%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조사에서는 25.9%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하락세의 결정적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다.

그동안에는 선진국에 대한 비판도, 한국에 대한 자긍심도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심리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이를 한데 묶어 하나의 ‘주의(主義)’로 탄생시켰다. ‘국뽕주의’라고 할 만한 이 인식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는 자긍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 같은 주변국뿐 아니라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서구 사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종종 쓰이는 ‘홍인(紅人)’이라는 신조어는 국뽕주의를 잘 대변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백인의 피부가 자주 붉어지는 것을 두고 만들어낸 이 말은 백인의 인종적인 특성을 깎아내리는 상황에서 쓰이곤 한다.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연예인 등이 소셜미디어에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글을 남길 때마다 비판 댓글이 줄줄이 이어 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흑인보다 더 차별받는 것은 아시아인’이라는 주장이 뒤따른다. 2015년 파리 테러 사건을 계기로 벌어졌던 ‘Pray for Paris(파리를 위해 기도하자)’ 추모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외국의 정치·사회 이슈에 신랄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요즘 국뽕주의의 특성이다.

외국은 하지 못하고 한국은 해내는 일들을 발굴해내면서 자긍심을 키우는 일도 곁들여진다. 사람들은 ‘K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한국의 보건·방역 시스템의 우수성을 칭찬한다. 한국 프로 스포츠가 무관중 경기로나마 개막해 리그를 진행하면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을 두고 자부심을 느끼는 일도 같은 맥락이다. 예전 같았으면 ‘수준 낮은 리그’라고 폄하당했겠지만 지금은 한국 프로 스포츠만의 개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국뽕주의에 경계를 표하는 목소리도 있기 마련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한국민들이 “온통 ‘K-국뽕’에 빠져 있다. 이 나라도 20여년 전 일본이 걸었던 길로 접어든 게 아닌가 우려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국뽕주의가 거꾸로 다른 국가와 문화에 대한 폄하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고 난 뒤에도 국뽕주의가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국뽕주의는 지금 막 세(勢)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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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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