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바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묘지. ⓒphoto 이경민
부코바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묘지. ⓒphoto 이경민

크로아티아 부코바르(Vukovar)는 상처를 품은 도시다. ‘ㄱ’자를 좌우로 반전시킨 모양처럼 생긴 크로아티아 땅에서 가장 오른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크로아티아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부코바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도나우강을 끼고 있어 지금도 크로아티아 최대의 강항(河港)을 보유하고 있는 교역도시로 꼽힌다. 과거 이 강을 따라 물자와 상인들의 이동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도시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이제 성 필립 앤 제임스 성당 등 몇 안 남은 바로크 양식 건축물에서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파괴되고 재건된 것들이다.

(좌) 부코바르는 동유럽을 관통하는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세르비아와 마주보고 있다. 강 너머로 세르비아 땅이 보인다. (우) 부코바르 중심에 위치한 성 필립 앤 제임스 카톨릭 성당의 모습. ⓒphoto 이경민
(좌) 부코바르는 동유럽을 관통하는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세르비아와 마주보고 있다. 강 너머로 세르비아 땅이 보인다. (우) 부코바르 중심에 위치한 성 필립 앤 제임스 카톨릭 성당의 모습. ⓒphoto 이경민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유고슬라비아 내전) 중 일어난 부코바르 전투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됐다. 부코바르는 도시를 포위한 세르비아군이 가한 총탄과 포탄으로 쑥대밭이 됐고, 이 역사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잊지 못할 비극으로 남았다. 도시 건물 곳곳엔 여전히 그 당시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부코바르 건물엔 여전히 30년 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당시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photo 이경민
부코바르 건물엔 여전히 30년 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당시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photo 이경민

역사 속에서 부코바르 전투는 끔찍한 학살로 기억된다. 부코바르 병원 학살 혹은 오브차라 학살이라고도 불리는데,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중인 1991년 11월 20일 부코바르 동남쪽에 위치한 오브차라의 한 농장에서 유고슬라비아인민군이 인계한 크로아티아인 포로와 민간인을 세르비아계 준군사 집단이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포로와 민간인 261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16살,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72살이었다. 이 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이자 전쟁범죄라고 한다.

(좌) 오브라차 기념관에 전시된 부코바르 학살 희생자들의 사진. (우) 오브라차 기념관 천장에는 희생자 261명을 작은 별로 형상화한 작은 조명 261개가 달려 있다. ⓒphoto 이경민
(좌) 오브라차 기념관에 전시된 부코바르 학살 희생자들의 사진. (우) 오브라차 기념관 천장에는 희생자 261명을 작은 별로 형상화한 작은 조명 261개가 달려 있다. ⓒphoto 이경민

크로아티아인들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오브차라 기념관을 만들었다. 기념관은 포로들이 처형되기 직전 수용됐던 오브라차의 한 창고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오브차라 집단무덤에서 나온 200명의 사망자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있는 61명 실종자의 사진들이 이곳에 전시돼있다. 희생자들의 사진과 집단무덤 발굴 때 발견한 개인 소지품과 신분증 같은 문서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짙은 슬픔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도인 자그레브를 포함, 크로아티아의 도시에선 부코바르라는 이름의 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 독립의 상징인 부코바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방법이다.

전쟁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났다. 전쟁 이후 도시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지만, 떠나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코바르의 인구는 현재 3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좌) 도나우 강변에서 저녁 바람을 즐기는 사람들. (우)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묘지를 다녀오는 길에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부코바르 주민. ⓒphoto 이경민
(좌) 도나우 강변에서 저녁 바람을 즐기는 사람들. (우)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묘지를 다녀오는 길에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부코바르 주민. ⓒphoto 이경민

(좌) 나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들어 웃던 부코바르의 한 소년. (우) 부코바르의 상징 워터타워. 부코바르의 상징 워터타워.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기 위해 복구하지 않고 파괴된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photo 이경민
(좌) 나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들어 웃던 부코바르의 한 소년. (우) 부코바르의 상징 워터타워. 부코바르의 상징 워터타워.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기 위해 복구하지 않고 파괴된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photo 이경민

부코바르의 이른 저녁은 한산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관광객이 유독 없기도 했지만, 이 도시가 주는 정적인 분위기 탓도 있었다.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느긋하게 식사와 커피를 즐기는 현지인들도 보였다. 그 가운데 아시아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시아인이란 이유만으로 내가 유별나게 눈에 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자그레브를 떠날 적에 지인들이 “부코바르는 특히 아시아 사람이 없는 곳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행히 내가 이곳에 머무는 5일 동안 조금도 껄끄러운 상황은 없었다.

부코바르 사람들은 여느 크로아티아 사람들처럼 친절하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선뜻 응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묘지를 다녀오는 길엔 히치하이킹으로 현지인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부코바르에서 나고 자란 차 주인은 전쟁 당시에 가족들과 함께 친척들이 있는 이스트리아 반도의 로빈으로 피난을 갔었다고 말했다. 30대 중반의 그는 어린시절에 일어났던 전쟁을 나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 끝난지 불과 30년, 아니 3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현재를 살아가는 크로아티아인들이라면 전쟁에 대한 기억과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소개

조선일보 영상미디어그룹 사진기자로 다년간 활동했다. 2017년부터 사진스튜디오 '블루모먼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경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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